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내가 그런 글을 적었을까? 당연히 기억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정확히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중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부분일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기는 한가?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 애는 만사를긍정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아이라서 삶이 펼쳐지는 그대로 기뻐하며 두려움 없이 잠들고 두려움 없이 깨어난다.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 P188
달리 말해 나는 노트의 핵심이 타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르 파비용의 모자 맡기는 카운터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하는 말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이건 내가 옛날에 쓰던 미식축구 유니폼 번호"라는 말 자체도 내 상상력을 건드린 게아니라 단순히 옛날에 읽었던 책의 기억, 십중팔구 「80야드의 달음질」(어윈 쇼의 단편소설, 주인공은 젊은 시절 아마추어 미식축구 선수였다. 옮긴이)의 기억을 촉발했다. 윌밍턴역의 더러운 크레이프 망토를 두른 여자도 내가 상관할 바아니다. 내 지분은 언제나, 당연히, 이 노트에 언급되지 않은 체크무늬 실크 원피스의 젊은 여자에게 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 언제나 그게 핵심이었다. - P193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랑과 배반을 똑같이 잊고 속삭였거나 외쳤던 말을 잊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 자신 한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그중 열일곱 살배기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지만, 강둑에 앉아 오렌지주스를 섞은 보드카를 마시며 자동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레스폴 앤드메리 포드의 <하우 하이 더 문>과 그 잔향에 귀 기울이는 기분이 어땠는지 다시 느껴보면 퍽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장면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때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있던 내가 실감 나지 않고, 심지어 그때의 대화를 즉흥으로 꾸며낼 수도 없다.) 하지만 스물세 살의 나는 훨씬 더 마음에걸린다. 언제나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던 그 여자는, 전혀 보고 싶지 않을 때 불쑥 다시 나타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너무 긴 치마를 입고 공격적일 정도로 수줍고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고 원망과 작은 상처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던 그 여자는 취약하고 무지해서 나를 슬프게 만들고 동시에 화나게 만들고, 오래 추방당해 있었던만큼 훨씬 더 끈질기게 유령이 되어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게 좋은 생각일 테고, 연락하고 지낸다는 게 노트의 진짜 핵심인 것 같다. 자기 자신과 연락선을 열어두는 일은 우리 모두 각자 혼자서 해야한다. - P198
과거로 내쳐져 자신의 진면모를 보는 건 빌린 신분증으로 국경을 넘는 것과 같아서 불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진짜 자존감의 시작에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여러 진부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자기기만이 가장 어려운 속임수다. 남들에게 먹히는 눈속임은 조명이 훤히 밝혀진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밀회에 쓸모가 없다.싹싹한 미소도 안 통하고 예쁘게 나열한 선의의 목록도 통하지 않는다. 몰래 표시해둔 필승의 카드를 번개처럼 찾아보지만 헛된 일이다. 잘못된 이유로 베푼 친절, 진짜 수고는 들어가지 않은 허울 좋은 승리, 겉보기에만 영웅적이라서 내심 부끄러워지는 행동. 참담한 사실을 말하자면 자존감은 타인의 인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타인은 어쨌든 속이기쉽다. 평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한 말처럼 평판이란 용기 있는 사람한테는 없어도 되는 것이니까. 반면 자존감이 없다면, 자신의 실패를, 상상과 현실에서의 실패 모두를 끝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앉아서보아야만 하는 꼴이다. 날마다 새로운 촬영분이 보태어진다. 저기 네가 분을 못 이겨 깬 유리잔이 있어, 저기 X의 얼굴에 난 상처가 있어, 잘 봐, 이다음 장면, Y가 휴스턴에서 돌아온 밤이잖아, 봐, 네가 이걸 어떻게 망치는지 잘 봐. 자존감이 없는 삶은 따뜻한 우유도, 신경안정제도 구할 수 없는 밤, 뜬눈으로 누워 잠든 손을 이불에 올리고 저지른 죄와 빠뜨린 죄, 배반한 신뢰, 교묘하게 깨뜨린 약속, 나태나 비겁이나 부주의로 낭비해버린 축복들을 헤아리는 일이다. 아무리 미뤄도 결국 그 불편하기로 악명 높은 잠자리에 혼자 눕게 된다. 우리 스스로 만든 잠자리다. 거기서 잠을 자느냐 마느냐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존중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 P203
간단히 말해서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일정한 터프함, 소정의 윤리적 배짱을 보여준다. 과거에 ‘한성격character 한다‘고 말해진 어떤 자질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는 인정받아도 간혹 더 즉각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미덕 앞에 맥을 못 추고 밀려나곤 하는 자질이다. ‘성격‘이 얼마나 과거의 영광을 잃고 있는지는, 이제 ‘성격‘이라고하면 (특히 1차 경선에서) 패배한 미국 상원의원들을 떠올린다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격‘ - 자기 삶에 대단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 은 자존감이 샘솟는 원천이다. - P205
분별하고 사랑하고 초연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없으면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초연할 수도 없게 된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진 게 없고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우리가 가진 이 치명적 약점을 알아보지도 못할까 생각하며 우리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지경에 내몰린다.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 우리한테 갖는 거짓된 관념에 부합하며 살려는 희한한 결심을 하고는 만나는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이 강박이 매력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스스로 비위를 맞추려 한다. 상상력이 동반된 공감 능력, 기꺼이 베푸는 도량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 네가 파올로라면 나는 프란체스카를 연기하겠어, 누구든 애니 설리번이 되어주면 나는 헬렌 켈러 노릇을 할게. 이렇게 틀어진 기대, 이렇게 웃기는역할은 다시 없다. 우리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명줄을 맡기고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 역할을 연기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할 때마다 떨어지는 다음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다급함에 새삼스럽게 절망한다. 이것은 간혹 ‘자아로부터의 소외‘라 일컬어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이 진행되면 누군가 뭔가 원할까 봐 전화도 받지 못하게 된다. 숨 막히도록 지긋지긋하게 자기 비난을 하지 않고도 싫다고 말한다는 건 이 게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만남은 지나친 요구를 하고, 신경을 찢고, 의지를 박약하게 하고, 답장하지 않은 편지처럼 사소한 일의 유령이터무니없이 큰 죄책감을 유발해 답장을 쓴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린다. 답장하지 않은 편지에는 어울리는 무게를 할당하고, 타인의 기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면 자존감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찾을 수 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나사의 마지막 회전을 보게 된다. 자신을 찾고자 도망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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