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은 무조건 물리쳐야 할 해악인가? 그렇지 않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지배당한 조선 사대부에게는 마음을 제멋대로 풀어놓는 상태인 ‘방심‘, ‘잡념‘, ‘망상‘, ‘상념‘이 자신을 망치는 가장 해로운 적이었다. 그러나 성호학파의 문인 이학규(李學逵)는 오히려 망상을 통해 절망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와 활력을 찾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망상 덕분에 유배지에 갇혀 있는이 몸도 크게는 온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작게는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터럭 끝까지도 헤매고 다닐 수 있다고 망상을 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할 만하다고. 만약 지금 마음속 한 가닥 망상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의 삶은 불씨가 죽어 버린 잿더미처럼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영원히 살아 움직임을 증명할 수 있는것은 망상에 있을 따름이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얽매이고 구속당하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른바 ‘망상 예찬‘이다. 망상이 있어야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비로소 사상의 한계와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 무한과 무궁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망상이 없다면 사상의 한계와 사유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망상하고 또 망상하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삶이 바로 그 망상 속에 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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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특유의 무관심을 보이는 동안 집에서 만든 작은 동물 모양의 캐러멜은 마을에서 계속 팔리고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불면증으로 푸른색이 된 달콤한 병아리들, 불면증으로 분홍색이 된 맛있는 생선들, 불면증으로 노란색이 된 보드라운 망아지들을 빨아 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는 온 동네사람들이 월요일 동틀 무렵까지 깨어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당시에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시간이 모자랐던 마콘도 사람들은 잠을 안 자게 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했다. 어찌나 열심히 일들을 했던지 이내 할 일이 더 이상 없게 되었고, 새벽 3시에 시계에서 나오는 왈츠의 음표들을 세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게 되었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꿈이 그리워 잠을 자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피곤해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함께 모여 앉아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이나 되풀이하고, 거세한 수탉얘기를 신경질이 날 정도까지 비비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세한 수탉 얘기를 또 들려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얘기를 듣는 사람이 그러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듣고 싶다고 대답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사람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하라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자리를 뜰라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자리를 뜨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는 등, 그런 식으로 며칠밤이 새도록 지속되는 지독한 모임에서 밑도 끝도 없는 장난을 쳐댔다. - P78

"우린 이 마을에서 종이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지 않소.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겠는데요. 이 마을에는 조정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린 그 어떤 조정관도 필요없소."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돈 아폴리나르 모스코테의 뻔뻔스러운 태도 앞에서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자기들이 마을을 어떻게 세웠으며, 땅을 어떻게 분배했으며, 그 어떤 정부도 귀찮게하지 않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서, 어떻게 길을 닦았고,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 개선해 왔는지 모든 것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워낙 평화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자연사를 한 사람조차도 없소. 우리에겐 아직 묘지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겠죠?" 사실, 마콘도 사람들은정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는 걸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까지 자신들을 평화롭게 성장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도 다행스럽게 여겼고, 외지 사람으로부터 이래라저래라 명령이나 받으려고 마을을 세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계속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지와 똑같은 색깔의 흰 생면직 저고리를 입은 돈 아폴리나르 모스코테는 단 한순간도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이 다른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정착하겠다면 대단한 환영을 받을 거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집을 파랗게 칠하라고 강요하면서 무질서를 조장하기 위해 왔다면 당신이 가져온 그 잡동사니 세간들을 가지고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우리 집은 비둘기처럼 하얀색으로 칠할 테니까 말이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결론을 내렸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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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술라가 산후조리차 집에서 휴식을 취한 지 약 사십 일째 되던 날 집시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지난번에 얼음을 가져왔던 그 곡예사들과 마술사들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이 멜키아데스 족속과는 달리 진보된 문명의 전파자가 아니라 단순히 여흥을 제공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 주었다. 얼음을 가져왔을 때도 그들은 그것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그저 서커스의 볼거리로 선전했을 뿐이다. 이번에 그들은 다른 발명품들과 함께 날아다니는 양탄자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을 교통 수단의 발전에 근본적으로 공헌할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오락 기구로 소개했다. 물론, 사람들은 마을 집 위를 살포시 날아 보고 싶은 욕망으로 마지막 남은 황금 쪼가리들을 파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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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의 신체부속끼리 비교할 때는 처음에 같은 부위였지만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변화한 것들인지, 아니면 일대일 연관관계가 분명치 않은 연속 부위들이 엇갈려 있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도롱뇽, 초식공룡, 쥐의 앞다리와 사람의 팔은 상동기관(homolog)들이다. 동일한 구조가 각 종에 맞게 다른 식으로 변형되었다는 뜻이다. 모두 공통 선조의 앞발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뒷발, 즉 사람의 다리나 네발 척추동물의 뒷다리 역시 상동기관들이다. 그런데 앞다리와 뒷다리는 서로 연속 상동기관(serial homolog)이다. 한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났다는 뜻이며, 변형 정도는 동물마다 다르다. 척추와 연관 구조들(갈비뼈), 사지동물의 앞다리와 뒷다리, 손발가락들, 이빨들, 절지동물의 구기와 더듬이와 걷는다리, 곤충의 앞날개와 뒷날개가 서로 연속 상동기관들이다. - P56

반복 구조의 수와 종류가 변하는 과정에는 틀림없이 모종의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생물학자 새뮤얼 윌리스턴은 1914년에 이렇게 단언했다. "유기체 신체부속들의 수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줄어든 부위들이 기능 면에서는 훨씬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또 하나의] 법칙이다." 윌리스턴은 고대 해양 파충류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초기 동물군에는 비슷한 부속들이 다수 반복되는 반면,
후대 동물군에는 부속의 수가 줄고 구조마다 한결 전문화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전문화된 패턴이 일반적인 형태로 되돌아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흥미로운 사례를 한 가지 들면, 처음에 사지동물에게 발가락이 등장했을 때는 한 발에 여덟 개까지 발가락이 있었다. 하지만 여덟 개라 해도 종류로 나누면 다섯 가지에 불과했으므로 결국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만 남게 되었다. 후대종들의 발가락은 더욱 전문화되었으며 더 수가 준 경우도 생겼다. - P60

모듈들이 반복된다는 것 외에도 동물 신체와 부속에 일반적으로적용된다 할 특징이 두 가지 더 있다. 대칭성과 극성이다. 우리가 친숙한 대부분의 동물은 좌우대칭형이다. 몸의 중앙을 가르는 기다란 중심축을 기준으로 왼편과 오른편이 대칭한다. 이런 설계를 채택한 동물은 앞/뒤 방위도 갖게 되는데, 덕분에 여러 효과적인 이동 방식들이 진화했다. 좌우가 아닌 대칭형을 갖는 동물도 있다. 가령 구멍연잎성게 같은 성게류 등 신기하고 다양한 종들이 속해 있는 극피동물은 5방사대칭형이다(그림1-12]. 대칭축을 찾아보는 것은 동물이 형성된 방식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동물 신체와 부속의 극성, Polarity)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동물은 극성을 나타내는 축이 세 개가 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몸 위에서 아래까지(직립한 사람의 경우에는 등에서 몸 앞까지가 된다). 몸에 가까운 쪽에서 먼 쪽까지 (몸통에 수직으로 붙어 있는 팔다리처럼 몸체에서 튀어나온 구조들에 적용된다)이다. 부속 구조들 각각도 극성이 있다. 손을 보자. 엄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손등에서 손바닥까지, 손목에서 손가락 끝 방향으로 세 축이 있다. - P63

슈페만 형성체의 극적인 효과를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은, 배아의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발생에 질서가 부여된다는 점이다. 이후 마찬가지로 극적인 다른 형성체들도 여럿 발견되어 이 원칙이 발생의 여러 차원에 적용되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배아 전체에 적용되는 것도, 개별 신체부속에 적용되는 것도 아주 세세한 패턴에 곧장 적용되는 것도 있다. 극적인 활약을 보이는 행성체를 두 가지만 더 소개하겠다.
사지의 형성은 예전부터 발생학자들을 매료시켰다. 발생 초기에배아 옆구리에 툭 튀어나온 작은 싹 모양 아체 (體, bud)였던 것이여러 단계를 거치며 꼴을 갖춰간다. 삼일 된 닭 배아의 아체는 길이와 폭이 1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병아리가 부화할 즈음이면 천배 가까이 자란다. 그 사이에 자그만 조직 뭉치는 바깥으로 자라며 길어지고, 뼈, 연골, 근육, 힘줄, 손발가락, 깃털을 발달시킨다. 질서 있고 아름답게 발생 과정을 펼쳐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연골 요소들이 가지런히 형성되는 일이다(이 자리에 나중에 뼈가 들어선다). 연골은 세포들이 응집된 부분에 형성되는데 어깨에서 시작하여 손발목을 따라 마지막으로 손발가락까지. 반드시 순서대로 놓인 다. 특별한 염료를 쓰면 전 과정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그림2-3). 사지 발생에 순서가 있는 것, 손발가락에 극성이 있는 것을 보면 배아전체와 마찬가지로 부속 차원에도 체계적인 신호가 존재해서 세포들의 운명을 지시함을 알 수 있다. - P72

형성체들은 조직이나 세포에 영향을 미쳐 어떠한 패턴을 형성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형태발생 (morphogenesis)을 유도한다. 형성체의 활동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그들이 모종의 물질을 생성함으로써 주변 세포들의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 물질을 형태발생인자(morphogen)라 한다. 형성체의 영향은 대상 세포들과의 거리에 따라 다르다. 영원 배아나 병아리 날개 아체, 나비 날개에서 형성체 세포들에 가까이 있는 세포들일수록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멀리 있을수록 덜 받는다(또는 받지 않는다). 특정위치에 생성된 형태발생인자는 멀어질수록 농도가 떨어지는 농도기울기(concentration gradients)를 만든다. 인자를 둘러싼 주변 세포들은 자기에게 와 닿는 인자의 농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 P74

베이트슨은 기형들을 두 가지 기초적인 분류로 나누었다. 반복 부속의 수가 달라진 것, 그리고 부속 중 하나가 다른 부속과 비슷한 모양으로 변형된 것이다. 베이트슨은 후자의 변이에 호메오(homeotic, 그리스어로 같거나 비슷하다는 뜻인 ‘homeos‘에서 땄다) 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용어는 매우 중요하니 기억해두는 게 좋다. 베이트이 기이한 생물들을 수집한 까닭은 자연에서도 형태의 도약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이 진화적 변화의 기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베이트슨의 추론이 언뜻 직관적이며 설득력 있게 보일지 몰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둬야겠다. 생물학자들은 여러 증거를 보았을 때 진화에서 단번에 그런 엄청난 도약이 이루어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다고 생각한다. 변이형이 생겨난다 해서 곧 새로운 종류나 종의 창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지식으로 미루어보면 오히려 반대다. 괴물들은 형질을 전파하지 못한 채 자연선택의 힘에 휩쓸려 사라질 부적합한 형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단번에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바람직한 괴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 P77

호메오 돌연변이를 보노라면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로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뀔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발달이 뒤처지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고 구조 전체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신체부속이 엉뚱한 장소에 생기거나 엉뚱한 수만큼 생긴 것이다. 주지해야 할 점은, 변화가 연속 상동기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더듬이가 다리로, 뒷날개가 앞날개로), 변형의 원인이 단 하나의 유전자에 일어난 돌연변이 때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초파리의 경우 ‘호메오‘ 유전자, 즉 돌연변이를 일으킬 경우 호메오 형태를 일으키는 유전자들의 수가 아주 적다. 그러니까 몇 개 안 되는 ‘마스터‘ 유전자들이 파리 연속 상동기관들의 분화를 모두 담당한다는 뜻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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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문

이보디보:
미래 생물학의 메가트렌드

장대익(미국 터프츠 대학 인지연구소 방문연구원)

지난 2백여 년 동안의 과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분야는 어디일까? 틀림없이 많은 이들이 아인슈타인을 떠올리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한 물리학 분야를 지목할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도 만만치 않다.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유전학, 왓슨과 크릭의 분자생물학처럼 생물학에도 아인슈타인 못지않은 영웅들이 있었고 혁명이랄 만한 큰 변화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난십여 년 동안의 성과들을 보면 물리학이 생물학에 과학의 대표선수자리를 물려주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생물학의 놀라운 연구성과들이 각종 배제를 통해 흘러나오는 주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가히 ‘생물학의 시대‘이다. 왜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생물학계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
현대 생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최근 들어 생물학의 꽃봉오리가 활짝 펼쳐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물학분야에서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통섭(統攝, consilience)‘으로, 다른 이들은 ‘통합(unification)‘, ‘융합(融合)‘, ‘수렴(convergence)‘, 심지어 ‘잡종(hybrid)‘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어떤 용어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것은 서로 다른 전통 속에서 진화해온 생물학의 세부 분야들이 무엇 때문인지 최근 십여 년 전부터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있다는 사실이다.
‘이보디보(Evo Devo)‘는 이런 통섭 흐름을 주도하는 새로운 브랜드이다.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의 애칭인 ‘이보디보‘는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이 만나서 생긴 하나의 잡종 정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상은 현대의 거의 모든 생물학 분야를 진화와 발생의 두 용매로 녹인 ‘통합생물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 P9

하지만 이른바 대칭동물에서 발견된 호메오 유전자인 혹스 유전자는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를 생쥐의배아에 이식하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혹스 유전자들은 생쥐에 들어가서도 생쥐의 정상적인혹스 유전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을 잘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Pax-6 유전자는 더욱 흥미롭다. 눈 발생을 조절하는유전자는 척추동물에서는 Pax-6이고 초파리의 경우에는 아이리스(Eyeless)이다. 물론 곤충의 눈은 겹눈으로서 척추동물의 눈과는 구조, 구성 재료, 그리고 작동 방식에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일 초파리의 아이리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시키거나 반대로 생쥐의 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시키면 어떤 현상이발생할까?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정상적인 눈이 발생한다. 즉 생쥐의 배아에서는 생쥐의 눈이, 초파리의 배아에서는 초파리의 눈이 정상적으로 발생한다. 심지어 사람의 Pax-6 유전자를 거미의 배아에 삽입하면 그 배아는 거미의 정상적인 눈을 발생시킬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Pax-6와 아이리스 유전자가배아 발생의 꼭대기에서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스위치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ax-6 유전자를 발견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위스의 발생학자 게링(W. J. Gehring)은 이런 유형의 유전자를 ‘마스터 조절 유전자(master control genes)‘ 라고 명명했다. 곤충과 척추동물의 심장 발생을 동일한 방식으로 관장하고 있는 틴먼 유전자도 그런 마스터 조절 유전자들 중 하나이다.
물론 하나의 수정란에서부터 어떻게 복잡한 성체가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물학의 오랜 수수께끼이며 아직도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여 년 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발생유전학의 도움으로혹스 유전자와 같은 조절 유전자(regulatory gene)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게 되면서 발생의 문제는 전통적인 발생학의 영역을 훌쩍 넘어버렸다. 우선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에 대한 분자생물학 · 세포생물학·발생유전학적 지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오고, 염기서열을 확인하기 위한 유전체학(genomics)과 그 발현 과정을 연구하는 단백질학(proteomics)도 필요하며, 상이한 문들(phyla) 간의 상동성(homology)를 따져보기 위한 계통학(phylogenetics)도 개입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상동성은 진화생물학에 의해서 설명된다.
게다가 고생물학은 생명이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몸형성 계획(bauplan)과 참신한 형질들(novelties)을 획득하게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생의 수수께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예컨대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연구를 통해 초기의사지동물의 발가락이 5개가 아니라 8개라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발견들은 조상의 사지가 과연 어떻게 생겨났으며 사지의 발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보디보는이 모든 분야들을 진화와 발생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생명체의 모든변화에 대한 통합적 설명을 시도한다 - P14

이 책에서 그가 ‘이보디보‘라는 새로운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생명체의 중요한 발생 과정을 조절하는 ‘툴킷 유전자(tool kit gene)‘-이 유전자는 위에서처럼 ‘마스터 조절 유전자‘로 불리기도 하며 혹스 유전자가 대표적인 사레이다-들이 전혀 다른 동물들 사이 (가령 개미와 인간)에서도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 유전자들은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통상적인 ‘구조 유전자(structural genes)‘ 와는 달리 발생 과정을 조절하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 스위치 체계가 변하는 것이 바로 진화라는 주장이다. - P16

그토록 다양한 동물 몸체의 크기, 형태, 조직, 색깔을 보고 있는라면 동물 형태의 기원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각각의 형태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형태들이 진화했을까? 다윈, 윌리스, 베이츠의 시대나 심지어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생물학의 질문들이지만 그에 대한 깊이있는 대답은 최근에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매우 놀랍고 심오한 그 대답들은 동물계의 형성과 그 속에서 인간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혁명적으로 뒤집는다. 이야기의 처음에 우리는 우리 모두가 동물형태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어떻게 형태가 창조되는가 하는 문제에까지 놀라움과 매혹을 확장하는 것이다. 즉 동물 설계의 다양한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과정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동물 형태의 여러 요소들 이면에는 경이로운 형성 과정이 숨겨져 있다. 자그만 하나의 세포가 크고 복잡하고 조직적이고 패턴화된 생명체로 바뀌어가는 과정, 오랜 시간을 거쳐 수백만 가지 서로 다른 설계들로 동물계를 채워온 과정, 그 과정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다. - P28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먼저 모든 동물 형태는 두 가지 과정의 결과로 생겼음을 깨달아야 한다. 수정란으로부터 발생하는 과정, 그리고 선조로부터 진화하는 과정이다. 수많은 동물 형태들의 기원을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 각각을 이해해야 함은 물론이고 서로의 관계가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발생은 수정란을 배아로 성장시키고 결국 성체 형태로 자라게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형태의 진화는 발생 과정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숨 막힐 정도로 놀라운 과정들이다. 하나의 세포, 수정란으로부터 복잡한 전체 생명체가 발생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하루(파리 구더기), 몇 주(생쥐), 몇 달(사람) 만에 하나의 수정란이 수백만 개, 수십억 개, 아니 사람의 경우에는 대략 십조 개의 세포로 자라 몸체와 각종 기관, 조직들을 이룬다고 생각해보라. 수정란이 배아를 거쳐완전한 동물로 변하는 과정만큼 경이로운 자연현상은 거의 없다.  - P29

현대적 종합의 창시자 중 한명인 에른스트 마이어는 ‘매우 가까운 친족관계가 아니고서야 상동유전자를 찾아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생물학자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초파리 몸 조직 과정의 중요 부분을 관장하는 것으로 밝혀진 유전자들 대부분과 흡사한 유전자가사람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에도 존재하며, 기능도 같았던 것이다. 뒤이어 또 다른 사실이 발견되었다. 눈, 사지, 심장처럼 동물마다 구조가 달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으리라 보았던 여러 기관들의 발생이 동물에 상관없이 동일한 유전자들로 통제된다는 것이다. 여러 종의 발생유전자들을 비교하는 작업은 발생학과 진화생물학의 접점에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학제가 되었다. 그것이 진화발생생물학, 줄여서 ‘이보디보‘이다.
이보디보 혁명의 첫 개가는 외형이나 생리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복잡한 동물이 공통의 ‘마스터(master)‘ 유전자들로 된 ‘툴킷(tool kit, 도구상자)‘을 갖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마스터 유전자는 몸 전체나 일부를 형성하고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인데, 파리든 딱새든, 공룡이든 삼엽충이든, 나비든 얼룩말이든 혹은 사람이든 간에모두 같은 것을 지닌 것이다. 툴킷의 발견과 이 유전자들의 놀라운속성에 대해서는 3장에서 설명하겠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그 발견 때문에 동물의 친족관계에 대한 기존의 개념, 동물 간의 차이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으며, 진화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 P35

 왜 그렇게 어려울까? 여기서 동물 설계의 첫번째 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 서로 연관관계에 있는 동물들(가령 척추동물군)의 몸은 엇비슷한 부속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뼛조각이 듀공(바다소의 일종인 멸종동물)의 것임을 알아냈다고 하자. 좋다. 듀공의 갈비뼈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어느 갈비뼈인가? 멸종한 말의 발굽 뼈를 발견했다고 하면대체 어느 발굽인가? 개개의 뼛조각만 놓고는 정말 판별하기 힘들다. 왜 그런가 생각하다보면 동물 설계의 두번째 원칙을 깨닫게 된다. 동물은 같은 종류의 부속들이 여러 개 반복된 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몇 가지의 기본적인 레고 블록들로 장난감 집을 짓듯이 말이다.
기본 부속은 발가락 뼈 하나하나처럼 작은 것일 수도, 몇몇 척추동물의 등뼈(척추)처럼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기본 요소들 자체는 아주 오래된 것이고 몸 규모에 대한 크기 비율은 동물마다 다르다. 커다란 초식공룡이든 작디작은 쥐라기 시대(1억 5천만 년 전) 도롱뇽이든 척추동물 특유의 반복적 모듈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모듈 식 설계는 척추동물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유명한 버제스 셰일에 담긴 화석들 중에서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바다에 번성했던 복잡하고 큰 동물들의 경우, 현생 동물들처럼 다양한 모듈식 신체 설계를 드러낸다(그림1-3].
화석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사라진 세상을 살았던 멸종 야수들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건 틀림없이 가슴 떨리고 감동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형태에도 마음이 끌린다. 화석을 보면 진화가 부속들을 반복 사용하는 모듈 구조를 폭넓게 채택함으로써 설계를 발전시켜왔음을 알게 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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