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 옛날로 돌아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백여 년 뒤의 세계에대해 말해준다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텔레비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본다거나 스마트폰으로 지인들과 바로바로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말한다면?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믿지 못할 일은 백여 년 뒤의 사람들도 아사히신문에 실린 나쓰메 소세키의「문」을 매일 읽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2080년의 일들을 상상하는 나에게 미래의 누군가가 찾아와 그때에도 종이신문의 한 귀퉁이에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릴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게 가장 놀랄 만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먼 미래의 사람들도 하리라는 것. 소설을 읽고, 일기를 쓰고, 옆에서 걷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단골식당 앞에 줄을 서고, 보름달에 소원을 빌고.... 그렇게 이 세계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놀랄 만한 미래는, 그렇게 다가온다. - P13

그런데 따분하게 이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읽다가 어느 순간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그랬을까? 순전히 밟으면 삐걱대는 오래된 마루널처럼 몸이 아픈 어머니를 떠나보낸 내 감정이입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온갖 금지 사항만을 늘어놓던 이덕무가 어느 결엔가 이런 문장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 숙부들이 다 살아 계실 때는 매우 우애가돈독하였다. 다섯 분 형제가 한 방에 모이시면 화기가 가득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이분들을 공경히 섬겨 아침저녁 식사를 반드시 손수 장만하시어 다섯 그릇의 밥과 다섯 그릇의 국을 반드시 큰상에 차려서 드렸다. 다섯 분은 빙 둘러앉아서 똑같이 식사를 드시는데 화기가 애애하였다. 나는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 지금은 네 분 숙부가 다 작고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 아버지만이 홀로 계시는데, 때로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이 문장을 쓰면서 이덕무는 그저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
며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고만 말했다. 자기 마음은 하나도 밝히지 않고 은근슬쩍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 얘기만 하더니 다시 하지 마라‘는 식의 글이 이어진다. 이 문장에서 이덕무는 별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가 어머니와 네 분 숙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을 여의고 난 뒤집이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아버지와 둘이 앉아 옛일을 얘기하노라면 슬피 우시는 아버지 때문에 눈물도 보이지 못한 이덕무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 책에 실린 말들이 사실은 이덕무의 말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손에 묻어도 빨아먹지 말아라, 얘야, 참외를 먹다가 남에게 줄 때는 꼭 칼로 이빨 자국을 깎아버리고 주어야 한다. - P33

정약용이 쓴 「선중씨先仲氏 정약전 묘비명」을 읽는데 내 눈에 문득 이런 구절이 들어왔다.

차마 내 아우로 하여금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오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가 마땅히 우이보에 나가서기다려야 되지.
不忍使吾弟 涉重以見我 我當於牛耳堡待之

1801년 11월 21일 목포 쪽과 해남 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주막거리인 나주 율정점에 도착한 죄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다음 날 아침 그곳에서 헤어져 각자 자기의 유배지로 떠났다. 이 일을 정약용은 「율정별栗亭別」이란 시에서‘로 이은 가게집, 새벽 등잔불이 푸르스름 꺼지려 해 / 잠자리에서 일어나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묵묵히 두 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이 터지네‘라고 노래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14년이 지난 1814년 아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나리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흑산도 입구인 우이도에 살았으니 우이도로 잘못 찾아간 아우가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할까봐 정약전은 고집을 피워 우이도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3년을 더 아우를 기다리다가 죽었으니 아우 정약용이 그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그 묘비명에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게 이와 같았었다‘라고 쓰는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유배 16년 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 P42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열무에게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내게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그마저도 못할 뻔했다.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내 얼굴에 부딪히던그 바람과 불빛과 거리의 냄새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소중한 것.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 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열무를 위해 먼저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물론 어렵겠지만,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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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도 한 짐, 부지런한 사람도 한 짐이라더니.... 철딱서니 없는 것도 속을 끓이기 시작하니 호되게 끓이네, 원.."
할머니는 이모가 안쓰러운 거였다. 갈상머리 없고 덤벙대는 막내딸이 속을 끓이며 아파하니 그것이 더 할머니 마음에 와닿는 모양이었다.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 P362

죽은 이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해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어졌고 숲은 그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03

"진희야. 네 아버지야."
이모가 말문을 열자 지금까지 힘들게 참았다는 듯이 남자도 그말을 되풀이했다.
"진희야. 아버지다."
나는 왼쪽 털신 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번에는 오른쪽 털신을 벗어들고는 그 안의 눈을 털어냈다. 보여지는 나가 말한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 침착하게 바라보는 나가 말한다. 반가워하지 마. 아버지라고 농담이야.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지. 그러니 이건 새로운 농담이 틀림없어. 70년대식 농담인 거야. 시대라는 구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맙소사, 아버지라니, 70년대엔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건 대단한 농담이다.
한쪽 손으로 마루 기둥을 잡고 한쪽 손으로 댓돌 위에 털신을 연신 패대기치면서, 그리고 한쪽 다리로 서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 때 나도 이런 눈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 붓에 흰 물감을 듬뿍 적셔서 검은 켄트지에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면 검은 밤 위로 흰 눈이 쏟아지는데 눈이 너무 많이 쏟아지니 시야가 흐릴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풍경은 그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도 시야가 흐렸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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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러에 따르면 "8000만 명의 선한 독일인이 존재하며, 그들 각각은 훌륭한 유대인을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돼지들이지만, 이 특정한 유대인은 일등급이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모두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반쪽 유대인의 특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수천 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는데, 이것이 친위대 내에서의 하이드리히의 역할과 괴링의 공군부대 원수인 에르하르트 밀히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하이드리히와 밀히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저명한 유대인을 위한 개입이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경우는 종종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히틀러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던 즈벤 헤딘은 저명한 지리학자인 본 출신의 필리프존 교수를 위해 개입했는데, 그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딘은
"독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필리프존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라고 협박했는데, 이에 따라 (H.G. 아들러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대한 저술에 따르면) 필리프존 교수는 즉각 보다 나은 막사를 배정받았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저명한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참전용사들과 다른 특권 계층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명한‘ 유대인의 운명이 애도되고 있다. 어린 한스 콘이 비록 천재는 아니지만 그를 전쟁이 끝날 무렵 살해한 것은 더욱 큰 죄악임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이 아인슈타인을 이주시킨 것을 아직도 공공연히 후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 가운데 적지 않다 - P207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칸트의 원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또그는 자기가 더 이상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어떤 것도변경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즉 당신의 행동의 원칙이 이 땅의 법의 제정자의 원칙과동일한 한에서 행위하라라든가, (또는 한스 프랑크의 ‘제3제국에서의 정언명법‘의 정식화처럼)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히 이런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무의식적 왜곡은 그 자신이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사용할 칸트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가정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남게 되는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행해야 한다는 요구, 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원리(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뿐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 나온 것이다. - P210

쿠르트 베허는 자기가 헝가리로 파견된 것은 단지 친위대에 쓸 2만 필의 말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거대한 유대인 기업체의 장들과 아주 성공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그와 힘러와의 관계는 돈독했고 그가 원하는때는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특별 임무‘는 아주 분명했다. 그는 헝가리 정부의 등뒤에서 주요 유대인 사업체의 통제권을 얻으려고 했고, 그 대가로 그 소유주들을 이 나라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환으로 상당한 액수를 갖게 해주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거래는 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업인 만프레드바이스 철강회사와 가진 것이었는데, 이 회사는 비행기, 트럭, 자전거에서 통조림, 핀, 바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그 협상 결과 바이스 가족 45명은 포르투갈로 이주시켰고 베허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추잡한 일 (Shweinerei)을 들었을 때 분노했다. 이러한 거래는 헝가리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벌였던 그의 모든 타협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헝가리인들은 의당 유대인의 재산을 징발하여 자신이 소유하기를 기대했다. 그에게는 분노할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거래는 통상의 나치스 정책의 아주 관대한 태도와는 모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재산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을 이송하고 처형하는 데 드는 비용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나라마다 달랐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한 사람당 300에서 500제국마르크를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단지 30마르크를, 프랑스에서는 700마르크를, 그리고 벨기에에서는 250마르크를 요구했다. (실제로 돈을 지불한 곳은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도 없었던 것 같다.) 독일이 전쟁 막바지에 헝가리에서 물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송될 유대인이 소비할 음식의 양만큼 제국으로 식품을 수송할 것을 요구한것이다. - P217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와 총통의 명령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충성심을 입증하는 문서를 대면한 아이히만은 제3제국에서는 "총통의 말이 법적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차례 애를 썼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만일 그 명령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내려온 것이라면 그것은 문서로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것이 자기가 히틀러로부터 문서로 된 명령을 결코 요구하지 않은 이유였다고설명하려 했다.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어떠한 문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그는 힘러에게는 서면 명령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환상적인 사태였으며, 아주 ‘유식한‘ 사법적 코멘트를 담은 수많은 문헌이 이에 대해 쓰였는데, 이 모든 것은 총통의 말, 즉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 땅의 기본적 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법적‘ 틀 안에서는 히틀러의 말을 적은 글이나 그 정신에 반하는 모든 명령은 정의상 불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아이히만의 입장은 합법성에 대한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 반하기 때문에 범죄적이라고 인식된 명령의 수행을 거부하면서 정상적인 법적 틀 내에서 행동하는 빈번히 인용되는 병사의 입장과 아주 불편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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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민족을 파괴하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이러한 역할은 유대인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모든 어두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두운장을 이룬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권위 있는 저술 『유럽 유대인의 파멸』(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에서, 이전에도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병적이고도 지저분한 세부사항까지 처음으로 노출된 것이다. 협조의 문제에서는 고도로 동화된 중부 및 서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과 이디시를 사용하는 동부의 대중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르샤바처럼 암스테르담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처럼 베를린에서도 사람들과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추방과 학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추방자들로부터 돈을 인수하고, 소개된 아파트를 계산하고, 유대인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을 기차에 태우도록 경찰력을 제공하며, 마침내 마지막 행동으로 유대인 공동체 자산의 최종 약탈을 위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유대인 요원들은 신뢰를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노란색 별 표지를 분배했고, 때로는 바르샤바에서처럼 "완장 판매가 정규 사업이 되었다. 보통의 천 완장이 있었지만 세탁이 가능한 멋진 합성 소재 완장도 있었다."  - P188

 학살센터에서 실질적인 살인 작업이 유대인 부대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잘 알려진 사실은 검찰의 증인들에 의해 공정하고도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금니를 뽑고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는지. 그들은 어떻게 무덤을 파고 또 대량학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 무덤을 덮어 없앴는지, 유대인 기술자들이 어떻게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가스실을 만들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는 유대인의 ‘자율성‘은 심지어 유대인이 사형집행인이 될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이것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도덕적 문제는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일꾼들을 선별하고 분류한 것은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범죄적 요소에 대한 특별한 편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는 특히폴란드에서 그러했는데, 거기서는 나치스가 폴란드 지식인들과 전문직종사자들을 학살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많은 수의 유대인 지식인들을학살했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서부 유럽에서의 정책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거기서 나치스는 독일인 민간인 억류자나 전쟁 포로들과교환할 목적으로 저명한 유대인을 남겨놓는 경향이 있었다. 베르겐빌젠은 원래 ‘교환용 유대인‘을 위한 수용소였다.) 비록 최종 해결책이라는 상황 하에서라 하더라도, 유대인의 협조에 대한 아이히만의 다음과 같은 묘사 가운데 존재하는 진실 속에 도덕적 문제가 놓여 있었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의 유대인위원회 구성과 업무 할당은 위원장의 임명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원회의 재량권에 맡겨졌는데, 누가 위원장이될 것인가는 물론 우리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임명은 독재적인 결정의 형태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줄곧 접촉해왔던 지도층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중히 다루어져야 했지요. 그들은 내내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급 관료들에게 당신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식으로 할일을 명령해서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된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 일 전체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쨌든 모든 일들을 좋아하도록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하는 것이다. - P194

따라서 제3제국에서 살면서 나치스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뿐이다. ‘공적 생활에 유의미한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죄를 측정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준이었다고 오토 키르히하이머가 최근에 그의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 1961)에서 언급했다. 만일 내면적 이주‘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헤르만 야라이스 교수가 뉘른베르크 재판을 받기 전에 쓴 ‘모든 피고측 변호인들에 대한 성명‘에서 지적한 대로, ‘내면적 이주자‘란 단지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대중들 한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의 민족들 중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반대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실상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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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허석의 얘기가 덜 슬프거나 덜 아름다웠다면 오히려 내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감동하거나 질투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따위의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변소 문이 보이거나 빨래가 들쭉날쭉하게 잔뜩 널려 있어야 ‘집‘이라고 느껴지며, 그렇지 않고 깨끗하고 단정하기만 하면 그냥 ‘건축물‘로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P204

이모가사온 ‘자유일기‘에는 페이지마다 맨 밑에 ‘오늘의 명언‘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불행한 날에 행복한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그 말이 다가와 가슴을찌른다. 힘없이 대문을 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늘 이 우주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라고.
그런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허석이 마루에 앉아 있다.
처음에는 놀랐고 그다음에는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내가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실망이었다.
그가 다시 온 것이 반갑지 않을 뿐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불과 몇 초 전, 저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주의깊게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나는 허석과의 예상치 않은 재회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까의 슬픔, 바로 거기에서 이별의 이미지가 완결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마치 팥쥐 역을 맡아 지금껏 열심히 연습했는데 갑자기 콩쥐로 배역이 바뀐 것처럼 나는 맥이 빠진다. 그렇게나 몰두해 있던 팥쥐의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서 콩쥐의 감정에마저 무덤덤해진다. 이별의 슬픔이 무의미해지자 사랑마저 시들해진다는 걸 나는 처음 깨닫는다. - P224

운명적이라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깨달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 P248

아줌마는섧게 울었다. 그것은 소중한 재성이를 다시 만나게 된 기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신세에 대한 설움 탓이기도 했다.
지난봄 제재소집 할머니가 죽었을 때 보니 가장 서럽게 우는 것은 이남 삼녀 중에 제일 못살고 고생 많이 한다는 작은딸이었다. 그 작은딸이 어머니의 영정 앞에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음놓고 울 기회를 얻었기때문에 그 공개적인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한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울음이 그칠 만하면 제 신세에 대한 새로운 설움이 떠올라 "아이고오!" 하면서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곤 했으므로 마당에 있던남자들은 그래도 그 딸이 제일 효녀라고 말들 하며 화투패를 돌렸다. 부엌에 있던 여자들은 딸의 심정을 짐작할 만큼 비슷한 신세이거나 인생의 이면에 대해 남자보다는 더 관찰력이 있었으므로그 딸의 설움이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추모의 정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저 작은딸은 요새도 살기가 그렇게 힘든 모양이지" 하면서 상에 젓가락을 놓았다. 광진테라 아줌마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연상한 것은 바로 제재소집 작은딸이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보이던 그 흐느낌이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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