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에는 중국 대부분 지역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그 직후 내 중국인 제자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른바 ‘봉쇄관리‘ 조치가 시행된 지역의 총인구는 9억3400만 명에 달했다. 중국의 봉쇄 조치는 마오쩌둥 시절의 사회통제를 연상케 할 만큼 규모와 강도가 엄청났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의 공중보건 조치였다.
‘봉쇄관리‘에 따라 여러 조치가 시행됐다. 주민들은 집 밖으로나올 수 없었고, 일주일에 1회 또는 2회 생필품 구매를 위한 외출만 허락됐다. 구매자들은 2m 간격을 유지한 채 줄을 섰다. 평소 중국의 보행자 밀도를 생각하면 누가 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리고집 밖에선 누구나 예외 없이 마스크를 써야 했다. 모든 지역 간의 행인과 차량 이동은 검문을 통해 특별 출입 허가증을 소지한 경우에만 허락됐다. 작게는 동네 단위로 출입 통제가 이루어졌다. 출입 허가중에 적힌 문구(‘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만인의 책무)에서 거리에 내걸린 붉은색 대형 현수막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과거를 연상케 하는집단주의식 표어가 등장했다. 모든 장소의 입장객은 체온을 측정했고, 학교 수업은 온라인으로 실시했으며, 차량과 공공장소를 주기적으로 소독했다. 식품과 기타 생필품이 엄청난 규모로 치밀하게 배송됐다. 중국 당국은 배달 회사의 상품 배달을 장려했고, 배달 회사는주문용 앱을 통해 차량 운전자들이 마스크를 착용했고 열이 없음을 보증했다.
봉쇄 규칙을 시행하는 역할은 구역 담당자, 지방공무원, 공산당원등의 몫이었다.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와 집단주의적 사회규범 덕분에 통제가 수월했다. 봉쇄는 그저 상의하달식으로만 시행된 것도 아니었다. 가령 시골 주민들은 베어 쓰러뜨린 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기도 했고, 지역 방언으로 방문객을 심문하여 불청객을 가려내기도 했다. 
통제는 현대적인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2월에 한 국영 군용 전자기기 제조사가 공개한 앱은 사용자가 이름과 신분증 번호를 입력하면 비행기 · 열차·버스 이용 중 바이러스 보유자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지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이런 기술이 등장한 데 섬뜩한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곧 자국 역시 비슷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거나 더 나아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됐다. - P38

바이러스 유전체 지도 작성의 중요한 장점 하나는 바이러스의 변이체를 정확히 가려내 전 세계 확산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이러스의 유전체는 미세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즉 유전암호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이러스의 기능에는 대개 영향이 없다. 변화의 발생 주기는 상당히 일정해서, 평균적으로 2주마다 한 번씩 미세한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유전암호의 어느 곳이 바뀔지는 알 수 없다. 돌연변이 위치는 무작위적으로 선정되며, 따라서 바이러스는 지역에 따라 그 유전체가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된다. 세계 각지에서 수천수만 건의 검체를 수집해 무작위적으로 누적된 돌연변이를 조사하면, 바이러스의 이동 경로를 재구성할 수 있다. 마치 여권에 찍힌 도장처럼, 바이러스가 어디를 거쳐 왔으며 언제 국경을 넘어왔는가 하는 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그랜드 프린세스호 발병 사태가 시애틀 발병 사태와 연관된 것이고, 시애틀은 우한의 최초 발병과 연관된 것임을 신속히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기법 덕분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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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스칼러>에서 내가 하루가 다르게 더욱 불신하게 되는 단어인 ‘도덕성‘에 대한 글을 다소추상적인 방식으로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내 마음은 완강하게 구체적인 것들로 향한다.
여기 구체적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어젯밤 자정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데스 밸리 인터체인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차 한 대가 숄더를 박고 전복되었다. 아주 젊고 만취한 상태가 분명한 운전자는 즉사했다. 여자친구는 발견 당시 살아있었지만 내출혈이 심하고 쇼크 상태로 의식이 없었다. 나는이날 오후에, 여자를 데리고 제일 가까운 병원까지 운전해서 밸리 바닥을 가로지르고 치명적인 산길을 세 번 넘어 185마일(300km)을 달려간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활석을 캐는 광부인 남편이 고속도로에 남아, 검시관이 오늘 새벽 비숍에서 출발해 산을 넘어올 때까지 청년의 시신 곁을 지켰다고 한다. "고속도로에 시체를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간호사는 말했다. "부도덕한 일이에요."
이런 경우에는 나도 이 단어를 불신하지 않는다. 간호사의 말은 아주 구체적인 무엇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분이라도 시체를 사막에 혼자 버려두면 코요테들이 다가와 살점을 먹어치운다는 뜻이었다. 코요테가 시체를 갈가리 뜯어먹게 둘 것인가 여부는 감상적인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연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서로 약속하는 한가지는 사상자의 시신을 수습하려 노력하겠다는 것, 우리의죽은 자들을 코요테 먹잇감으로 버리고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면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교육을 잘 받고 자랐다면 우리는 시체와 함께 남을 테고, 그러지 않으면 악몽을 꿀 것이다. - P221

무슨 뜻이냐고?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오늘 밤 이곳 노지의 공기에는 불길한 히스테리아가감돈다. 인간적 관념을 떠올릴 수 없는 흉측한 변태성의 흔적이 비친다. "나는 내 양심을 따랐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광인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 말을 한 살인자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핵정보를 팔아넘긴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도 그 말을 했고, 마운틴 메도스 학살(1857년 9월, 몰몬교도 무장군이 마운틴 메도스에서 개척민을 대량학살한 사건. 옮긴이)을 저지른 자들도 그 말을 했으며 나치 전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도 그말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귀에못이 박이도록, 다소 주제넘게, 상기시켜주듯이 예수님도 그말을 하셨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그 말을 해본 적이 있을것이고 아마도 틀렸을 것이다. 원초적인 수준의 양심-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충의ㅡ을 제외하면, 개인적 양심을 우선에 놓는다는 주장보다 더 오만한 일이 있을까? ("어디 말해보세요."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어렸을 때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자 랍비가 물었다. "하느님이 신경이나 쓰실 것 같습니까?") 적어도 가끔 내 눈에는 세계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처럼 아수라장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내 양심을 따라간다면 [사슴사냥터] (노먼 메일러가 1955년에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쓴 소설-옮긴이)에서 매리언 페이가 동쪽의 로스앨러모스를 바라보며 비가 내리듯 숙청이 벌어지기를 기도하던 자리, 그 황량한 사막에 함께 서게 될지도 모른다.
"...와서 먼지와 악취와 오염을 씻어내게 하라. 어디에나 모두에게 오게 하라. 그렇게 와서 새하얗고 죽은 새벽에 세계가 맑게 서게하라" - P226

대단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지만, 갈수록 점점 더 거론되는 횟수가 적어지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이라도, 양심에근거한 윤리는 ‘틀리면‘ 위험하고 ‘옳으면‘ 존경스럽다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심란하리만큼 신속하게 태세 전환을 한다.
보다시피 나는-이 사회적 코드에 대한 근본적 충의를넘어서면- 무엇이 틀렸는지‘ 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
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는 입장을 아주 완강하게 고수하고자 한다. ‘도덕성‘이라는 말의 가장 심기 불편한 자질은 활용 빈도다. 언론, 텔레비전, 건성으로 하는 대화에도 이 말이 등장한다. 단순한 권력(또는 생존)정치의 문제, 중립적인 공공 정책의 문제, 거의 모든 문제에 이 당파적 도덕성의부담이 지워진다. 뭔가 안일한 태도, 자기만족이 작동하고있다. 물론 우리 모두 뭔가 ‘신봉하고 싶고, 공적인 명분에 서사적인 죄책감을 달래고 싶고, 지긋지긋한 자아를 잊고 골몰하고 싶고, 아마도 자기 집에 걸린 항복의 백기를 떼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 펄럭이는 멋진 흰색 깃발로 바꾸고 싶어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 태고적부터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왔으니까.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과 이유에 관해 스스로 기만하지 않는다고 전제할 때만 괜찮은 거다. 즉석 결성된 온갖 위원회, 피켓 라인들, 《뉴욕 타임스》의근사한 서명, 온갖 선전선동의 도구들이 자동으로 도덕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목적이란 임시방편이거나 아닐 수 있고, 좋은 생각이거나 아닐 수 있으나, 어쨌든 ‘도덕성‘과는 무관함을 숙지할 때만 그래도 괜찮은 거다. 실용적 필요성이 아니라 도덕적 중요성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뭔가를 원하고 꼭 필요하다고 자기를 기만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우리가 유행하는 광인의 대열에 합류할 테고, 그때는 히스테리아의 가녀린 울음소리가 뭍에서 들릴 것이며, 그때는 우리가 크나큰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우리가 이미 그곳에 다다른 것도 같다. - P228

집에 와 있으면, 내가 이처럼 시대와 단절된 사고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어느 때보다 뚜렷해진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찬장을 열 때마다 나의 과거를 만나다 보니 신경증적무기력이 도져 아무 일도 못 하고 정처 없이 이방 저방서성거린다. 차라리 정면으로 맞붙어야겠다 생각하고 서랍 하나를 싹 비워 내용물을 침대 위에 늘어놓는다. 열일곱 살에 입었던 수영복. <더 네이션>에서 보낸 원고 거절 편지, 아버지가 쇼핑센터를 지으려다 만 부지의 1954년 항공사진. 작은 장미를 손으로 그려넣고 할머니의 이니셜인 "E. M."이라고 서명된 찻잔들. 《더 네이션>에서 받은 거절 편지와 1900년에 핸드페인팅한 찻잔에는 최종 해결책이 없다. 스키를 타고 1910년의 도너 패스를 둘러보는 청년 할아버지의 사진에도 답이 없다. 나는 사진의 구김살을 펴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내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한다. 서랍을닫고 어머니와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우리는 사이가 아주 좋다.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게릴라 전쟁을 치른 참전 용사들이다. - P232

대고모님들을 찾아뵈러 간다. 내가 내 사촌, 혹은 젊어서 죽은 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는 1948년에 마지막으로 본 친척의 일화를 듣고, 대고모님들은 내게 아직도 뉴욕시에 사는 게 좋냐고 물으신다. 로스앤젤레스에산 지 3년째지만 나는 좋다고 한다. 아기한테는 박하사탕을 먹어보라고 하고, 내게는 달러 지폐 하나를 슬쩍 찔러주며 "맛있는 거 사 먹어"라고 하신다. 질문은 말끝이 흐려지고 답은 버려지고 아기는 한줄기 오후 햇살을 받으며 먼지티끌과 논다.
아기의 생일파티를 할 시간이다. 하얀 케이크, 스트로베리 마시멜로 아이스크림, 다른 파티에서 쓰고 남은 샴페인 한 병. 저녁에 아기를 재우고 나는 요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애의 얼굴이 요람 울타릿살 사이로 삐져나온 부분에 내 얼굴을 대었다. 그 애는 열려 있고 잘 믿는 아이다. 불쑥불쑥 뜻밖의 일들이 발목을 잡는 대가족의 삶에 대책도 없고 익숙지도 않은 아이니, 내가 그런 삶을 주지 못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주고 싶다. 사촌들과 강과 대고모들의 찻잔을 느끼며 자라나게 될 거라고 약속하고 싶고, 머리도 안 빗고 프라이드치킨을 들고 강가로 피크닉을 가자고 약속하고 싶고, 생일 선물로 고향을 주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다르게 살고 나는 그 애에게 그런 건 전혀 약속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실로폰과 마데이라의 자수 원피스를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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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는 곧 이곳의 주인인 은실이 그러한 위치와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은실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훈계만 아득히 읊어대는 신비한 존재도 아니었다. 나이 많은 선배 기생들에게 불손하게 행동한 어린 견습생들을 따끔하게 처벌하는가 하면, 공연한 입소문이나 퍼뜨리고 기방에 내야 할 수입을 몰래 숨기는 기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추궁했다. 월경혈로 얼룩진 이부자리, 도둑맞은 비녀, 누군가 꾸준히 한두 숟가락씩 훔쳐 먹어 비어가는 꿀단지까지, 은실의 주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사소하고 잡스러운 문제에 개입하여 온갖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그는 17세기의 그림 속에 묘사된 백옥 같은 미인처럼 은은한 태도를 유지했고, 언제나 무심하고 공정한 모습이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과 의식적으로 취하는 품행 양쪽에서 은실이 아주 오래된 골동품을 연상시키는 그만의 우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것을, 옥희는 그의 모든 측면을 통해 느낄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가발을 함께 엮어 머리에 얹은 커다란 왕관 형태의 가체도, 다른 여자들이 썼다면 너무 구식이거나 살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은실에게는 그런 모습이 곧 흘러간 과거의 낭만적인 향수와 시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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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어린 시절 늘 나와 함께했다. 내 상상 속에항상 살아 있었고, 그리스 이민자 출신인 부모님이 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 속에도 등장했다. 그리스의 친척 집에 갔을 때 같이 놀던아이들 이름이기도 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신들의 이중성이었다. 그리스 신들은 막강한 불멸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약하고 사악했다. 가령 아폴론은 치유의 신이면서 질병의 신이다. 트로이전쟁 중 아폴론은 은 활을 겨누고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어 그리스인들에게 역병을 안겼다.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섬기는 신관의 딸 크리세이스를 납치해 가서 풀어주지 않은 데 대한 벌이었다.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전쟁이 일어난 지 30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폴론의 보복을 떠올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전에 없던 새로운 위협인 동시에 지극히 오래된 위협인 듯했다. 지금의 사태는 우리에게 현대적 수단으로 무장하되 옛 지혜에 의지하여 싸워나가라고 촉구하고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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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내가 그런 글을 적었을까? 당연히 기억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정확히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중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부분일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기는 한가?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 애는 만사를긍정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아이라서 삶이 펼쳐지는 그대로 기뻐하며 두려움 없이 잠들고 두려움 없이 깨어난다.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 P188

달리 말해 나는 노트의 핵심이 타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르 파비용의 모자 맡기는 카운터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하는 말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이건 내가 옛날에 쓰던 미식축구 유니폼 번호"라는 말 자체도 내 상상력을 건드린 게아니라 단순히 옛날에 읽었던 책의 기억, 십중팔구 「80야드의 달음질」(어윈 쇼의 단편소설, 주인공은 젊은 시절 아마추어 미식축구 선수였다. 옮긴이)의 기억을 촉발했다. 윌밍턴역의 더러운 크레이프 망토를 두른 여자도 내가 상관할 바아니다. 내 지분은 언제나, 당연히, 이 노트에 언급되지 않은 체크무늬 실크 원피스의 젊은 여자에게 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 언제나 그게 핵심이었다. - P193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랑과 배반을 똑같이 잊고 속삭였거나 외쳤던 말을 잊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 자신 한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그중 열일곱 살배기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지만, 강둑에 앉아 오렌지주스를 섞은 보드카를 마시며 자동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레스폴 앤드메리 포드의 <하우 하이 더 문>과 그 잔향에 귀 기울이는 기분이 어땠는지 다시 느껴보면 퍽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장면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때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있던 내가 실감 나지 않고, 심지어 그때의 대화를 즉흥으로 꾸며낼 수도 없다.) 하지만 스물세 살의 나는 훨씬 더 마음에걸린다. 언제나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던 그 여자는, 전혀 보고 싶지 않을 때 불쑥 다시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너무 긴 치마를 입고 공격적일 정도로 수줍고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고 원망과 작은 상처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던 그 여자는 취약하고 무지해서 나를 슬프게 만들고 동시에 화나게 만들고, 오래 추방당해 있었던만큼 훨씬 더 끈질기게 유령이 되어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게 좋은 생각일 테고, 연락하고 지낸다는 게 노트의 진짜 핵심인 것 같다. 자기 자신과 연락선을 열어두는 일은 우리 모두 각자 혼자서 해야한다. - P198

과거로 내쳐져 자신의 진면모를 보는 건 빌린 신분증으로 국경을 넘는 것과 같아서 불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진짜 자존감의 시작에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여러 진부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자기기만이 가장 어려운 속임수다. 남들에게 먹히는 눈속임은 조명이 훤히 밝혀진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밀회에 쓸모가 없다.싹싹한 미소도 안 통하고 예쁘게 나열한 선의의 목록도 통하지 않는다. 몰래 표시해둔 필승의 카드를 번개처럼 찾아보지만 헛된 일이다. 잘못된 이유로 베푼 친절, 진짜 수고는 들어가지 않은 허울 좋은 승리, 겉보기에만 영웅적이라서 내심 부끄러워지는 행동. 참담한 사실을 말하자면 자존감은 타인의 인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타인은 어쨌든 속이기쉽다. 평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한 말처럼 평판이란 용기 있는 사람한테는 없어도 되는 것이니까.
반면 자존감이 없다면, 자신의 실패를, 상상과 현실에서의 실패 모두를 끝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앉아서보아야만 하는 꼴이다. 날마다 새로운 촬영분이 보태어진다.
저기 네가 분을 못 이겨 깬 유리잔이 있어, 저기 X의 얼굴에 난 상처가 있어, 잘 봐, 이다음 장면, Y가 휴스턴에서 돌아온 밤이잖아, 봐, 네가 이걸 어떻게 망치는지 잘 봐. 자존감이 없는 삶은 따뜻한 우유도, 신경안정제도 구할 수 없는 밤, 뜬눈으로 누워 잠든 손을 이불에 올리고 저지른 죄와 빠뜨린 죄, 배반한 신뢰, 교묘하게 깨뜨린 약속, 나태나 비겁이나 부주의로 낭비해버린 축복들을 헤아리는 일이다. 아무리 미뤄도 결국 그 불편하기로 악명 높은 잠자리에 혼자 눕게 된다. 우리 스스로 만든 잠자리다. 거기서 잠을 자느냐 마느냐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존중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 P203

간단히 말해서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일정한 터프함, 소정의 윤리적 배짱을 보여준다. 과거에 ‘한성격character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는 인정받아도 간혹 더 즉각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미덕 앞에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곤 하는 자질이다. ‘성격‘이 얼마나 과거의 영광을 잃고 있는지는, 이제 ‘성격‘이라고하면 (특히 1차 경선에서) 패배한 미국 상원의원들을 떠올린다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격‘ - 자기 삶에 대단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 은 자존감이 샘솟는 원천이다. - P205

분별하고 사랑하고 초연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없으면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초연할 수도 없게 된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진 게 없고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우리가 가진 이 치명적 약점을 알아보지도 못할까 생각하며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지경에 내몰린다.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 우리한테 갖는 거짓된 관념에 부합하며 살려는 희한한 결심을 하고는 만나는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이 강박이 매력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스스로 비위를 맞추려 한다. 상상력이 동반된 공감 능력, 기꺼이 베푸는 도량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 네가 파올로라면 나는 프란체스카를 연기하겠어, 누구든 애니 설리번이 되어주면 나는 헬렌 켈러 노릇을 할게. 이렇게 틀어진 기대, 이렇게 웃기는역할은 다시 없다. 우리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명줄을 맡기고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 역할을 연기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할 때마다 떨어지는 다음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다급함에 새삼스럽게 절망한다.
이것은 간혹 ‘자아로부터의 소외‘라 일컬어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이 진행되면 누군가 뭔가 원할까 봐 전화도 받지 못하게 된다. 숨 막히도록 지긋지긋하게 자기 비난을 하지 않고도 싫다고 말한다는 건 이 게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만남은 지나친 요구를 하고, 신경을 찢고, 의지를 박약하게 하고, 답장하지 않은 편지처럼 사소한 일의 유령이터무니없이 큰 죄책감을 유발해 답장을 쓴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린다. 답장하지 않은 편지에는 어울리는 무게를 할당하고, 타인의 기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면 자존감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찾을 수 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나사의 마지막 회전을 보게 된다. 자신을 찾고자 도망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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