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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디보: 미래 생물학의 메가트렌드 장대익(미국 터프츠 대학 인지연구소 방문연구원)
지난 2백여 년 동안의 과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분야는 어디일까? 틀림없이 많은 이들이 아인슈타인을 떠올리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한 물리학 분야를 지목할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도 만만치 않다.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유전학, 왓슨과 크릭의 분자생물학처럼 생물학에도 아인슈타인 못지않은 영웅들이 있었고 혁명이랄 만한 큰 변화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난십여 년 동안의 성과들을 보면 물리학이 생물학에 과학의 대표선수자리를 물려주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생물학의 놀라운 연구성과들이 각종 배제를 통해 흘러나오는 주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가히 ‘생물학의 시대‘이다. 왜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생물학계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 현대 생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최근 들어 생물학의 꽃봉오리가 활짝 펼쳐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물학분야에서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통섭(統攝, consilience)‘으로, 다른 이들은 ‘통합(unification)‘, ‘융합(融合)‘, ‘수렴(convergence)‘, 심지어 ‘잡종(hybrid)‘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어떤 용어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것은 서로 다른 전통 속에서 진화해온 생물학의 세부 분야들이 무엇 때문인지 최근 십여 년 전부터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있다는 사실이다. ‘이보디보(Evo Devo)‘는 이런 통섭 흐름을 주도하는 새로운 브랜드이다.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의 애칭인 ‘이보디보‘는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이 만나서 생긴 하나의 잡종 정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상은 현대의 거의 모든 생물학 분야를 진화와 발생의 두 용매로 녹인 ‘통합생물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 P9
하지만 이른바 대칭동물에서 발견된 호메오 유전자인 혹스 유전자는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를 생쥐의배아에 이식하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혹스 유전자들은 생쥐에 들어가서도 생쥐의 정상적인혹스 유전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을 잘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Pax-6 유전자는 더욱 흥미롭다. 눈 발생을 조절하는유전자는 척추동물에서는 Pax-6이고 초파리의 경우에는 아이리스(Eyeless)이다. 물론 곤충의 눈은 겹눈으로서 척추동물의 눈과는 구조, 구성 재료, 그리고 작동 방식에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일 초파리의 아이리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시키거나 반대로 생쥐의 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시키면 어떤 현상이발생할까?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정상적인 눈이 발생한다. 즉 생쥐의 배아에서는 생쥐의 눈이, 초파리의 배아에서는 초파리의 눈이 정상적으로 발생한다. 심지어 사람의 Pax-6 유전자를 거미의 배아에 삽입하면 그 배아는 거미의 정상적인 눈을 발생시킬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Pax-6와 아이리스 유전자가배아 발생의 꼭대기에서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스위치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ax-6 유전자를 발견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위스의 발생학자 게링(W. J. Gehring)은 이런 유형의 유전자를 ‘마스터 조절 유전자(master control genes)‘ 라고 명명했다. 곤충과 척추동물의 심장 발생을 동일한 방식으로 관장하고 있는 틴먼 유전자도 그런 마스터 조절 유전자들 중 하나이다. 물론 하나의 수정란에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성체가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물학의 오랜 수수께끼이며 아직도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여 년 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발생유전학의 도움으로혹스 유전자와 같은 조절 유전자(regulatory gene)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게 되면서 발생의 문제는 전통적인 발생학의 영역을 훌쩍 넘어버렸다. 우선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에 대한 분자생물학 · 세포생물학·발생유전학적 지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오고, 염기서열을 확인하기 위한 유전체학(genomics)과 그 발현 과정을 연구하는 단백질학(proteomics)도 필요하며, 상이한 문들(phyla) 간의 상동성(homology)를 따져보기 위한 계통학(phylogenetics)도 개입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상동성은 진화생물학에 의해서 설명된다. 게다가 고생물학은 생명이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몸형성 계획(bauplan)과 참신한 형질들(novelties)을 획득하게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생의 수수께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예컨대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연구를 통해 초기의사지동물의 발가락이 5개가 아니라 8개라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발견들은 조상의 사지가 과연 어떻게 생겨났으며 사지의 발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보디보는이 모든 분야들을 진화와 발생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생명체의 모든변화에 대한 통합적 설명을 시도한다 - P14
이 책에서 그가 ‘이보디보‘라는 새로운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생명체의 중요한 발생 과정을 조절하는 ‘툴킷 유전자(tool kit gene)‘-이 유전자는 위에서처럼 ‘마스터 조절 유전자‘로 불리기도 하며 혹스 유전자가 대표적인 사레이다-들이 전혀 다른 동물들 사이 (가령 개미와 인간)에서도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 유전자들은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통상적인 ‘구조 유전자(structural genes)‘ 와는 달리 발생 과정을 조절하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 스위치 체계가 변하는 것이 바로 진화라는 주장이다. - P16
그토록 다양한 동물 몸체의 크기, 형태, 조직, 색깔을 보고 있는라면 동물 형태의 기원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각각의 형태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형태들이 진화했을까? 다윈, 윌리스, 베이츠의 시대나 심지어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생물학의 질문들이지만 그에 대한 깊이있는 대답은 최근에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매우 놀랍고 심오한 그 대답들은 동물계의 형성과 그 속에서 인간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혁명적으로 뒤집는다. 이야기의 처음에 우리는 우리 모두가 동물형태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어떻게 형태가 창조되는가 하는 문제에까지 놀라움과 매혹을 확장하는 것이다. 즉 동물 설계의 다양한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과정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동물 형태의 여러 요소들 이면에는 경이로운 형성 과정이 숨겨져 있다. 자그만 하나의 세포가 크고 복잡하고 조직적이고 패턴화된 생명체로 바뀌어가는 과정, 오랜 시간을 거쳐 수백만 가지 서로 다른 설계들로 동물계를 채워온 과정, 그 과정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다. - P28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먼저 모든 동물 형태는 두 가지 과정의 결과로 생겼음을 깨달아야 한다. 수정란으로부터 발생하는 과정, 그리고 선조로부터 진화하는 과정이다. 수많은 동물 형태들의 기원을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 각각을 이해해야 함은 물론이고 서로의 관계가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발생은 수정란을 배아로 성장시키고 결국 성체 형태로 자라게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형태의 진화는 발생 과정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숨 막힐 정도로 놀라운 과정들이다. 하나의 세포, 수정란으로부터 복잡한 전체 생명체가 발생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하루(파리 구더기), 몇 주(생쥐), 몇 달(사람) 만에 하나의 수정란이 수백만 개, 수십억 개, 아니 사람의 경우에는 대략 십조 개의 세포로 자라 몸체와 각종 기관, 조직들을 이룬다고 생각해보라. 수정란이 배아를 거쳐완전한 동물로 변하는 과정만큼 경이로운 자연현상은 거의 없다. - P29
현대적 종합의 창시자 중 한명인 에른스트 마이어는 ‘매우 가까운 친족관계가 아니고서야 상동유전자를 찾아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생물학자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초파리 몸 조직 과정의 중요 부분을 관장하는 것으로 밝혀진 유전자들 대부분과 흡사한 유전자가사람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에도 존재하며, 기능도 같았던 것이다. 뒤이어 또 다른 사실이 발견되었다. 눈, 사지, 심장처럼 동물마다 구조가 달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으리라 보았던 여러 기관들의 발생이 동물에 상관없이 동일한 유전자들로 통제된다는 것이다. 여러 종의 발생유전자들을 비교하는 작업은 발생학과 진화생물학의 접점에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학제가 되었다. 그것이 진화발생생물학, 줄여서 ‘이보디보‘이다. 이보디보 혁명의 첫 개가는 외형이나 생리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복잡한 동물이 공통의 ‘마스터(master)‘ 유전자들로 된 ‘툴킷(tool kit, 도구상자)‘을 갖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마스터 유전자는 몸 전체나 일부를 형성하고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인데, 파리든 딱새든, 공룡이든 삼엽충이든, 나비든 얼룩말이든 혹은 사람이든 간에모두 같은 것을 지닌 것이다. 툴킷의 발견과 이 유전자들의 놀라운속성에 대해서는 3장에서 설명하겠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그 발견 때문에 동물의 친족관계에 대한 기존의 개념, 동물 간의 차이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으며, 진화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 P35
왜 그렇게 어려울까? 여기서 동물 설계의 첫번째 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 서로 연관관계에 있는 동물들(가령 척추동물군)의 몸은 엇비슷한 부속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뼛조각이 듀공(바다소의 일종인 멸종동물)의 것임을 알아냈다고 하자. 좋다. 듀공의 갈비뼈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어느 갈비뼈인가? 멸종한 말의 발굽 뼈를 발견했다고 하면대체 어느 발굽인가? 개개의 뼛조각만 놓고는 정말 판별하기 힘들다. 왜 그런가 생각하다보면 동물 설계의 두번째 원칙을 깨닫게 된다. 동물은 같은 종류의 부속들이 여러 개 반복된 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몇 가지의 기본적인 레고 블록들로 장난감 집을 짓듯이 말이다. 기본 부속은 발가락 뼈 하나하나처럼 작은 것일 수도, 몇몇 척추동물의 등뼈(척추)처럼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기본 요소들 자체는 아주 오래된 것이고 몸 규모에 대한 크기 비율은 동물마다 다르다. 커다란 초식공룡이든 작디작은 쥐라기 시대(1억 5천만 년 전) 도롱뇽이든 척추동물 특유의 반복적 모듈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모듈 식 설계는 척추동물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유명한 버제스 셰일에 담긴 화석들 중에서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바다에 번성했던 복잡하고 큰 동물들의 경우, 현생 동물들처럼 다양한 모듈식 신체 설계를 드러낸다(그림1-3]. 화석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사라진 세상을 살았던 멸종 야수들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건 틀림없이 가슴 떨리고 감동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형태에도 마음이 끌린다. 화석을 보면 진화가 부속들을 반복 사용하는 모듈 구조를 폭넓게 채택함으로써 설계를 발전시켜왔음을 알게 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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