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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카도
김혜영 지음 / 그늘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

아보카도/ 김혜영 지음/ 그늘
김혜영 작가의 <아보카도>는 서양 정물화 한점처럼 겹겹의 질감을 지닌 채 찾아왔다. 여덟 편의 단편들이 엮어낸 묵직한 결과물은 상처 입은 누군가 아니 우리가 토해낸 감정들이 그려낸 흔적이자 숨이었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별 끝 상실의 무게와 고통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펜 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 먹먹한 길을 거닐다 보면 나도 모른 채 묻어두었던 억 겹의 아픔과 슬픔이 고개를 든다. 내 것인지 김혜영 작가 것인지 소설 속 인물 것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 모두 과거 혹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누구나 이별을 겪고 상실을 마주한다. 자명한 사실을 김혜영 작가의 <아보카도>으로 미리 예습하거나 다시 복기하는 듯하다.
"억지로 참지 마.
우리는 모두 충분한 애도를 해야 해."
속수무책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순간을 밀도 있게 그려낸 김혜영 작가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참지 않아도 된다.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어 발산해야 비로소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잊을 수 없지만 충분한 애도를 해야 슬픔 너머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김혜영 작가는 상실의 오늘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내고 있다. 여덟 편의 이야기로 살펴본 삶의 면면은 촘촘히 짜여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작가가 공을 들여 기어이 틈을 만들고 성긴 사이로 흘러내리게 하였다. 걸러지고 남은 무언가를 움켜지고서야 우리도, 인물도 고개를 들어 내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 보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감춘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섬이 거기 계속 있듯이 이제 선도 모두에게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여덟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와닿았던 이야기는 <박수기정 노을>이었다. 선의 일생이, 제주의 자연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18장의 짧은 이야기가 경이로운 울림을 선사하였다. “잘 살았다. 온전히 살았다."라는 그 충만함과 위로를 느꼈다. 죽을 뻔한 선이를 20년을 품어준 제주와 가족의 앙상블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네가 어떤 상황이든 우린 변함없이 친구 맞지?
저 대추나무가 우리 집에 오게 돼서 기뻐."
<대추>는 비관 자살한 남편을 떠나보낸 후 자신이 좋아하는 사과와 남편이 좋아했던 대추를 합한 사과대추 묘목을 충동적으로 주문한 나미의 이야기다. 묘목을 심을 때가 마땅찮은 그녀는 친구 오인에게 주면서 위로받는다. 홀가분한 기분도 잠시 무례한 타인의 행동에 흔들렸던 나미가 다시금 단단히 여물어가는 결말이 좋았다.
한참 동안 뱉지 못한 씨앗 하나가 여전히 입속을 굴러다녔다.
끝부분이 날카로워 입천장을 찔러대던 그것을 왜 아직 입속에 머금고
있었을까. 나미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서둘러 그것을 뱉어냈다.
비로소 입안이 개운해졌다.
<아보카도> 단편에서는 남편을 떠나보낸 화자가 상상치 못한 연유로 남편을 잃은 또 다른 여자, 친구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만 몰두하던 나는 영은의 상처를 감지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서야 맞춰지는 퍼즐 판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소설 속 그녀들도, 우리도 매한가지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지켜야 할 아이들을 위해 단단해져야 했던 나는 아보카도 같은 영은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마주했으니 다음은 달라지기를, 둘의 진정한 연대를 기대해 본다.
오랫동안 의지했던 대상과의 이별,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또 다른 의미의 애착 인형 같은 존재였을까.
나는 우리 사이 그런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자위했다.
<자염>, <지연> 서사도 인상적이다. 부모와 자식, 세대를 이어가는 연결고리를 근간으로 풀어나가는 플롯이 돋보인다. 두 이야기 모두 ‘자염‘과 ’뼈가 자라는 병‘같은 독특한 소재들로 서로가 연결 지어지거나 벗어나고자 애쓰는 다음 세대의 오늘을 조명한다. 옆에서 지켜보다 가업 전승을 거부하는 아들(자염), 진실을 모르다 병을 계기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딸(지연), 작가는 공감 가는 필력으로 두 자식의 속내를 해체하고 있다. 혼란과 슬픔의 웅덩이 앞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궁금하다.
"작가는 계속 성장하는 직업 같아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인물을 탄생 시키고 그 인물과 함께 성장하죠.
제 뼈가 계속 자라는 건
아직 제가 다 성장하지 못한 작가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 ’지연‘ 중
의료과실로 아들을 잃은, 한 엄마의 끔찍한 복수와 슬픈 결말을 그린 <BABY IN CAR>, 아이를 간절히 원하나 실패한 후 반려견에게 위안을 얻는 아내와 그 아내에게 차마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남편의 이야기 <너의 찰스>, 다른 단편과는 상당히 다른 결로 다가온 <공가>까지 어느 이야기도 빛을 잃지 않고 제 빛깔을 뽐내었다.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된 두 여자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마치 새끼를 잃은 두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마치 한 덩어리처럼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그녀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 ‘BABY IN CAR‘ 중
소설 페이지를 넘기며 겹겹이 쌓이는 죽음, 이별, 상실, 비극, 고통, 상처가 인물들 사이로 녹아들어 가는 것을 경이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충분히 씹어서 소화시키고 싶은 소설집 <아보카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