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결혼 후 목동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옆집에는 대기업에 다니는 아저씨와 아이들 둘을 키우며 집에서 미술 교실을 운영하는 아줌마가 살았다. 하루는 아줌마가 사정이 생겼다며 자기 대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마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다섯살 아이의 손을 꼭 잡고길 건너로 갔다. 그런데 어린이집 입구에서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이는 안 들어가겠다고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흐앙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어 교사에게작고 보드라운 아이 손을 넘겨주었고, 곧 문이 닫혔다. 무슨 사이렌처럼 울리는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돌아서자니 마음이 찌르르해지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눈물도 전염이 되는걸까. 예기치 못한 감정에 괜스레 머쓱했다. 인간은 아무리나이가 어려도 저마다 감당해야 할 슬픔의 몫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 P5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방이다. 인터넷에서 인종차별 철폐 집회 사진을 봤는데 흑인이 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평화는 백인의 단어다. 해방이 우리의 언어다 모아놓고 나니 이 책에도 해방이란 말이 꽤 여러번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되고부터, 즉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하나씩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기에쓴 것 같다. 나도 해방을 우리의 언어로 삼는다. 비록 앎이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오는 것이다. - P23

‘욕구란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캐럴라인 냅 Caroline Knapp은 『욕구들』에서 정의해요. 그런데 이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여자는 하지 말아야 해요.
"먹지마, 커지지 마, 멀리 가지 마, 많이 원하지마."
꽤나 익숙한 명령이죠. 사랑눈이 다이어트 실패기를 두페이지나 되는 글로 썼던 것처럼 먹지 말아야 하고요. 사랑눈이 전문직이지만 직업적 야망을 갖지 않게 된 것처럼 남자보다 잘나가도 안 되고요. 사랑눈이 수업 하나 들으면서배우자, 아이,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것처럼 나의 필요는 가족의 필요를 위해 포기해야하고....
이렇게 ‘하지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캐럴라인 냅이 떠올리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죠. "애초에 자신에게 욕망하고 원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못하고, 자신의 필요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심지어 그 필요들을 거의 인정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상상하게 된다." 22-23) - P53

Y에게 연애 개시 문자를 받고 제가 덕담을 건넸죠. 사람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 (164면)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159면)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Y,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대개는 그렇죠. 그런데 한 존재가 자기를 격하게 바꿔내는 계기가 두가지 있는것 같아요. 하나는 사랑으로 아플 때,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할때. 그래서 사랑을 쉽게 하고 돈을 쉽게 벌고 그러면 좋겠지만타자 체험의 기회가, 즉 다른 내가 되어볼 계기가 없다는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삶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삶에서 사랑을 중히 여기고 사랑을 공부하는 사랑을 해야한다는 믿음을 갖는 이유이지요.
근데 저자인 알랭 바디우의 연애는 어땠을까요. 실전에서는 문자메시지의 조사 하나, 구두점 하나에 웃고 우는 마당에 이런 철학 개념과 사유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한대요. 그래도 저는 작은 쓸모를 믿는 편입니다. 암기해둔 이사랑에 관한 비장한 말들과 옳은 말들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혼란의 순간에 불쑥 솟아나 생각과 판단의중심추가 되어줄 거예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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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텐장의 작업실에서 그가 <국민당의 승객 사고방식>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논했다. 그것은 지금 타이완의 정부란 본토에서 건너온 중화 민족주의 정부가 언젠가 본토를 다시 정복하기 전에 잠시 이곳에 머무는 것뿐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우톈장은 말했다. 「이곳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으로 왔습니다. 타이완에는 초고속 도로망이 없습니다. 국민당은 가급적 빨리 이곳을 뜰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이 섬에는 합판으로 지어진 화려한 건물들뿐입니다. 튼튼한 토대나 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짜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죠. 이 상황을 바꿔야 합니다.」  - P298

이튿날 우리는 동물들이 선선한 기온을 활용하여 활동하는 아침 일찍 나섰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 밑에서 싸간 음식을 먹은 뒤, 어스름을 틈타 사냥하는 포식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네명은 아직 무엇이 되었든 동물만 봤다 하면 경이롭게 느끼는 순진한 단계였던지라, 잠비아에서는 지저분한 개의 몸에 들끓는 벼룩만큼 흔하기 짝이 없는 불그스름한 푸쿠 영양만 봐도 차를 세우고 구경했다. 우리는 악어들을 보았고, 하마들이 제 몸을 미끄럼틀 삼아 미끄러져서 얕은 웅덩이에 몸을 잠그고 흡족해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하이에나 한마리가 얼룩말 떼를 노리는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멋진 것은 코끼리들이었다. 녀석들은 진흙탕에서는 흡사 거대한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걸었고, 단단한 땅에 닿아야 발바닥을 다폈다. 밀렵의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곳 야생 동물들은사람을 경계하는 법을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코끼리 수컷 한 마리는 우리 심장이 덜컥 멎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고, 우리는녀석이 제 코를 진흙탕 속에서 휘둘러 마치 그 속에서 별을 찾는 망원경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삼십 분쯤 지켜보았다.
둘째 날 처음 사자를 보았다. 암컷 사자는 공포에 몸이 굳은 어린 푸쿠를 향해 눈을 번득이면서 살금살금 교묘하게 다가갔다. 그어떤 일곱 베일의 춤도 안무가 그보다 더 세심하게 짜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상대의 저항을 그보다 더 완벽히 무력화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날 우리는 꼭 머나먼 원정에 나선 성미 나쁜 중늙은이들처럼 보이는 누 떼를 보았다. 크고 사랑스러운 쿠두, 워터벅, 호리호리한 임팔라도 수백 마리 보았다. 기린들이 짝짓기를 준비하는모습을 보았다. 수컷 기린은 암컷이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려고 암컷의 오줌을 입에 머금어 본다. 우리는 창조주가 최고로 장난기 넘치는 날에 발명한 것 같은 기린의 엉뚱하게 긴 목과 큼직한 눈에 감탄했다. - P316

그날 밤, 우리는 여행 가방 맨 밑에서 끄집어낸 옷, 자글자글 구겨졌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옷을 떨쳐입고 나서서 빅토리아폴스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밴드가 연주했다. 사람들이 춤췄다. 우리는 메뉴에서 요리를 골라 주문했고, 샴페인으로 오지에 축배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개빈과 마저리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나는 가슴을 저미는 듯 강렬한 무언가가 이로써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을 떠날 때 느낀 기분과 비슷했다. 앞으로의 인생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테고 그것은 또 그것대로 괜찮겠지만, 그래도 이번과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글로 쓸 때는 그럼으로써 내가 그곳을 알린다는 책임이 따른다. 잠비아의 관광산업은 21세기 들어 유례없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이것이 썩 좋은 일인 것 같다. 대형 야생 동물을 위협하는 밀렵이나 벌목이나 그 밖의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유일한 방법은 사회가 동물 보호를 지지하는 기반구조를 갖추는 것인데, 관광산업은 그런 보호 장치의 동력이 되어 주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방문한이래 구리 가격이 하락하여 잠비아는 관광 산업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고 황열병이 근절됨으로써 관광객들에게도 더 매력적인 나라가 되었다우리는 방치된 지역을 곧잘 낭만화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방치가 치명적이다. - P326

1970년대, 혁명가 폴 포트는 크메르루주라고 이름 붙인 마오주의 독재 정권을 캄보디아에 세웠다. 이후 오랫동안 피투성이 내전이 이어졌고, 그 기간 동안 인구의 5분의 1이 학살되었다. 엘리트지식인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농민들은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그 속에서 조롱과 고문을받았다. 온 나라가 만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대부분 말투가 부드럽고, 온화하고, 매력적이다. 이 사랑스러운 나라에서 폴 포트의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는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크메르루주가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저마다 다른 설명을내놓았지만, 나는 그중 어떤 설명도 잘 납득되지 않았다. 문화 혁명이나 스탈린주의나 나치즘에 대한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는 것처럼. 물론 사후에 돌아보면 왜 특정 나라가 그런 체제에 유달리 취약했던가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지만, 대체 어떻게 인간의 상상력에서 그런 행위가 나올 수 있었는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런 악은모든 사회가 품고 있는 일상적인 악과 비슷하기는 하되 너무나 극단적이라서, 그런 악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어떤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사회 구조란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늘 더 취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것이 그토록 깡그리 증발해 버릴 수 있는지는 통 모를 노릇이다. 캄보디아의 미국 대사는 내게 크메르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캄보디아 전통 사회에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차이가 발생하면, 이 사람들은 애써 부정하며 꾹꾹 눌러 두거나 칼을 꺼내 싸우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현 캄보디아 정부의 한 관료는 내게자기네 민족은 너무 오랫동안 절대 군주 체제에 굴종해 왔던 터라 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도 다 늦을 때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쉽게 운다. 생글생글 웃던 사람이 아무런 전이 과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할 때마다, 내 귓전에는 미국 대사의 저 말이 울렸다. 나는 크메르루주의 손아귀에서 잔혹한 짓을 당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사적인 과거를 말해 달라고 채근하면, 그들은 내 눈앞에서 갑자기 과거로 스르르 돌아가서 고통스러운 과거 시제에 빠져드는 듯했다.
내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모든 성인 인구는 보통 사람들 같으면 대개 미쳐 버리고 말 법한 충격적 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 마음속에서 견뎌 온 것은 그와는 또 다른 차원의 끔찍함이었다. 나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로 결심했을 때 타인의 고통에내가 겸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고, 정말로 더 이상 겸허해질 수 없을 만큼 겸허해졌다. - P328

일단 이렇게 착수 단계가 마무리되면, 이후에는 정형화된 방법으로 넘어갔다. 「나는 세 단계로 진행합니다. 첫 단계에서는 여자들에게 잊는 법을 가르칩니다. 완벽하게 잊을 수는 없는 것들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잊어 가도록 연습하죠. 음악을 들려주고, 자수나직조를 하게 하고, 공연을 보여 주고, 가끔은 텔레비전도 보여 주고 그 밖에도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일, 여자들이 좋아하는 일을 총동원해서 생각을 딴 데로 돌려 주죠. 우울증은 살갗 밑에 숨어 있습니다. 전신의 살갗밑에 우울증이 있기 때문에 홀홀 벗어 버릴 수는없지만, 비록 우울증이 계속 거기 있더라도 잊으려고 노력할 수 있어요. 여자들이 잊는 법을 잘 배우면, 다음에는 그들에게 일을 가르칩니다. 무슨 일이든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가르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냅니다. 간단히 집 청소나 아이 돌보기를 배우는 여자들도 있고, 고아들을 돌볼 때 쓸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여자들도 있습니다. 진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하는 여자들도 있죠. 여자들은 일을 잘하게 되어야 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느껴야 합니다.
여자들이 일하는 법을 다 배우면, 마침내 그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나는 그것이 과연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인지 의아한 심정을 팔리 누온에게 털어놓았다. 「글쎄요, 아무튼 나는 매니큐어와 페디큐어를 통해서 가르치죠 팔리 누온은 대답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을 치켰다. 「수용소에서, 건물에 덧댄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 뒤 그곳을 한증탕으로 만들었어요. 프놈펜에도 비슷한 시설을 좀 더 낫게 지었지요. 여자들을 그리로 데려가서 몸을 씻게 합니다. 그다음 서로에게 매니큐어나 페디큐어를 발라 주는 법을 가르쳐 주고, 손톱 관리하는 법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절실하게 필요하죠. 게다가 그러려면 자기 몸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토록 방자하고 폭력적인 일을 겪었던 여자들이 자기 손과 발을 남에게 내미는 것,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는 상대를 믿고 자기 몸에 날카로운 도구를 대도록 허락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움찔하지 않게 된 여자들은 육체적 고립에서 빠져나온 셈이죠. 그러면 감정적 고립도 무너진답니다. 여자들은 함께 씻고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점차 믿게 되고, 친구 사귀는 법을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게만 들려주었던 각자의 사연을 서로에게 들려주기 시작하죠.」 - P333

나담 축제를 떠난 우리는 우부르항가이주(州) 안쪽으로 들어갔다(카라코룸은 우부르항가이주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곧 포장도로가 끊겼다. 당신이 차로 달려 본 길 중 가장 엉망이었던 비포장도로를 떠올려 보라. 그 최악의 길이 길게 뻗었다고 상상하고, 길게뻗은 그 최악의 길이 비에 젖었다고 상상하고, 길게 뻗고 비에 젖은그 최악의 길이 얼마 전 발생한 지진으로 갈라진 상태라고 상상해보라. 그것이 바로 몽골에서 사정이 그나마 나은 도로에 해당한다.
우리는 길이 아예 보이지 않는 진흙탕을 달렸고, 운전사가 판단하기에 다리가 너무 불안할 때는 그냥 강물로 차를 몰고 들어가서 건넜다. 거친 여정 중 한 번 넘게 모두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했고, 아니면 오도 가도 못하는 다른 차들을 도와주어야 했다.
그렇듯 격렬하게 덜컹거린 여정이었지만, 그 길의 장엄함은 아마 평생 못 잊을 것이다. 큼직큼직한 언덕들은 거의 산맥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무는 없었다. 우거진 풀밭을 동물들이 하도 바싹 뜯어먹어서, 초원은 골프장처럼 매끄러웠다. 계곡에 흐르는 개울 주변에는 노란 꽃이 지천이었다. 군데군데 흩어진 게르들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물들은 만찬을 즐겼다. 야크와 소와 양과 염소가 있었고, 간간이 고비 사막에서 흘러들어 온 외톨이 낙타도 있었으며, 놀랍도록 많은 말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녔다. 포식자는 없었고, 숨을 곳도 없었다. 숭고한 평화가 느껴졌다.
이따금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가축을 지켜보는 목동이 보였다. 물가에서 뛰놀며 웃는 아이들도 있었다. 게르에서 나온 여자들은 그 정경을 만족스레 바라보다가 지붕에 널어 말리고 있는 치즈를 정돈했다. 높은 하늘에서는 독수리들이 교묘한 동선을 그리며 맴돌았고, 그보다 작은 새들은 더 낮게 날았다. 땅에서는 마멋들이 구멍에서 쏙 빠져나와 깡총거리면서 우리 눈에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 전혀 착취된 적 없고 일부러 보존된 적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처럼 장엄하면서도 그처럼 위협적이지 않은 자연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곳에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힘을 암시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황금색과 빛과 완벽함이 있을 뿐이었다. - P342

몽골의 모든 동물을 통틀어 가장 내 마음에 든 것은 야크였다. 큰 덩치, 우스꽝스러운 움직임, 도도한 얼굴, 빅토리아 양식 소파에붙은 술처럼 다리를 가리고 거치적거리게 늘어진 털이 달린 야크들은 유행이 낡고 한물간 옷을 차려입고 매사 언짢은 듯한 기색으로 늠름하게 움직이는 노부인들 같았다. 개중 팔팔한 녀석들은 터무니없이 숱진 꼬리를 양산처럼 쳐들어 흔들었고, 아니면 봄의 열병에 들뜬 나머지 정신이 살짝 나간 대고모님처럼 겁도 없이 도로를 횡단했다. 야크들은 우리를 수상쩍은 눈으로 보았다.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탐탁지 않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야크들은 또 사진 찍히기를 좋아했는데,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추파를 던지듯이 눈을 끔뻑거렸다. - P343

「게르를 옮길 때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에 신이납니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든 집을 세울 수 있고, 동물들을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죠. 사람들이 도시를 세운 몇 군데 좁은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목동은 내게 낙타 젖을 탄 차를따라 주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물었다. 「어때요, 미국도자유로운 나라인가요? 애국자로 살아온 내 평생 처음으로, 이질문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몽골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선 아래에 있지만, 내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하자 목동은 물었다. 아들이 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원합니까? 나는 우리 발치에서 놀고 있는 목동의 어린아이들은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목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애들을 학교에 보낼 겁니다. 그리고 이 애들이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되고 싶어 한다면, 그야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나도 학교에 다녔지만 목동이 되는 길을 선택했죠. 아이들도 나처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겼다고말하지만, 몽골을 떠날 즈음 나는 애초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서로의 대립항인 적이 없었으며 유목 생활이야말로 그 두 체제 모두의 진정한 대립항이라고 믿게 되었다. 유목 생활이야말로 인류가 이제껏 일군 여러 삶의 양식들 중 즐거운 무정부주의에 가장 근접한 양식이라고. - P344

그린란드로 가기 전, 나는 그곳의 주된 문제는 계절성 정동장애SAD가 아닐까 추측했다. 계절성 정동장애는 햇빛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일 년에 석 달씩 해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장소에서는 특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린란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초가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가 2월이 되면 나아지지않을까 하고 예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그린란드에서 자살이 가장많이 발생하는 달은 5월이다. 북부 그린란드로 이주해서 사는 외국인들은 긴 어둠의 시기에 곧잘 우울해하지만, 이누이트들은 과거오랜 세월 동안 계절적 빛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익혀 왔다. 많은사회에서 봄은 자살의 선동자다. 작가 A. 앨버레즈는 이렇게 썼다. <자연이 더 풍요롭고 부드럽고 즐거워질수록 내면의 겨울은 더 깊어지는 듯하다. 내면 세계와 바깥세상을 갈라놓는 심연이 더 넓어지고 더 끔찍해지는 듯하다.> 봄이 가져오는 변화가 온대 지방에비해 두 배는 더 극적인 그린란드에서, 봄은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
그린란드의 삶은 고되다.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에 보편 무상의료 제도, 교육 제도, 실업 급여 제도까지 마련해 두었다. 병원들은 흠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수도의 교도소는 교정 시설이 아니라 여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는 자연의 힘이 상상을 초월하리만치 모질다. 유럽을 두루 여행했다는 한 이누이트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문명처럼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위대한 건물을 짓진 않았지만, 이 기후에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나도 이편이 틀림없이 더 위대한 성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58

밖은 너무 춥고 어둡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 가장인 아버지만은 예외로, 여름에 잡아 말렸다가 비축한 생선을 보충하고자 한 달에 두어 번은 나가서 사냥이나 얼음낚시를 한다. 이렇게 강제로 다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환경에서는 불평할 여지도, 마음속의 고민이나 화나 비난을 말로 꺼낼 여지도 없다. 과거 이글루시절에는 내리 몇 주씩 물리적으로 접촉한 채 살아야 하는 상대와싸운다는 것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도 이들은 몇 달동안 한방에서 지내고 함께 식사해야 한다. 이 기후에서 불쑥 화가치민다고 뛰쳐나갔다가는 틀림없이 동사하고 말 것이다. 누군가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글루 시절에는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면 그저 잠자코 고개를 돌려서 벽이 녹는 걸 바라봤습니다. 이누이트 사회의 극단적인 육체적 밀접성은 필연적으로 감정적 과묵함을 낳았다. 옛 생활 양식에 가깝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이야기꾼이 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냥에서 겪었던 모험이나 거의 죽다 살아난 이야기 따위를 들려준다. 이누이트들은 대부분 잘 참는다. 잘 웃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각자 성격이 어떻든,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린란드 우울증의 독특한 특징은 기온과 빛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을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터부의 결과다. - P360

역경이 삶의 표준인 세상에서는 삶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상태와 우울증을 나누는 경계가 그렇지 않은 세상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내가 일리마나크에서 만난 가족들은 침묵의 약속을 지킴으로써 역경을 견뎌 왔다. 침묵은 실제로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이었고, 덕분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춥고 긴 겨울을 무수히 견뎌 왔다. 한편 오늘날 서양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문제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만 더 잘 풀 수 있다고 믿고, 일리마나크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 한증거다. 그러나 말은 그 범위에도 장소에도 한계가 있다. 우울증을겪는 일리마나크 주민들 중 문제를 그 문제의 대상에게 직접 털어놓은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 그들이 세 여성 장로에게도 정기적으로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떤 사람들은 오직경제적으로 발달된 사회의 유한 계층만이 우울증에 빠진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우울증을 말로 표현하여 논의하는 사치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편 이누이트족에게는 우울증이 삶의 무수한 다른 문제들에 비해 사소한 문제이기 때문에, 또한 거의 식물인간이 될 만큼 심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삶에 당연히 존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그냥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누이트처럼 침묵하는 방식과 우리처럼 자신을 속속들이 말로 표현하는 방식 사이에도 정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드러내는 다른 방식들은 무수히 많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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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이미 오래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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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며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나를 재우기 전에 언제나 이야기를들려주셨다. 그러면 나는 밤에 그 이야기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 뒤로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마다 짤막한 이야기를 짓곤 했다. 내가 겪는 문제의 요소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짓고 나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른 아이들은 나에게 이야기를 지어 달라고부탁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너무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야기들은 갈수록 환상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그것들은 하나의 게임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뜻밖의 해법을 찾아내게 하는 게임 말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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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컬렉션은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날때까지 그의 손에 있었다. 이듬해 베이징에 고궁 박물원이 설립되었고, 천 년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컬렉션이 마침내 전시되었다. 그러나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컬렉션은 안전을 위해 2만 개의 나무 상자에 담겨서 상하이로 보내졌다. 그 다음에는 난징의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1937년 일본군이 남쪽의 그 수도마저 점령할 위기에 처하자 상자들은 배에 실려 양쯔강 상류로,
기차에 실려 친링산맥 너머로, 트럭에 실려 한중으로 보내졌다. 선박이 침몰하고 건물이 폭파되는 등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와도 될법한 사건들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은 단 한 점도 다치지 않고 모두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컬렉션은 여태 상자에 담긴 채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1947년 공산당이 난징에 바싹 다가오자,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치면서 그중 최고의 작품들을 챙겨 간 뒤 타이베이 산허리를 파낸 터널에 보관했다.
이후 작품들은 그곳에 죽 갇혀 있었다. 딱 한 해만은 예외였는데, 1961년 봄부터 일 년간 약 200점의 그림과 유물이 범관의 「계산행려도」와 곽희의 「조춘도」도 포함되었다 미국에서 열린 「중국미술의 보물들」 순회 전시회에 나선 것이었다. 퐁은 <중국 미술에 대한 현대 서양의 연구는 오직 그 전시 하나로부터 탄생했다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전시를 보고 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일 우주선 하나에 담을수 있는 만큼만 남기고 지구를 통째 파괴해야 한다면, 이 그림들 중몇 점도 그 우주선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4년 뒤, 장제스는 마침내 타이베이에 새 고궁 박물원을 열었다. 그는 비록 중국의 위대한 도시들과 인구와 땅을 잃었지만, 황실 컬렉션이라는 위대한 보물 하나만큼은 간직했다. - P270

이 컬렉션은 타이완 내에서도 여행하지 않는다. 최고의 작품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 결정이 중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475점을 보내기로 했다-- 사람들의 화를 그토록 부추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메트 대여가 예정된 품목 중에는 고궁 박물원이 컬렉션에서도 특히 귀한 작품만을 엄선하여 작성한 <제한 목록>에 포함된 것도 27점 있었는데, 이 목록에 포함된 작품들은 보통 매 3년마다 40일씩만 전시된다. 미국 사람들에게 박물관은 주로 대중을 위해서 전시를 여는 교육 기관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박물관은 문화적 보물을 안전하게 지키는 창고다. 중국의 미술 애호가들도 물론 감상을 즐기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역사적 가치에 비해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범관의 그림을 해외로 보낸다는 것은 말하자면 미국이 독립 선언문이나 헌법 원본을 해외에 빌려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 P271

고궁박물원의 작품 안내문에 적힌 작가명, 제작 연도 등은 18세기에 작성된 내용이다. 이후 연구에서 그중 많은 내용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박물원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타이완의 한 예술학자는 내게 말했다. 작품 귀속을 바꾸기 시작하면, 컬렉션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테니까요. 어떤 작품이 실은 범관의 작품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입법원이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릴지 상상해 보세요!」 박물원 학자들은 그 대신 은밀한 방식으로 귀속을 바로잡는다. 가령 중국에서는 중요한 그림일 경우 가을에 전시하는 전통이 있는데, 따라서 만일 당신이 봄에 범관을 본다면 박물원 측이 실은 그 작품을 범관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특징적양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라는 문구도 재귀속을 암시한다.  - P272

타이완에서는 1949년 장제스와 함께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외성인>들(<1949년 사람들>이라고도 부른다)과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곳으로 건너온 선조를 둔 <본성인>들 사이에 알력이 심하다. 두 집단 모두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토에서 비롯한 같은 한족이기 때문에, 이 긴장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편 타이완섬의 토착 원주민 인구는 아주적다. 그러나 장제스 세력이 정복자의 분위기로 건너왔고, 1949년부터 잔인한 <장 왕조가 끝난 1987년까지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더 많은 토지와 부를 갖고 있는데도 하층 계급 취급을 당했다.
자신들이 계속 중국 본토까지 다스린다고 주장하면서 입법원에 본토의 모든 구역들에 해당하는 대표자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부패 정부였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타이완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하여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했고, 이제 교육수준이 높은 인구(문해율이 90퍼센트가 넘는데 문자 언어에서는 놀라운 수준이다)와 막대한 국가자산(세계에서 1인당 현금 보유량이 가장 큰 나라에 속한다)과 개방적인 선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입법원은 이제 자신들이 중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공언하지 않는다. - P283

고궁 박물원을 보완할 타이완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타이완인으로 정체화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우리는 위대한 중국 문화의 일부라고 가르치지만, 사실 나는 그 문화에 진정으로 소속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의식을 고취시켜야 하고, 그들이 본토로부터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천이 이처럼 지금 논의하는다른 주제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독립의 문제와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타이완의 긴장된 정치 상황 탓에 여기서는 어디서나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타이완 지도부는 본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창의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말합니다만, 베이징을 헷갈리게 하려는 그 애매함이 실상 적들보다는 타이완 국민들을 더 헷갈리게 만듭니다. 중국이 무력을 쓴다면, 우리는 반격할 겁니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 지구들을 신속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본토의 군사 전문가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겠지만, 우리 무력으로써 본토 경제학자들에게 두려움을 심는다면 그곳 지도부가 분열되도록 만들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을 본토에 똑똑히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기르는 것도 이런 정책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고궁 박물원은 이 목적을 떠맡지 못합니다.」 - P284

어느 겨울날 저녁, 퐁은 내게 말했다. 「지금 중국에 고급 중국 문화가 얼마나 있습니까? 전부 서양 문화뿐이죠 중국인들은 지난 150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잊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들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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