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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씹어 먹는 아이 - 제5회 창원아동문학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61
송미경 지음, 안경미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상상력이 없거나 아주 빈약하거나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는 동화를 읽으면 나도 이정도는 쓰겠다 라는 아주 말도 안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한다.(물론 쓸 수 없다. 그걸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진짜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재밌게 읽는 거로구나.....
송미경 작가는 내게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복수의 여신에서 그 맛깔스러운 문장과 상큼한 내용에 끌렸고 광인수술보고서에서 그의 실험정신과 주제의식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이번 작품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이제 참신한 상상력을 넘어 기묘한 4차원의 세계를 보는 느낌이다. 이 작가에게는 어떻게 이런 게 보일까? 어딘가에 숨어 눈에 띄지 않거나 눈에 띌까 두려운 이런 내면들을 어떻게 들여다 보았으며 어떻게 이해했을까?
『돌 씹어 먹는 아이 』라는 엽기적인 느낌의 표제작을 비롯하여 7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나의 경우에, 단편은 읽고 나면 다른 책들과 내용이 뒤죽박죽 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내용이 짧은 만큼 여운도 짧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워낙 느낌이 독특해서 다른 작품들과 쉽게 섞일 것 같지가 않다. 그림작가 안경미의 독특한 그림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첫 작품 제목은『혀를 사 왔지』다. 혀를 사다니, 소 혓바닥으로 뭘 해먹는단 소리는 들어봤지만 그 혀는 아닐 게 아닌가? 정육점은 아닐테고 어디서 혀를 판다는 거지?
"시장에 갔어." 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일 년에 한 번 삼일간 열리는 '무엇이든 시장'에 말이야." 화자인 시원이는 이 시장을 둘러보다 결국 건방진 당나귀가 파는 '혀'를 사 온다. "왜 하필 혀를 사 왔냐고? 난 혀가 없거든."
이 어린 아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말하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리라. 드디어 혀가 장착되었다. 속사포처럼 날리는 독설들은 상대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양심 없는 동네 빵집 아저씨, 늘 시비 걸고 괴롭히던 친구들, 어린 아들의 공부에 모든 것을 맞춰 놓은 엄마에게까지.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시장에 다시 간다. "나는 그곳에 돗자리를 펴고 내 책가방, 가방속 책들, 신발주머니와 실내화를 펼쳐놓았어. 마지막으로 나는 내 혀를 꺼내어 가장 앞줄에 놓았지."
하루의 속시원한 독설이 이 아이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는 왜 하루만의 독설에 만족하고 혀를 도로 팔았을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속 시원한 말이 단지 속 시원하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는 법... 그런 사람들은 그냥 갈구지만 않아도 착하게 살 수 있는데.... 착한 사람을 가만 두지 않고 괴롭히는 이 사회는 참 몹쓸 사회다. 시원이가 혀 아닌 더한 것을 사오려 하기 전에 제발 가만히 놔두길 바란다.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기만 하라고.
『나를 데리러 온 고양이 부부』에서는 능청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고양이 부부가 지은이네 집에 들어와 자기네가 친부모라며 딸을 데려가겠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다. 엄마는 지금 혼자서 김장을 담그고 있는 중이라 입으로만 화를 낼 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고양이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은이는 정말 내가 저들을 닮은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쿠키를 먹다 소파에서 잠든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간식을 먹은 후에 소파에 널브러져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늘 학교 다녀오면 곧바로 숙제와 학습지를 해야 한다고 하고 낮잠이란 있을 수 없지.... 평온하고 나른한 모습에서 동질감을 찾은 지은이는 고양이 부부를 따라나선다. 고양이 부모의 말들.
"우린 절대 바쁘지 않아. 가끔 사람한테 쫒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우린 음식을 모아 두지 않아. 그저 좀 덜 먹는 날이 있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지."
비교적 성실하게 내 일을 미루지 않고 사회의 상식과 규범에 맞추어 살아온 나는, 나와는 달리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인 아들을 이해 못해 끙끙 앓는다. 방학인 요즘 모처럼 새벽교회에 갔다가 이른 아침부터 도시락 두 개 싸들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학원버스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고 들어온 날, 아직도 한밤중인 아들을 향해 거의 저주에 가까운 한숨을 뿜어낸다. 이 아이의 방학 하루 일과는 거의 백수들의 그것에 가깝다. 점심때 쯤 나가 한밤중에 들어온다. "시간대를 바꾼 것 뿐인데 엄마는 왜 한숨이냐"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사람이 쉬기도 해야지" 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이 아이는 이제 고3이다. 분명히 내가 낳긴 했는데 영혼의 부모는 고양이가 맞는 것 같다. 고양이 엄마~ 당신이 얘 좀 책임져 줘. 밥은 내가 먹일게.
표제작인 『돌 씹어 먹는 아이』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엽기적인데, 문학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 했다. 해석의 자유는 독자들한테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온다. 설마 조약돌 하나를 입에 넣고 살짝 깨물어 보려나?
"저는 돌 씹어 먹는 아이예요."
라고 아이가 가족 앞에서 고백했을 때, 그 다음 장면을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해야 하나, 블랙유머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나도 네게 할 말이 있다. 나는 흙 퍼 먹는 아빠야."
오 마이 갓!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근데 작가는 그만 하질 않는다. 너무해!
가족들 몰래 얼린 못을 케첩에 찍어 먹는 걸 즐겼던 엄마, 지우개를 먹다 최근에는 더한 것을 먹기 시작한 누나... 그들은 울며 서로를 위로하다 뒤엉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4단 찬합에 도시락을 싸서 가족은 소풍을 떠났다. 4단 도시락에 들어 있는 메뉴를 이제 더이상 엽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자신의 메뉴를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 모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지구는 동그랗고』는 내게 너무 어려웠다. 그들을 실제 인물로 머리 속에 그려보니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작가가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나도 세상을 다 산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이해가 안되거나 별로 이해하고 싶지가 않은 상황이 있다.
『아빠의 집으로』를 읽을 때는 엄마의 심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젤 가슴아픈 작품이었다. 걱정스러웠다. 앞으로 잘 살겠지?
『아무 말도 안했어?』에서 나는 작품의 전체 내용보다도 아무도 못 듣는데 병우만 듣는 그 '바보' 라는 소리에 꽂혔다. 수민이는 아무 말을 안했을 수도 있지만 병우의 감각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던 거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억지를 쓴다고 다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줘야 하겠구나. 얼마 전 읽은 교육서적에서 "인간은 소속감과 자존감을 느낄 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데 이것이 충족이 안되면 생존을 위한 행동(소위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된다."라는 대목을 메모해 두었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 이런.... 동화를 읽고 교육서적과 줄 긋는 이런 분석질은 적절치 못한데.... 하여간에 내 곁에 병우가 나타나면 일단 눈쌀을 찌푸리지 말자고 다짐을 해 둔다.
『종이 집에 종이 엄마가』는 사실 엄청난 이야기다. 어린 미솔이가 겪은 일의 10분의 1도 나는 이나이 될 때까지 겪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쿨하면서도 따스하다. 미솔이가 그 나이에 겪기에 너무 엄청난 일을, 그래도 따뜻하게 겪어서 참 다행이다.
쓰다 보니 일곱 편에 대한 감상을 다 말해 버렸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거나 다른 이들의 느낌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가진 작가가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위기철 님은 <이야기가 노는 법>이라는 책에서 동화작가는 억지로 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그저 작가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쓴다', '이야기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런 뜻의 말을 하기도 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이야기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릴 때, 또 맛있게 써서 내어놓으시길 기다린다. 이 책, 참 특별한 느낌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