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과 그들의 허벅지라니,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나는한 친구에게 이렇게 투덜댔다. 내가 욕구라는 주제에 다시 몰두하게 될 때까지, 나아가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라는 바로 그 질문을 여성의 권력, 에너지, 가치에 관한 더 광범위한 질문들과, 만약 만 한다면‘이 걸쳐 있는 폭넓은 스펙트럼 전체와 연결 짓게 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체중에 대한 강박에 빠져 보낸 몇 년 동안 나는 더 넓은 세계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대안적 비전들을 고민하지 않았으며, 체중 강박이 초래하는 무자비하고 성가신 괴로움이 온갖참상과 불의로 가득한 더 큰 그림을 얼마나 깊고 완벽하게 가려버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테러 공격의 여파 속에서여러 감정이 닥쳐왔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더 씁쓸하고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감정 하나는 나 자신의 안일함, 이 세계의 다른 지역들이 미국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의 깊이와 그 증오를 키우는 데 우리가 한 역할에 대한 나의 무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경, 여자들을 미치게 몰아가고 남자들을 살인적 분노로 몰아가는 가난과 절망에 대한 나의 너무나도 안이한 무관심에 대한 깊은 창피함이었다. 그 창피함은 이렇게 표현해볼 수 있겠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부대들을 후에 탈레반의 씨앗이 될 거센 혼란 속에 남겨둔 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1980년대 말, 내가 하고 있던 걱정은 내 청바지가 너무 꼭 끼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고.
나에겐 여자들과 그들의 허벅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거기 신경 쓰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신경이 파괴적일 정도로 여자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 P298

나는 보트를 부두에 대고 넓고 푸른 리본 같은 강물을 바라보며 잠시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거울 조각을 박아놓은 듯 매끈한 유리처럼 빛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잔물결을 만들면서 햇빛이 뿌려놓은 다이아몬드 같은 광채를 되비추며 반짝거렸다. 나는 그 젊은이의 고양이와 담요 더미를 생각했고, 스컬이 나에게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컬은 나에게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다시 소개해주고, 몸을 기쁨의 원천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보게 해주고 있다고 욕망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가슴 아플 정도로 복잡하고 힘겨운 작업이다. 그 일을 위해서는 소비주의에 여전히 남성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엄격하게 구축된 기업문화와 정치 문화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깊이 새겨진 가정들에 정면으로 충돌해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 비전은 좀처럼 포착되지 않아 잘 논의되지 않을 수도 있고, <글래머>나 <레드북>에는 존재하지 않는 비전일 수있으며, 외현화하는 문화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분별해내기가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은 분명히 만들어진다.
비록 그 비전이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있지만, 무엇이 효과 있고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는 일에서, 즉 개인적 정치에서는 분명 변화를 일으킨다. 어느 교회 지하실에 모여 허기와 포만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던 한 무리의 여자들, 굶기를 재정의한 패션모델, 상담실에 앉아 감각성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닦아가는 심리 치료사와 내담자, 홀로 강물 위에서 스컬을 하며 강함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한 사람. 공적인 전쟁터들이 오늘날에는 사적인 전쟁터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두 전투에 적용되는 역학은 대체로 동일하다. 무엇이든 당신을 몸과, 자신과 다른 여자들과 연결하는 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빈 곳을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 P310

뭔가가 빠져 있어. 이 말은 그나마 내가 그 느낌을 설명하는데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것은 놓쳐버렸거나 좌절된 관계들에 대한, 한때 무언가 사랑스럽고 견고한 것이 존재했던 자리에 남겨진 거대한 공동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이것이 그 허기의 대양, 욕구의 바다 바닥에 깔린 거친 모래알이라고, 그저 인간이기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절대 파괴되지 않는 영구성을 지니고 있다. 욕망은 소멸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그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일에는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추구와 갈망의 조건인 허기의 경험과, 일시적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추구와 새로운 갈망에 밀려나고 마는 채워짐의 경험 사이에 감도는 긴장을 처음부터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일단 충족된 목표는 언제나 또 다른 목표로 이어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목표로 이어진다. - P320

라캉의 관점에서 필요는 순전한 생존에 필요한 요건들- 음식, 주거지, 온기, 움직일 자유, 타인들과의 최소한의 접촉과 관련된다. 필요는 선천적이고 본능적이며, 필요의 충족을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상-어머니의 가슴, 부드러운 담요, 깨끗한 기저귀 이 필요하다. 반면에 요구는 아이가 더욱 의식적으로 관계의 세계로 들어가 언어 사용 능력이 발달하기 시작할때 발생하며, 이런 변화는 필요한 것과 그것을 제공하거나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불변하게 연결함으로써 필요의 본질을 바꾸어놓는다. 이제 허기는 관계에서도 육체적으로도 훨씬 더많은 의미를 품은 경험이 되고 (그리고 계속 그런 경험으로 남고)그 허기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은 사람과 영원히 결부된다. 언어의 상징적 질서 체계 안에서, 음식과 온기와 거주지에대한 아이의 기본적인 생존상의 필요는 그 본능적 근원에서 분리되어 여러 층위의 사회적 의미와 대인 관계에 얽힌 의미를 띠게 된다. 나는 배가 고프다는 말은 나는 배가 고프고 내 어머니가 반응해준(반응해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나를 먹여줘는 음식에 대한 육체적 필요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줘, 나를 보살펴줘, 세상이 안전한 곳임을 내게 보여줘, 나의 의지에 귀 기울여줘라는 의미까지 표현하기 시작한다. - P326

내가 아는 여자들 중 가장 슬픈 축에 드는 이들, 격렬한 슬픔과 절망에 유난히 잘 사로잡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들은자기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손상되거나 어머니와 거리감이 있었거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기미가 배어 있었던 이들, 자기 어머니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성장한 이들이었다. 내 어머니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기겁했을 테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고,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은심지어 어머니가 나를 좋아하고 기특해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같다는 느낌까지 받았지만, 생애의 많은 부분을 나는 우리 사이에 몇 가지 배선이 초기부터 어긋났고 중추적 접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유지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닌 채 살아왔다. 어머니와 나의 언니 오빠 사이에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아버지와 더 비슷했고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더 잘 맞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매우 결정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의원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얼마나 확실한지 혹은 안정적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의 대화에는 언니와 어머니의 대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있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진정으로 잘 맞는다고 느끼지 못했던 듯 약간이지만 조심스러워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수년간 나는 어머니와함께 있을 때면 내향적이고 화가 나 있고 어두운, 마치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집에 들어갔다가는어떤 대립의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를 따라 들어오기라도한듯, 5분 만에 돌아 나오고는 했다.
분노는 식별하기가 쉽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이를 악물게되고 피가 뜨거워진다. 화를 내고 침을 뱉고 싶어진다. 나는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근원이 뭔지는 몰라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나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씁쓸한 분노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하게 된것, 혹은 다가가게 된 것이 있다. 프로비던스에서 만난 그 8월오후 같은 날들을 돌이켜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들춰본 적도없었던 그것은 그 분노 아래 깊이 흐르고 있던 슬픔이었고, 너무나 격렬해서 평범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는 연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목소리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울부짖음으로, 더없이 길고 더없이 외로운 곡소리로 나왔을 것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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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의의 집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 자리잡았다. 곧 수많은 책과 1500편 이상의 기록 문서로 가득 채워질 긴 탁자 좌우 양편에는 법정 속기사들이 앉아 있다. 판사 바로 아래에는 피고인과 변호인, 그리고 법정 사이에서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도와줄 통역사들이 있다.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어, 독일어를 쓰는 피고측 사람들은 대부분의 방청객들과 마찬가지로 무선 동시통역 장치를통해 재판 진행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 P49

 심지어 검사는 법정 건물 안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다(그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을 대질신문하는 데 신물이 났던 것이다). 법정에서 자주 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정의는 이런 어떤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란다우 판사가 재판 직후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 방문을 담당한 유대인 기구들 외에는 알려지지않았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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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80

에이드리언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공표해줄 것을 부탁했고, 검시관은 그의 말대로 했다. 마침내 나는 물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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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공적 담론에서 뉘앙스 이해력이 사라져버렸다는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와 정책을 흑 아니면 백으로 제시하고, 또 그렇게 판단한다. 미묘한 차이와 복잡성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이 범유행이 앞으로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이 있고, 각각 성공 확률은 어떠하니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가 쉽지 않다. 맹목적으로 신뢰할 이유도 없지만, 무턱대고 겁먹을 이유도 없다. 짤막한 문구와 영상으로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과학자들도 이제 조금씩 파악해가고 있는 복잡한 바이러스에 사회가 대처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전염병은 늘 그러듯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며 정책결정자들을 당황하게 했으니, 결과적으로 대중의 대응은 늘 한발 늦곤 했다.
물론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시기에는 단순하고 확실한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기 마련이니, 정치인과 장사꾼들의 거짓말과 거짓 약속이 횡행할 여지가 커진다.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을 비롯해전국 각지의 정치인들이 애초부터 과학적으로 명백히 거짓인 정보를 퍼뜨렸다. 그들의 말과 달리, 무증상 전파는 가능했고 비약물적개입 조치가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코로나19는 독감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예기치 않은 효과 중 하나로, 바이러스의 위협과 씨름하는 사회에서 앞으로는 과학자뿐 아니라 과학적 정보를 점점 진지하게 대하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P409

코로나19 범유행 중에 유전학자들은 혹시 일부 유전자가 SARS-2바이러스에 잘 감염되거나 저항력을 갖는 효과가 있는지 탐색에 나섰다. 그런 유전자를 찾아내면 어떤 환자가 특히 위험한지도 알 수있고, 유전적 차이를 참고해 효과적인 약리학적 전략을 발견하고 치료약 후보를 물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초기연구 결과 코로나19 증상이 극히 심한 환자들에게서 몇몇 특정 유전자가 이례적으로 빈번히 발견됐다. 또 환자의 혈액형이 A형이면 산소 흡입 조치와 인공호흡기 착용이 필요해질 확률이 다른 혈액형보다 50% 높았고, 혈액형이 O형인 사람은 감염이 더 잘 안 됐다(묘하게도 콜레라 생존율은 혈액형 관련성이 그 반대로 나타난다). 3번염색체에서 코로나19 증상 악화와 연관된 유전자 6개도 발견됐다. 그중 한 유전자는 ACE2 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 유전자는 기도 감염에 대한 면역반응에 관여하므로, 생리학적으로 타당한 결과다. 또한 이 6개의 유전자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현생 인류에 전해졌으며, 특히 동남아 지역 사람들이 흔히 보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 P439

고대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비극 작품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즉, 기술)을 선물한 죄로 바위에 사슬로 묶이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선물은 하나가 더 있었다. 인간이 자기 죽음을 내다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사례를 보고 자신도 고통받고 죽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그런 무지와 불확실성은 인간을 괴롭힌다. 기술의 힘을 빌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만, 예측이 정확하면서 암울하다면 그것도 문제다. 연극의 코러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들의 괴로움을 낫게 할 치료법이 무엇이오?"라고 묻는다. 프로메테우스는 "가슴에 맹목적 희망을 단단히 심어주었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맹목적 희망은 우리 역경의 동반자로 삼기에는 미덥지못하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희망은 요긴한 구실을 한다. 고개를 들어 미래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날을 준비하게 한다.
미생물은 인류 탄생 이래 인간의 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유행병은 수만 년 동안 우리의 진화에 기여했다. 신화 속 아폴론의 화살처럼, 인류 역사와 늘 함께해왔다. 우리는 이전에도 우리 손에 쥔 생물학적·사회적 수단으로 번번이 유행병을 이겨냈다. 우리는 일상을 되찾을 것이다. 역병은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역병처럼, 희망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인간과 함께한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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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허기를 폭넓게 정의했고, 여자의 섹슈얼리티, 야망, 경제적 삶, 법적 자유 모두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페미니즘이 지나간 자리에 등장해 풍경 전체를 휩쓸며 시대의 풍조로 떠오른 소비주의는 허기를 가장 좁은 의미로, 요컨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해결책, 외적인 해법,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정의했다. - P246

우리가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식이나 옷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할 때처럼 우리의 성적욕구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할 수 있도록 양육되었다면, 신체 부위나 가슴의 모양이나 허벅지 사이즈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적인 몸 자체를, 그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만져질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검토하고 이해하도록 격려받았다면 우리의 느낌은 어땠을까? 이런 종류의 사고 틀은 당시 우리 의식 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중 다수에게 30대나 40대 한 여자의 인생에서 행위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오랜 세월의 분투 끝에 마침내 뼛속에 자리 잡게 되는 시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계속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우리 자신의 몸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고, 섹슈얼리티는 유혹적인 만큼 두렵기도 한 자유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그 안에 살면서도 다 같이 모르는 척하는 지뢰밭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 지뢰들의 이름이 지뢰는 공포, 그 지뢰는 힘, 저 지뢰는 순전한 호르몬의 에너지라는 식으로- 구별할 줄 몰랐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우리에게 그 지뢰의 뇌관을 제거할 도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는 느낌인데, 이 느낌은 제기되지도 대답되지도 않은 그 모든 질문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그것은 마치 여자의 섹슈얼리티, 나의 섹슈얼리티는 어째선지 뒷전에 내팽개쳐진 채 논의되거나 탐사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궁극적으로 남자들의 섹슈얼리티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257

이 점은 특히 ‘남자 만족시키기‘ 전선에서 더욱 그렇다. <글래머>는 "그 남자가 오늘밤 해보고 싶어 안달하는, ‘계속해줘‘라고 외칠 마흔세 가지 기술"이라는 글을 실었다. <코스모폴리탄>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섹스 파트너가 되어라-그를 무자비하게 자극하고 서서히 유혹하고 그가 꿈에 그리던 방식으로 그의 세계를 뒤흔들어라!"라고 제안한다. 이상하게 섹스뿐아니라 숫자에도 집착하는 <레드북>은 "당신의 섹스 라이프를 더 뜨겁게 달궈줄 여섯 가지 동작" "모든 여자가 알아야 할 다섯 가지의 끝내주는 섹스 기교" "더 좋은 섹스를 위해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열 가지 방법" "당신 남자의 몸에서 만져줘야할 섹시한 부위 서른다섯 군데를 알려준다. 이런 것이 언제나 등장하는 표준적인 이야기-그 남자, 당신의 남자, 그가 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나는 이 이야기들이 나의 성장기에 여성의 성적 욕구를 에워싸고 있던 침묵과 불확실성의 강과 똑같은 강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 아닐까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 이야기들이 다 똑같은 해결책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알 수 없고, 논의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딱히 허용되지도 않는 욕구를 잘모르겠다면 그의 욕구에 집중하라. 바른 방향을 보고 (더 중요하게는) 바른 방식으로 행동하라.‘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해결책에는 성에 관한 지식이란 쌍방이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 여성의 쾌락은 남성의 쾌락을 자극하는 능력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 - P264

나는 이것이 매우 강력한 조합이자 또한 매우 강력한 상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현화하는 소비주의 사고방식-구매하라. 쇼핑하라, 지출하라의 폭발적 확산과 페미니즘의 가시성과 추동력 감소가 어쩌다 발을 맞추어 진행된 것이다. 그로인해 거짓 약속이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고, 욕망의 정의들이 가장 바로잡기 어려운 방식들로 왜곡되었다. 또한 시각까지 왜곡되었다. 페미니즘에 낀 짙은 망각의 안개에 가려 권리와 전인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시기를 회상하면 굶기가 만들어주던 구조와 통제감을 포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안정감을 뿌리 깊이 뒤흔들었는지 떠오른다. 내 몸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일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그 세상은 굽이를 돌 때마다 욕망과 필요에 대한 의문이 솟아오르는 곳이었다. 협상해야 할고용주들이 있었고, 친밀해져야 할 남자들 혹은 그러지 말아야 할 남자들이 있었으며, 이제는 풀어놓아야 할, 평생을 짊어지고 살았던 욕구에 관한 부담감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상사앞에서 젊거나 초조하거나 귀여워 보이지 않고 전문적이고 진지하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인정에 대한 욕망에서 성적 욕망을 섬세하게 분리해낼 수 있을까? 여성의 권위, 사이즈, 행위 주체성, 야망에 관한 문제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아니 애초에 그런 문제들은 어떤 틀로 구성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이 여자들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너무나 최근의 일인것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그 의미에 관해,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관해, 그것이 제기한 도전들에 관해 말하기를 별안간 뚝 그만둬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길잡이를 찾겠다고 신문이나 여성 잡지의 라이프 스타일 섹션을 뒤적이면 더없이 얄팍한 조언들을 찔끔찔끔 발견할 뿐이었는데, 대부분은 1980년대에 걸핏하면 입에 올리던, 요점에서 어긋날 뿐 아니라 한심할정도로 부적절한 ‘성공에 어울리게 차려입어라‘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었다. 까다로운 감정의 풍경은 잊어요. 머리와 가슴의 관계도 잊어요. 힘이니 보상이니 껄끄러운 문제들이 도사리고있는 직업의 세계도 잊어요. 초대형 어깨 패드가 들어간 이 파워 수트를 입어보세요. 배와 엉덩이를 잡아주는 고탄력 팬티스타킹을 입어보세요. 문제를 외현화하고 쇼핑을 하세요.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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