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P11

학교는 런던 중심부에 있었고,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집이 있는 자치구에서 학교까지, 하나의 통제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지금보다 명백했다. 돈은 모자랐고, 전자기기도 없었고, 패션의 전제정치는 미약했고, 여자친구는 전무했다. 인간 된, 또는 자식된 도리, 즉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구직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후, 이 모든것을 합쳐 우리 부모의 인생, 즉 우리의 것과 몰래 비교해볼때 소싯적에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더 우월한 인생을 살았던 양반들의 인생에 견주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선에서 약간더 충족된 정도로 삶의 방편을 이루고 용인 받는 것으로부터 한눈을 팔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단 한 번도 공공연히 거론된 적이 없음은 당연하다. 영국중산층 특유의 고상하신 사회진화론은 언제나 암묵적으로만 존재한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같은 신체적 거리두기와 경제 붕괴, 그리고 침체된 세상은 모두전염병의 특징이다. 1500년 전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유행할때도 사제이자 역사가였던 에페수스의 요한John of Ephesus 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사방의 만물이 무로 돌아가고 허물어지고 애달픔만 남았으니••• 매매가 그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세속적 부를 누리던 상점들과 사채업자의 거대한 업소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자 온 도시가 소멸하기라도한 듯 멎어버렸으니 그렇게 모든 것이 그치고 멈춰버렸다. 

이처럼 전염병의 참상을 다룬 기록들을 읽으면 섬뜩할 만큼 낯익은 느낌이 든다. 경제는 교환을 바탕으로 하고, 교환은 사람들 간 교류에 의존한다. 사람들이 교류를 할 수 없다면 경제도,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도 성립하기 어렵다. 전염병 유행기는 생명뿐 아니라 생계를 잃는 시기다. 일상을,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자유를, 그 밖의 많은 것을 잃는 시기다. - P201

유행병은 비탄 외에 두려움도 자아낸다. 두려움 자체도 전염되므로, 일종의 유행병이 또 하나 퍼지는 셈이다. 병원체 · 감정 · 행동의전염 경로는 독립적일 수도 있고, 서로 교차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전염성이 높은 병원체도 두려움의 전염성을 이기지는못한다. 병은 감염된 사람과 접촉해야만 전염되지만, 두려움은 감염된 사람이나 두려워하는 사람 어느 쪽과 접촉함으로써도 전염될 수있다.18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염병의 공포에 대처한다. 그중에는 전염병이라는 위협에 대한 통제권을 발휘하려는 시도가 많다. 예를 들면 전염병 유행을 남들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뭔가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재난이라는 기분이 든다. 인간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대처해볼 수 있다는 얘기니까. 아폴론처럼 복수심에 불타 말릴 수 없는 신이라거나 무심하고 무자비한 자연에서 비롯된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움만 커질 뿐이다.
이렇게 통제감을 가지려는 욕구는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비난의 화살이 소수집단에, 아니면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쏠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전염병 범유행 중에 정부와 보건 당국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부정적 감정과 무력감이 만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국민이 그런 감정을 적절한 통로로 배출하여 건설적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 점으로만 봐도 보건 당국은 마스크 착용을 권장할 만한 이유가충분하고, 국민에게는 마스크 착용이 득이 될 수 있다. 마스크의 이점이 정확히 무엇이건 간에 (물론 상당히 크지만) 재난이 닥친 상황에서 뭔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통제감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또 한 예는 의료 종사자들에 대한 국민의 집단적 격려다. 뉴욕시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었지만, 이 역시 통제감과 사회적 연대감을 고취하는 행동이다. 이런행동이 주는 심리적 혜택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다른 더 고생스럽고 어렵고 힘든 일들에 참여할 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공포와 불안을 통제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 - P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희한해서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 자신도 정확히 뭔지 파악할 수 없었던 내 반응만은 기억한다. 그것은 그 아이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나는 그추진력과 집중력과 의지력이 부러웠고, 그 가여운 소녀의 지독한 결단력에서 어떤 전략의 윤곽 같은 것을 보았던 것 같다. 하나의 불안(체중)을 여러 불안(남자, 가족, 일, 허기 자체)을 맡아주는 장소로 삼고, 극도로 야위고 수척해지는 것을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피해가는 일종의 지름길이자 우회로로 삼으며,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한 모든 허기들을 한데모아 그 핵심을, 처리해야 할 한 가지 욕구를, 단 하나의 욕구를 추려내는 전략이었다. - P99

이 생각에는 분명 진실의 알갱이들이 담겨 있다. 성 역할 구분이 훨씬 느슨해져 엄마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아빠들이 기저귀를 가는 이 시대에도 여성성의 복음은 계속 살아남아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억의 메아리로 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상에서 설교된다. 식욕에 관한 복음의 계명들은 결여들-그 복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결여, 그 복음을 강화해주는 것의 결여, 그것을 포용하는 마음의 결여- 의 형태로 쌓이면서 계속 전해지고 있다. 다이어트와 체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 자신의 외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자신의 몸에 역겨움을 느끼는 어머니가 딸에게 음식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체중에 대해 느긋해하도록, 혹은 여성의 육체를 즐겁게 느끼도록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리고 욕망에대한 경험의 바탕이 금기나 극기, 남들을 먹이는 일과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허기로 인한 고통을 감추는 일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더 넓은 풍경으로 향해 가도록 이끌어주기도 쉽지않다. - P131

자기 어머니가 "자기희생의 표본" 같은 사람으로, 늘 자식들을 위해 살았고 언제나 접시에 담긴 고기 중 가장 작은 조각과 과일의 가장 멍든 부분을 먹었다는 30대 중반의 한 여성은 평생 자신의 욕망도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힘겹게 애써왔다고 말했다. 영화나 레스토랑을 고르는 것처럼 단순한 일에서도 깊은 혼란에 빠지고, "나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은그냥 한마디로 잘못된 일"이라는 느낌이 뼛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온다고 한다. 38세의 또 다른 이는 자기 집안의 여자들에게 "욕망에 관한 공백" 같은 것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마치 욕망이라는 영역 전체가 한마디로 그들은 출입할 수 없는, 안개에 감싸인 장소인 것처럼. "남자들의 필요는 언제나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고 분명하게 울렸어요. 아버지는 일곱 시 정각에 저녁 식사를 해야 했고 일곱 시 정각에 저녁 식사를 했죠. 내 남자 형제들은 축구 연습을 하러 갈 차가 필요했고 축구연습을 하러 갈 차가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와 이모와 고모들에게는 자신의 필요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가리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인 일이라는 느낌이 있었고, 그러니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 P132

그러나 이 진흙탕처럼 혼탁한 동일시 작업은 단순한 역할모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성이 요구하는 단순한 ‘하라‘와 ‘하지 마라‘를 넘어, 어머니의 취약성이나 좌절 혹은 절망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딸의 허기를 덮어버리는, 더욱 복잡한 제약의 커뮤니케이션도 있다. 정신의학자 제시카 벤저민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비록 자신은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일이 너무흔히 일어난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보통은 자기 자신보다 자녀들에 대해 더 큰 포부를 품는다고 하지만, 이런 일에도 한계는 있다. 자신의 고립 때문에 깊은 우울을 느끼는 어머니는 자녀가 걷거나 말하는 것에 열광할 수 없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어머니는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열망과 야망과 좌절감을 억누르고 있는 어머니가 자녀의 기쁨과 실패에 감정이입하며 공감할 수 없다. 바로 이 말이 욕구라는 수수께끼의 핵심에도, 착하고 예쁘고 상냥해야 한다는 명령과 더불어 여자아이들에게 새겨질 수 있는 더욱 미묘한 감정의 흔적들에도 더 가까운 것같다. - P133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허기에 대한 모든 딸의 경험은 어느 정도는 허기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에 의해 형태가 잡힌다. 어머니가 가졌거나 갖지 못한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했는지, 그에 비해 딸 자신은 어느 만큼을 원하는지 혹은 원하는 걸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지. 자신과 타인 간의 이런 비교 이런 이미지들이 모인 데이터 저장소,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거나 가치가 폄하되었거나 피로에 지친 어머니들에 대한 이런 기억들, 여자들은 권한도 힘도 야망도 섹시함도 덜하고 더넓은 세상에서 지원도 인정도 덜 받는 존재들로 표현되는 이현실. 바로 이런 것들이 여자들의 욕구 문제를 그토록 복잡한것으로 만들고, 배배 꼬여 풀리지 않는 단단한 매듭으로 만든다. 페미니스트인 어머니든 페미니스트가 아닌 어머니든, 가치가 폄하된 어머니든 번아웃된 어머니든, 어머니의 선택과 좌절, 온갖 한계와 제약은 딸에게 허기의 전형인 동시에 차이와 저항의 잠재적 근원이 되며, 이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상황을더욱 혼탁하게 만들 수 있고, 여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동일시와 동질성의 감정들을 위험하게 느껴지게 하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허기를 분노와 짝지어버릴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떨치고 일어나지 않았던 어머니 혹은 당신에게 당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떨치고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 많은 걸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기쁨을 얻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분노, 당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 혹은 당신이 이미 되어버린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아볼 줄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 당신과의 차이점으로 당신에게 혼란과 고통과 단절감을 남겨주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 이런 분노는 어머니와 통화할 때면 배 속을 딱딱하게 뭉치게 만들 만큼, 세븐일레븐으로 뛰어들어가 무언가를 훔치게 만들만큼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안긴다. - P147

욕구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개인적 회계- 얼마나 취할 것인지, 갈망과 제약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만족에 대해 글자 그대로든 비유적인 의미로든 대가를 얼마나 치를 것인지에 관한 내면의 수식는 또한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산법, 배우자든 자녀든 동료든 어머니든, 제2의 당사자에 견주어 측정하고 저울질하는 방정식이 될수도 있다. 메리 올리비에는 그 딜레마를 완벽하게 포착했다.
"당신이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를 굶길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두장이의 수선집은 동쪽으로 몇 거리쯤 떨어진 곳, 그들의 임시정부청사가 숨어 있는 거리보다 더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중국인 주인이 한국어로 정호를 맞이하고 그의 구두를 받아 뒤로 가져갔다. 정호는 양말만 신은 채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가상해에 가져온 신발은 그 구두 한 켤레가 유일했다. 심지어 테니스를 칠 때도 그 신발을 신었다.
잠시 후, 구두장이가 밑창을 갈아 손질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닦은 구두를 가져왔다.
"이거 완전 새 신발이 됐군요." 정호가 구두끈을 묶으며 말했다.
"야야" 다음에 또 봐요." 주인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호도 마주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봐요. 그 말을 곱씹으며 새로 고친 구두를 신은 발이 이끄는 대로 향한 곳은 부둣가였다. 아마도 이제 다시는 이 구두의 밑창을 갈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셔츠, 바지, 모자, 지금 그가 가진 조촐한 소지품이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하지만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 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분노는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잉걸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씨는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간듯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움뿐이었다.
정호는 부두 옆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지나쳐 선창을 따라 걸으며 숙련된 하늘의 선원처럼 날갯짓하며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의 빛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태양도 하루하루 조금씩 달랐다. 세상이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은 뼈저리는 아름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고, 다만 그는 그것을 조금만 더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 P484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P6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양이 건물들 틈새로 마지막 빛살을 쏘아 보내고있었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런 금이 난 곳으로만 내뿜어져 발산되는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술이나 아편 같은 거라도 없으면 다들 어떻게 버티겠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늘어날걸." 옥희는 감기처럼 흔해진 증상이 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평범하게 아침을 먹고 이제 목매달아 죽자고 결심하는 것 같아."
정호가 걸음을 멈추고 옥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다소 거친 어조였다. 옥희는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정호가 다시 걷기 시작하며 이렇게 덧붙이자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난 살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 그럴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그 죽음이라는 게 몸으로 느껴지더라. 가끔은 묵직한 이불 같지. 배고픔에 시달려 몸속에 남아 있는 힘이라곤 단 한 줌도 없을 때 말이야. 또 가끔은 내내 구석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사나운 개 같기도 해." 정호는 폭발하듯 빛을토해내며 스러져가는 마지막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