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 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 P17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29

50원은 의원이 줄 수 있는 돈의 곱절보다도 많았고, 꽤 많은 일을해낼 종잣돈이 될 수 있었다. 영지 주인에게서 작은 땅 한 뙈기를 살수도 있고, 젊은 수탉과 건강한 암탉들을 들여와 병아리들을 키울수도 있으리라. 그러고 나면 식구들이 저녁을 굶은 채로 잠자리에드는 일은 결코 없겠지. 남동생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막내 여동생은 나중에 평판 좋고 유복한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을의 그 누구도 옥희가 기방에 팔렸다는 사실을 몰라야 했다.
옥희는 눈물조차 말라버릴 정도로 지친 어머니의 어두운 눈동자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이 비치는 것을 읽어낼수 있었다. 은실이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는데도 어머니는 뿌리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절에 갇혀 자라난 여자아이도 기생이 되려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에요.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더 흔하긴 하지만요. 옥희가 결국 이 길을 걷지 않을 운명이라면, 비록 기방에서 자란다 해도 충분히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은실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건 제 손을 떠난 문제예요" - P57

옥희의 어머니는 또한 어린 여자아이를 지나치게 교육하는 것도해롭다고 여겼다.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다 같이 한 방에서 공부하는 마을 서당에 고작 1년 정도 다닌 것이 옥희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옥희는 어머니가 흡족해할 만큼의 단순한 계산과 기초적인 글자 읽기 이상의 것을 배웠다.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옥희는 자신이 아궁이나 괭이처럼 순종적인 살림의 일부라고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의 유입으로 위축되는가 하면 확장되기도 했으며, 자신이 느끼기 시작한 어렴풋한 불만스러움에 스스로 놀랐다. 물론 이것이, 애초에 배움이 그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진 이유였다. 만약 옥희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면 어머니는 훨씬 더 자주 그를 꼬집고 때렸을 것이다. 손찌검에 대한 두려움은 심지어 어머니와 헤어지는 순간에조차 옥희의 눈물을 한층 가라앉혔다. 그러한 서글픔이 과연 어머니를 기쁘게 할지 아니면 화나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활동가들 입장에서 보면 이 정치적 잠재력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거의 대다수 지구 주민들이 끝까지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아마도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소수의 열일곱 살배기들은 낭만적 이상주의를 삶의양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잠재력은또한 언론에게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도 수준은 달라도 여전히, ‘히피 현상‘을 팬티 사냥(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습격해 속옷을 훔치는 일로, 195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유행했다. 옮긴이)의 연장선상이나 앨런 긴즈버그같은 안락한 유대인 청년회가 이끄는 아방가르드 운동, 또는 평화봉사단에 합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비닐 랩과 베트남 전쟁을 만들어낸 문화에 반대하는 심오한 저항으로 그리기를 고집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접근법, ‘저들이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식의 접근법은 "히피들은 돈을우습게 보고 ‘빵‘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타임> 커버스토리에서 절정에 달했고, 원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세대 간 주고받는 신호가 돌이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걸출한 증거로 남아 있다.
언론이 수신하는 신호들에는 정치적 가능성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았기에, 헤이트 애시베리에 감도는 긴장들은 대체로 언급되지 않고 넘어갔다. <라이프>와 <>과 CBS 방송에서 헤이트 애시베리에 파견된 기자들이 하도 많아서 오히려서로를 관찰했다. 관찰자들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대충 그대로 믿었다. 정치적 행동을 박차고 나온 세대고, 권력게임은 초월했으며, 신좌파는 잘난 척에 불과하다는 말. 그러한고로, 헤이트 애시베리에 실제로 활동가는 없으며 매주 일요일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즉흥적인 시위일 뿐이라고, 왜냐하면, 디거스의 말대로, 경찰은 야만적이고 청소년은 인권이없고 가출한 아이들은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했고 사람들은 헤이트 스트리트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베트남의 축소판이라고 믿었다. - P174

물론 활동가들-사고가 경직된 사람들 말고 창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으로 혁명에 접근하는 이들은 언론이 놓치는 진실을 이미 오래전에 포착했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것을 보고 있었다.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본 이상, 그 진공 상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원자처럼 쪼개지는 사회를 복구할 수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전통적인 세대 반항이 아니었다. 1945년에서 1967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는일을 게을리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 법칙을 믿지 않게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의 수가 너무 적었을 수도 있다. 이 아이들은 사회의 가치를 전통적으로 제시하고 강화하는 사촌과 대고모와 주치의와 평생 함께 하는이웃의 그물망에서 잘려 단절된 채 성장했다. 이 아이들은새너제이로, 출라비스타로, 여기로, 아주 많이 이사를 다녔다. 사회에 반항한다기보다는 사회를 아예 모른다. 그저 이 사회에서 가장 널리 홍보된 내재적 의혹에 피드백을 할 줄만 안다. 베트남, 비닐 랩, 다이어트 알약, 원폭.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정원사는 레몬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늙은 나무는 만일 벌목되지 않거나 가뭄, 질병, 무수한 해충, 균류,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면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진다고 한다. 일생의 끝에 이른 나무에서는 마지막으로 무수한 레몬이 달린다. 마지막 봄이 되면 꽃눈이 트고거대한 꽃송이가 피어 공기를 향기로 채우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두 블록 떨어져서도 콧구멍이 아릴 정도다. 그런 다음열매가 한꺼번에 익고 이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져 몇 주 뒤에는 썩어가는 레몬이 땅을 뒤덮는다. 죽음을앞둔 저런 풍요는 야릇한 광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연어 수백만 마리가 짝짓기와 산란을 한 뒤에 죽는다든지 청어 수십억 마리가 정액과 알로 바닷물을 하얗게 물들이고 나서 태평양 북동부 해안 수백 킬로미터를 덮는다든지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무는 사뭇 다른 생명체이며 이런 과숙의 과시는 식물보다는 인류의 마구잡이식 파괴적 성장과 더 가까워 보인다. 내 레몬나무를 얼마나 살려두어야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베어서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날 아침 딱히 할일이 없던 보어는 논문을 뒤적거리다 이내 읽고 또 읽었는데,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발견에 정신이 홀딱 팔려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의 성취는 전례가 없었다. 마치 테니스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보지 못하고도 스타디움밖으로 날아오는 공 몇 개만 가지고 윔블던의 모든 규칙(세트의 수, 잔디의 높이, 네트의 장력, 심지어 선수들이 반드시 흰색 경기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알아내는 것 같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무슨 기상천외한 논리로 이 행렬을 만들어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 젊은이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발견했음은 알 수 있었다. 보어가 맨 처음 한 일은 아인슈타인에게 알린 것이었다. 곧 발표될 하이젠베르크의 최신논문은 꽤나 알쏭달쏭해 보이지만 분명히 참이고 심오하며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25년 9월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 시보」 제33호에 「운동학적· 역학적 관계에 대한 양자이론적 재해석에 대하여」를발표했다. 양자역학을 최초로 정식화한 논문이었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클 라스키는 당에서 이탈한 개혁가들을 경멸한다. 정치적 권력은 총신 끄트머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을 신봉하며, 이 점을 역설할 때만큼은 뜨거운 솔직함으로 제 무덤을 파기도 한다. 미국 좌파 지형에서 마이클 라스키가 차지하는 입지란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니 외로운 돈키호테라 하겠다. 인기도 없고 실용성도 없다. 마이클 라스키는 미합중국에 "노동자들"이 있다고 믿고, 때가되면 "봉기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의식적인 단합으로 말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자의식을 갖고있고, 악마적 힘을 휘두른다고 믿는다. 모든 면에서 이상주의자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의 마이클 라스키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 두려움의감각이 너무나 날카로워 극단과 실패가 예정된 헌신에 경도되는 사람들, 나 역시 두려움이라면 제법 아는 사람이거니와, 어떤 사람들이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써 만들어내는 정교한 체제들의 가치를 안다. 알코올이나 헤로인이나 색정처럼 접근성이 좋은 것이든 신이나 역사에 대한 믿음처럼 얻기 힘든 것이든 그런 사람들의 아편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 P95

그 표현이 정확히 옳다. 경제신문을 대충 훑어보는 사람이라면 하워드 휴스가 절대 사업상의 "거래"나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휴스는 "사명" 내지 "임무"를 수행한다.
《포춘>이 러브레터를 연재할 때의 표현을 빌리면, 휴스는 언제나 "한 개인의 절대적인 통제권하에 있는 최대 규모 기업자산의 소유주로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휴스는 "동업자"도 두지 않는다. 오로지 "적수"만이 있을 뿐이다. 적수들이 절대적 통제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면" 휴스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유독 휴스와 관련된 보도에서 특징적으로 쓰이는 "보이면"이나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이런 표현은, 휴스의 사명이 갖는 특별한 분위기를 암시해주었다. 휴스가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행동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골라 "당신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고 경고를 할 수도있다는 말이다. 휴스가 싫어하는 것을 하나 꼽자면 단연 머리에 겨누어진 총(일반적으로 이는 행사 참석이나 정책 논의를 뜻한다)이므로 이 메모로 적어도 TWA 항공-휴스가 경영했던 당시 이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과 비슷하게 운영되는조직은 온두라스 정부밖에 없었다-의 사장 한 명은 사직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끝도 없고, 한없이 친숙하다. 휴스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이런 일화들을 야구카드처럼 서로 교환하며,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져 출처를 식별할 수 없을 지경이되도록 애지중지한다.  - P102

 우리의 공식적 영웅과 비공식적 영웅은 이처럼 언제나 갈라졌다. 하워드 휴스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공식적으로 흠모하는 것과 은밀하게 욕망하는 것, 가장 광범한 의미에서 우리가 결혼한 사람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에 존재하는, 이 바닥없는 간극을 못 보고 지나칠 수는없다. 겉으로는 갈수록 사회적 미덕을 상찬하는 듯 보이는나라에서, 하워드 휴스는 단순히 반사회적일 뿐 아니라 화려하게, 현란하게, 독보적으로 비사회적이다. 최후의 사적인인간, 우리가 이제 더는 인정하지 않는 꿈이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