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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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귀를 자르나?"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씰그러뜨린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 귀는 두 개 있어."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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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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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대여섯 살까지만 해도 기후나 날씨 때문에 기분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날씨가 몸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끼친다. 날씨는 서른 살을 넘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39

어떤 사람은 ‘뭐든지 좋으니까‘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굳이 날씨까지 살펴 가며 쓰지 않아도 될 테지만, 이쪽으로서는 젊은 주제에 어떤 것이든 그대로 뽑아낸다는 오만함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에 무심코 두 개의 접속어가 들어가기만 해도 작가라면 누구나 나중에 살이 에이는 아픔을 느끼는 법이다.

-요코미쓰 리이치 - P40

나도 벌써 십몇 년이나 문필가로 살아온 터라 특별히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다. 다만 어떠한 경우든 표현상의 문제는 일단 단념할지라도 그 장르의 형식을 빌리지 않는 한, 더 없이 명료한 하나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한 결코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는다.

-마키노 신이치 - P45

지금껏 주로 소재는 옜것에서 가져왔다. 그 탓에 나를 골동품 수집하는 노인처럼 별난 만 찾아다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받은 케케묵은 교육 덕분에 예전부터 현대와 거리가 먼 책을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소재는 그 속에서 발견될 뿐이지, 일부러 찾으려고 읽는 게 아니다.

소재가 있더라도 자신이 그 소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소재와 자신의 마음이 오롯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소설은 써지지 않는다. 억지로 쓰면 지리멸렬한 글이 된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몇 번이나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P87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린 문학 애송이도 여기까지 성장하고 보 인간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것, 뭐든지 마음껏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글러먹은 인간을 못쓰겠다고 내동댕이치더라도 그가 혼자서 걸어가는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째 됐든 간에 그 녀석도 어딘가에 다다른다. 좋든 나쁘든 목적지는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

- 무로 사이세이 - P91

요사이 도쿄 말이 점점 시대에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야. 보통선거니 노동문제... 연설만이 아니야. 문학도 마찬가지야. 기분이니 감정이니,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는 단어를 쓰지 않으면 새롭게 들리지 않으니까.

-나가이 가후 - P107

나는 마침내 소설이 써질 것 같으면 평소 사람 만나기를 귀찮아하는 편인데도 갑자기 만날 약속을 잡거나 뭔가 볼일을 만들어 시내에 나가고 싶어진다. 왠지 소설에 인생의 공기를 불어넣는 느낌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 호리 다쓰오 - P128

담배는 하루에 골든배트를 네다섯 대 피운다.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 담배를 싫어해서 안 피웠는데, 지은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기에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운다. 자포자기는 꽤 기분이 좋다. 옜날에는 자포자기에 빠지면 속을 끓였건만 요즘은 양지에서 햇볕을 쬐는 듯하다.

-히야시 후미코 - P162

‘맑은 물처럼 아무 맛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내 글은 손짓이나 거짓말이나 꾸밈새가 도드라진다. 괴롭다. 힘이 모자라는지도 모른다.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툇마루에서 햇볕을 쬐는 듯한 생활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야시 후미코 - P170

시간의 경과란 그때그때의 감정이다.

-이즈미 교카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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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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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엘리자베스의 수많은 노동계급 주민을 끌어들이고, 또 이 항구도시에서 교회에 다니는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이질감을 느끼거나 그의 유대인 이름에 겁을 먹고 물러나지 않도록 아낌없이 외상을 주었다. 다만 물건 값의 30 내지 40 퍼센트만큼은 미리 내도록 했다. 그는 절대 외상을 확인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인 비용만 처리가 되면, 외상을 한 손님이 나중에 일주일에 몇 달러씩 갚든, 심지어 전혀 갚지 않든 진짜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외상 때문에 파산한 적은 없었다. 외려 그의 유연한 태도 덕분에 생겨난 주민의 호의는 그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 P62

유연장을 작성하는 것. 그것은 나이가 드는 것, 심지어는 아마도 죽어가는 것에서 가장 좋은 부분일 것이다. - P68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전신 마취를 원하는지 아니면 국부 마취를 원하는지 물었다. 꼭 웨이터가 레드 와인을 원하는지 아니면 화이트 와인을 원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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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7-0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브리맨 옛날 알라딘 정말 열심히 할 때 읽은 책인데,,,그때가 새삼스럽네요. ^^;;;

LAYLA 2021-07-02 00:34   좋아요 0 | URL
읽을 때 작중 화자의 자기연민에 화가 났는데 읽고 나서 며칠 간 자꾸 생각이 나네요. 역시 유명한 작가는 유명한 이유가 있나 봐요^^;; 다른 작품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제 아픈 구두는 신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지음, 오연정 옮김 / 이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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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안 좋았던 적도 있지만, 언제나 배는 어김없이 고팠다. 배고픔이 나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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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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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아키는 이미 자신을 군살로 투박해진 가문의 손가락을 찌른, 독이 든 작은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우아함을 배우고 말았기 때문이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소박, 근면하고 여유롭지 않았던 지방 무사 가문이 짧은 시간에 흥성했다. 그러나 기요아키가 성장함에 따라 그 가계에 처음으로 우아함의 한 조각이 잠입하려 한다면, 본디 우아함에 면역이 된 조정 귀족과는 달리 금세 급속한 몰락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개미가 홍수를 예지하듯 그는 느끼고 있었다. - P24

어째서 내게는 이럴 때 내 편이 되어 줄 이 하나 없을까?

양관에서 안채를 잇는 긴 복도를 열심히 달려가며 그는 생각했다. - P73

그들과 함께 하는 내내 기요아키는 몸을 떠난 그들의 혼이 대양의 한가운데를 향해 표량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오히려 유쾌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육체의 현존에 갇혀 떠다니지 않는 마음을, 그는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 P92

기요아키는 자신의 볼이 심히 뜨거웠으므로 아이처럼 사토코의 볼에도 손을 대 보고는, 똑같이 뜨겁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곳에만 여름이 있었다. - P127

미네가 이누마를 좋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누가가 자신을 원해 오면, 그녀는 그 인간의 장점을 샅샅이 알아낼 수 있었다. - P150

신카와 남작의 마음은 은과 같아서 모처럼 공들여 닦아 집을 나서도 사람들 속에 섞이면 금세 무료함이라는 녹이 슬었다. 이런 대화를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에는 녹이 슬었다... - P173

이제 젊은이가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일은 많지 않을 거야. 하지만 행위로서의 전쟁이 끝난 대신 이젠 감정의 전쟁을 치르는 시대가 시작됐어. 둔감한 놈들은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테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이 전쟁은 분명히 시작됐고, 이 전쟁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젊은이들은 틀림없이 싸우기 시작했어. 행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전장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이 전사해 간다고 생각해. - P264

어쩌면 잉 찬보다, 에메랄드 반지보다, 친구나 학교보다 두 왕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여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기요아키는 생각했다. 여름은 두 왕자들의 어떤 결핍도 메워 주고 어떤 비애도 치유해 주며, 어떠한 불행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8

물론 다데시나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터진 곳을 깁는 사람,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 자신이 이 상에 태어난 이유라 믿고 있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부단히 은혜를 베풀어 놓으면 결국에는 제뜻대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다. - P346

다데시나의 교토풍 화장은 늘 하던 것보다도 훨씬 짙어 보였다. 입술 안쪽에서 교토 연지의 검은 색이 번져 나왔고, 주름을 메운 분을 평평히 하려고 그 위에 덧바른 분은 어제 삼킨 독 때문에 거칠어진 피부에 스미지 않아 화장이 얼굴 전면에 핀 곰팡이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 P390

"이야, 정말로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었구나. 다 크고 나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야. 아저씨가 멋진 신랑을 찾아 줄 테니 걱정 마라. 뭐든지 이 아저씨한테 맡겨 주면 천하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을 소개해 주지. 아버님께는 아무 염쳐 끼치지 않고, 금란단자에다 100미터나 되는 혼수행렬을 마련해 주마. 아야쿠라가에서는 대대로 한 번도 본 적 없을 길고 긴 호사스러운 행렬을 말이다."

그때 백작 부인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백작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선조는 그렇게 모욕을 앞에 두고 웃는 대신에 우아한 권위를 드러내며 조금은 맞서곤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게마리의 전통도 끊어졌고, 속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미끼도 사라졌다. 진짜 귀족, 진짜 우아함은 그것을 조금도 상하게 할 마음 따위는 없는, 선의로 가득찬 가짜 귀족의 무의식적인 능욕에 그저 흐릿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P399

그런 이야기를 다데시나에게 털어놓은 후 백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아함의 복수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소매 옷을 차려입은 공경대부답게 소매에 밴 향 내음 같은 복수를 할 수 없을까. 소매에 덮여 가려진 향의 완만한 연소 같은, 타는 불빛도 거의 내보이지 않으며 재가 되어 가는 비밀스러운 경과 같은, 가루를 개어 굳힌 향에 한번 불을 붙이기만 하면 미묘하고 향기로운 독이 소매에 배어들어 언제까지고 머무르는 그런 복수를... - P400

면도칼은 사토코의 머리를 세밀하게 매만졌다. 어떤 때는 작은 동물의 날카롭고 얀 앞니가 깨무는 듯이, 또 어떤 때는 한가로운 초식 동물의 온순한 어금니가 저작하듯이. 머리칼이 한 뭉치씩 떨어질 때마다 사토코의 뒷머리에는 생애 처음 느껴보는 서늘함이 신속하게 스며들었다. 자신과 우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우울한 번뇌로 가득한 뜨거운 흑발이 깎여 나가자, 머리뼈 주위에는 그 누구도 손가락 하나 대 본 적 없은 차고 신선한 청정의 세계가 펼쳐졌다. 맨살갗의 면적이 늘어날수록, 박하를 바른 듯한 예리한 추위가 번져 갈수록. 머리에 냉기가 스미자 달처럼 죽은 천체의 표면이 우주의 청명한 기운에 직접 닿아 있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사토코는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마치 현세 그 자체인 것처럼 차례차례 퇴락했다. 퇴락하면서 무한히 멀어졌다. 머리카락은 누군가의 수확물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여름 햇빛을 잔뜩 머금었던 흑발은 사토코가 앉은 자리 주변으로 떨어져 갔다. ..사토코의 현세가 벗겨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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