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어린 시절 늘 나와 함께했다. 내 상상 속에항상 살아 있었고, 그리스 이민자 출신인 부모님이 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 속에도 등장했다. 그리스의 친척 집에 갔을 때 같이 놀던아이들 이름이기도 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신들의 이중성이었다. 그리스 신들은 막강한 불멸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약하고 사악했다. 가령 아폴론은 치유의 신이면서 질병의 신이다. 트로이전쟁 중 아폴론은 은 활을 겨누고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어 그리스인들에게 역병을 안겼다.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섬기는 신관의 딸 크리세이스를 납치해 가서 풀어주지 않은 데 대한 벌이었다.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전쟁이 일어난 지 30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폴론의 보복을 떠올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전에 없던 새로운 위협인 동시에 지극히 오래된 위협인 듯했다. 지금의 사태는 우리에게 현대적 수단으로 무장하되 옛 지혜에 의지하여 싸워나가라고 촉구하고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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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내가 그런 글을 적었을까? 당연히 기억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정확히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중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부분일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기는 한가?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 애는 만사를긍정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아이라서 삶이 펼쳐지는 그대로 기뻐하며 두려움 없이 잠들고 두려움 없이 깨어난다.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 P188

달리 말해 나는 노트의 핵심이 타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르 파비용의 모자 맡기는 카운터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하는 말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이건 내가 옛날에 쓰던 미식축구 유니폼 번호"라는 말 자체도 내 상상력을 건드린 게아니라 단순히 옛날에 읽었던 책의 기억, 십중팔구 「80야드의 달음질」(어윈 쇼의 단편소설, 주인공은 젊은 시절 아마추어 미식축구 선수였다. 옮긴이)의 기억을 촉발했다. 윌밍턴역의 더러운 크레이프 망토를 두른 여자도 내가 상관할 바아니다. 내 지분은 언제나, 당연히, 이 노트에 언급되지 않은 체크무늬 실크 원피스의 젊은 여자에게 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 언제나 그게 핵심이었다. - P193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랑과 배반을 똑같이 잊고 속삭였거나 외쳤던 말을 잊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 자신 한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그중 열일곱 살배기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지만, 강둑에 앉아 오렌지주스를 섞은 보드카를 마시며 자동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레스폴 앤드메리 포드의 <하우 하이 더 문>과 그 잔향에 귀 기울이는 기분이 어땠는지 다시 느껴보면 퍽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장면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때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있던 내가 실감 나지 않고, 심지어 그때의 대화를 즉흥으로 꾸며낼 수도 없다.) 하지만 스물세 살의 나는 훨씬 더 마음에걸린다. 언제나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던 그 여자는, 전혀 보고 싶지 않을 때 불쑥 다시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너무 긴 치마를 입고 공격적일 정도로 수줍고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고 원망과 작은 상처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던 그 여자는 취약하고 무지해서 나를 슬프게 만들고 동시에 화나게 만들고, 오래 추방당해 있었던만큼 훨씬 더 끈질기게 유령이 되어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게 좋은 생각일 테고, 연락하고 지낸다는 게 노트의 진짜 핵심인 것 같다. 자기 자신과 연락선을 열어두는 일은 우리 모두 각자 혼자서 해야한다. - P198

과거로 내쳐져 자신의 진면모를 보는 건 빌린 신분증으로 국경을 넘는 것과 같아서 불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진짜 자존감의 시작에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여러 진부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자기기만이 가장 어려운 속임수다. 남들에게 먹히는 눈속임은 조명이 훤히 밝혀진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밀회에 쓸모가 없다.싹싹한 미소도 안 통하고 예쁘게 나열한 선의의 목록도 통하지 않는다. 몰래 표시해둔 필승의 카드를 번개처럼 찾아보지만 헛된 일이다. 잘못된 이유로 베푼 친절, 진짜 수고는 들어가지 않은 허울 좋은 승리, 겉보기에만 영웅적이라서 내심 부끄러워지는 행동. 참담한 사실을 말하자면 자존감은 타인의 인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타인은 어쨌든 속이기쉽다. 평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한 말처럼 평판이란 용기 있는 사람한테는 없어도 되는 것이니까.
반면 자존감이 없다면, 자신의 실패를, 상상과 현실에서의 실패 모두를 끝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앉아서보아야만 하는 꼴이다. 날마다 새로운 촬영분이 보태어진다.
저기 네가 분을 못 이겨 깬 유리잔이 있어, 저기 X의 얼굴에 난 상처가 있어, 잘 봐, 이다음 장면, Y가 휴스턴에서 돌아온 밤이잖아, 봐, 네가 이걸 어떻게 망치는지 잘 봐. 자존감이 없는 삶은 따뜻한 우유도, 신경안정제도 구할 수 없는 밤, 뜬눈으로 누워 잠든 손을 이불에 올리고 저지른 죄와 빠뜨린 죄, 배반한 신뢰, 교묘하게 깨뜨린 약속, 나태나 비겁이나 부주의로 낭비해버린 축복들을 헤아리는 일이다. 아무리 미뤄도 결국 그 불편하기로 악명 높은 잠자리에 혼자 눕게 된다. 우리 스스로 만든 잠자리다. 거기서 잠을 자느냐 마느냐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존중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 P203

간단히 말해서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일정한 터프함, 소정의 윤리적 배짱을 보여준다. 과거에 ‘한성격character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는 인정받아도 간혹 더 즉각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미덕 앞에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곤 하는 자질이다. ‘성격‘이 얼마나 과거의 영광을 잃고 있는지는, 이제 ‘성격‘이라고하면 (특히 1차 경선에서) 패배한 미국 상원의원들을 떠올린다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격‘ - 자기 삶에 대단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 은 자존감이 샘솟는 원천이다. - P205

분별하고 사랑하고 초연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없으면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초연할 수도 없게 된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진 게 없고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우리가 가진 이 치명적 약점을 알아보지도 못할까 생각하며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지경에 내몰린다.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 우리한테 갖는 거짓된 관념에 부합하며 살려는 희한한 결심을 하고는 만나는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이 강박이 매력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스스로 비위를 맞추려 한다. 상상력이 동반된 공감 능력, 기꺼이 베푸는 도량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 네가 파올로라면 나는 프란체스카를 연기하겠어, 누구든 애니 설리번이 되어주면 나는 헬렌 켈러 노릇을 할게. 이렇게 틀어진 기대, 이렇게 웃기는역할은 다시 없다. 우리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명줄을 맡기고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 역할을 연기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할 때마다 떨어지는 다음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다급함에 새삼스럽게 절망한다.
이것은 간혹 ‘자아로부터의 소외‘라 일컬어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이 진행되면 누군가 뭔가 원할까 봐 전화도 받지 못하게 된다. 숨 막히도록 지긋지긋하게 자기 비난을 하지 않고도 싫다고 말한다는 건 이 게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만남은 지나친 요구를 하고, 신경을 찢고, 의지를 박약하게 하고, 답장하지 않은 편지처럼 사소한 일의 유령이터무니없이 큰 죄책감을 유발해 답장을 쓴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린다. 답장하지 않은 편지에는 어울리는 무게를 할당하고, 타인의 기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면 자존감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찾을 수 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나사의 마지막 회전을 보게 된다. 자신을 찾고자 도망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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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 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 P17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29

50원은 의원이 줄 수 있는 돈의 곱절보다도 많았고, 꽤 많은 일을해낼 종잣돈이 될 수 있었다. 영지 주인에게서 작은 땅 한 뙈기를 살수도 있고, 젊은 수탉과 건강한 암탉들을 들여와 병아리들을 키울수도 있으리라. 그러고 나면 식구들이 저녁을 굶은 채로 잠자리에드는 일은 결코 없겠지. 남동생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막내 여동생은 나중에 평판 좋고 유복한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을의 그 누구도 옥희가 기방에 팔렸다는 사실을 몰라야 했다.
옥희는 눈물조차 말라버릴 정도로 지친 어머니의 어두운 눈동자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이 비치는 것을 읽어낼수 있었다. 은실이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는데도 어머니는 뿌리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절에 갇혀 자라난 여자아이도 기생이 되려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에요.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더 흔하긴 하지만요. 옥희가 결국 이 길을 걷지 않을 운명이라면, 비록 기방에서 자란다 해도 충분히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은실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건 제 손을 떠난 문제예요" - P57

옥희의 어머니는 또한 어린 여자아이를 지나치게 교육하는 것도해롭다고 여겼다.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다 같이 한 방에서 공부하는 마을 서당에 고작 1년 정도 다닌 것이 옥희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옥희는 어머니가 흡족해할 만큼의 단순한 계산과 기초적인 글자 읽기 이상의 것을 배웠다.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옥희는 자신이 아궁이나 괭이처럼 순종적인 살림의 일부라고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의 유입으로 위축되는가 하면 확장되기도 했으며, 자신이 느끼기 시작한 어렴풋한 불만스러움에 스스로 놀랐다. 물론 이것이, 애초에 배움이 그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진 이유였다. 만약 옥희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면 어머니는 훨씬 더 자주 그를 꼬집고 때렸을 것이다. 손찌검에 대한 두려움은 심지어 어머니와 헤어지는 순간에조차 옥희의 눈물을 한층 가라앉혔다. 그러한 서글픔이 과연 어머니를 기쁘게 할지 아니면 화나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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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활동가들 입장에서 보면 이 정치적 잠재력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거의 대다수 지구 주민들이 끝까지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아마도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소수의 열일곱 살배기들은 낭만적 이상주의를 삶의양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잠재력은또한 언론에게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도 수준은 달라도 여전히, ‘히피 현상‘을 팬티 사냥(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습격해 속옷을 훔치는 일로, 195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유행했다. 옮긴이)의 연장선상이나 앨런 긴즈버그같은 안락한 유대인 청년회가 이끄는 아방가르드 운동, 또는 평화봉사단에 합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비닐 랩과 베트남 전쟁을 만들어낸 문화에 반대하는 심오한 저항으로 그리기를 고집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접근법, ‘저들이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식의 접근법은 "히피들은 돈을우습게 보고 ‘빵‘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타임> 커버스토리에서 절정에 달했고, 원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세대 간 주고받는 신호가 돌이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걸출한 증거로 남아 있다.
언론이 수신하는 신호들에는 정치적 가능성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았기에, 헤이트 애시베리에 감도는 긴장들은 대체로 언급되지 않고 넘어갔다. <라이프>와 <>과 CBS 방송에서 헤이트 애시베리에 파견된 기자들이 하도 많아서 오히려서로를 관찰했다. 관찰자들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대충 그대로 믿었다. 정치적 행동을 박차고 나온 세대고, 권력게임은 초월했으며, 신좌파는 잘난 척에 불과하다는 말. 그러한고로, 헤이트 애시베리에 실제로 활동가는 없으며 매주 일요일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즉흥적인 시위일 뿐이라고, 왜냐하면, 디거스의 말대로, 경찰은 야만적이고 청소년은 인권이없고 가출한 아이들은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했고 사람들은 헤이트 스트리트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베트남의 축소판이라고 믿었다. - P174

물론 활동가들-사고가 경직된 사람들 말고 창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으로 혁명에 접근하는 이들은 언론이 놓치는 진실을 이미 오래전에 포착했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것을 보고 있었다.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본 이상, 그 진공 상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원자처럼 쪼개지는 사회를 복구할 수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전통적인 세대 반항이 아니었다. 1945년에서 1967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는일을 게을리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 법칙을 믿지 않게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의 수가 너무 적었을 수도 있다. 이 아이들은 사회의 가치를 전통적으로 제시하고 강화하는 사촌과 대고모와 주치의와 평생 함께 하는이웃의 그물망에서 잘려 단절된 채 성장했다. 이 아이들은새너제이로, 출라비스타로, 여기로, 아주 많이 이사를 다녔다. 사회에 반항한다기보다는 사회를 아예 모른다. 그저 이 사회에서 가장 널리 홍보된 내재적 의혹에 피드백을 할 줄만 안다. 베트남, 비닐 랩, 다이어트 알약, 원폭.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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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정원사는 레몬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늙은 나무는 만일 벌목되지 않거나 가뭄, 질병, 무수한 해충, 균류,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면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진다고 한다. 일생의 끝에 이른 나무에서는 마지막으로 무수한 레몬이 달린다. 마지막 봄이 되면 꽃눈이 트고거대한 꽃송이가 피어 공기를 향기로 채우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두 블록 떨어져서도 콧구멍이 아릴 정도다. 그런 다음열매가 한꺼번에 익고 이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져 몇 주 뒤에는 썩어가는 레몬이 땅을 뒤덮는다. 죽음을앞둔 저런 풍요는 야릇한 광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연어 수백만 마리가 짝짓기와 산란을 한 뒤에 죽는다든지 청어 수십억 마리가 정액과 알로 바닷물을 하얗게 물들이고 나서 태평양 북동부 해안 수백 킬로미터를 덮는다든지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무는 사뭇 다른 생명체이며 이런 과숙의 과시는 식물보다는 인류의 마구잡이식 파괴적 성장과 더 가까워 보인다. 내 레몬나무를 얼마나 살려두어야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베어서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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