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카도
김혜영 지음 / 그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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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카도/ 김혜영 지음/ 그늘





김혜영 작가의 <아보카도>는 서양 정물화 한점처럼 겹겹의 질감을 지닌 채 찾아왔다. 여덟 편의 단편들이 엮어낸 묵직한 결과물은 상처 입은 누군가 아니 우리가 토해낸 감정들이 그려낸 흔적이자 숨이었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별 끝 상실의 무게와 고통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펜 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 먹먹한 길을 거닐다 보면 나도 모른 채 묻어두었던 억 겹의 아픔과 슬픔이 고개를 든다. 내 것인지 김혜영 작가 것인지 소설 속 인물 것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 모두 과거 혹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누구나 이별을 겪고 상실을 마주한다. 자명한 사실을 김혜영 작가의 <아보카도>으로 미리 예습하거나 다시 복기하는 듯하다.




"억지로 참지 마.

우리는 모두 충분한 애도를 해야 해."




속수무책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순간을 밀도 있게 그려낸 김혜영 작가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참지 않아도 된다.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어 발산해야 비로소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잊을 수 없지만 충분한 애도를 해야 슬픔 너머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김혜영 작가는 상실의 오늘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내고 있다. 여덟 편의 이야기로 살펴본 삶의 면면은 촘촘히 짜여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작가가 공을 들여 기어이 틈을 만들고 성긴 사이로 흘러내리게 하였다. 걸러지고 남은 무언가를 움켜지고서야 우리도, 인물도 고개를 들어 내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 보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감춘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섬이 거기 계속 있듯이 이제 선도 모두에게 그런 의미일 것이다.

- ‘박수기정 노을’ 중




여덟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와닿았던 이야기는 <박수기정 노을>이었다. 선의 일생이, 제주의 자연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18장의 짧은 이야기가 경이로운 울림을 선사하였다. “잘 살았다. 온전히 살았다."라는 그 충만함과 위로를 느꼈다. 죽을 뻔한 선이를 20년을 품어준 제주와 가족의 앙상블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네가 어떤 상황이든 우린 변함없이 친구 맞지?

저 대추나무가 우리 집에 오게 돼서 기뻐."

- ’대추’ 중




<대추>는 비관 자살한 남편을 떠나보낸 후 자신이 좋아하는 사과와 남편이 좋아했던 대추를 합한 사과대추 묘목을 충동적으로 주문한 나미의 이야기다. 묘목을 심을 때가 마땅찮은 그녀는 친구 오인에게 주면서 위로받는다. 홀가분한 기분도 잠시 무례한 타인의 행동에 흔들렸던 나미가 다시금 단단히 여물어가는 결말이 좋았다.



한참 동안 뱉지 못한 씨앗 하나가 여전히 입속을 굴러다녔다.

끝부분이 날카로워 입천장을 찔러대던 그것을 왜 아직 입속에 머금고

있었을까. 나미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서둘러 그것을 뱉어냈다.

비로소 입안이 개운해졌다.

- ’대추’ 중



<아보카도> 단편에서는 남편을 떠나보낸 화자가 상상치 못한 연유로 남편을 잃은 또 다른 여자, 친구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만 몰두하던 나는 영은의 상처를 감지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서야 맞춰지는 퍼즐 판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소설 속 그녀들도, 우리도 매한가지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지켜야 할 아이들을 위해 단단해져야 했던 나는 아보카도 같은 영은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마주했으니 다음은 달라지기를, 둘의 진정한 연대를 기대해 본다.




오랫동안 의지했던 대상과의 이별,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또 다른 의미의 애착 인형 같은 존재였을까.

나는 우리 사이 그런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자위했다.

- ’아보카도’ 중





<자염>, <지연> 서사도 인상적이다. 부모와 자식, 세대를 이어가는 연결고리를 근간으로 풀어나가는 플롯이 돋보인다. 두 이야기 모두 ‘자염‘과 ’뼈가 자라는 병‘같은 독특한 소재들로 서로가 연결 지어지거나 벗어나고자 애쓰는 다음 세대의 오늘을 조명한다. 옆에서 지켜보다 가업 전승을 거부하는 아들(자염), 진실을 모르다 병을 계기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딸(지연), 작가는 공감 가는 필력으로 두 자식의 속내를 해체하고 있다. 혼란과 슬픔의 웅덩이 앞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궁금하다.




"작가는 계속 성장하는 직업 같아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인물을 탄생 시키고 그 인물과 함께 성장하죠.

제 뼈가 계속 자라는 건

아직 제가 다 성장하지 못한 작가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 ’지연‘ 중




의료과실로 아들을 잃은, 한 엄마의 끔찍한 복수와 슬픈 결말을 그린 <BABY IN CAR>, 아이를 간절히 원하나 실패한 후 반려견에게 위안을 얻는 아내와 그 아내에게 차마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남편의 이야기 <너의 찰스>, 다른 단편과는 상당히 다른 결로 다가온 <공가>까지 어느 이야기도 빛을 잃지 않고 제 빛깔을 뽐내었다.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된 두 여자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마치 새끼를 잃은 두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마치 한 덩어리처럼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그녀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 ‘BABY IN CAR‘ 중




소설 페이지를 넘기며 겹겹이 쌓이는 죽음, 이별, 상실, 비극, 고통, 상처가 인물들 사이로 녹아들어 가는 것을 경이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충분히 씹어서 소화시키고 싶은 소설집 <아보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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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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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장편소설/ 위즈덤하우스




누군가의 지문이 새빨간 피로 찍힌 새하얀 편지봉투가 도착했다. 500 페이지에 달하는 두터운 편지, 과연 설라리 젠틸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두근거렸다.


21세기 애거서 크리스티, 설라리 젠틸 작가. 드디어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맛본 그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다. 워낙 고전적인 플롯의 추리소설을 애정하는 독자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더욱이 액자식 구조로 촘촘히 짜인 이야기와 끝까지 팽팽하게 조여오는 긴장과 불안이 아찔한 공포를 선사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맵 룸으로 가서 우정을 싹틔우고,

나는 처음으로 살인자와 커피를 마시게 된다."




『살인 편지』는 소설 안에 또다시 소설과 현실이 그려지는, 흥미로운 액자식 구성이 강점이다. 호주의 미스터리 소설가 ‘해나‘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열성팬 ’리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해나의 ‘소설‘과 리오의 ‘편지’가 교차하면서 극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순조롭던 순환이 어느 순간 리오의 집착으로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면서 기이하고 소름 끼치게 변질되어간다.








어느 날 도서관 열람실에 있던 프레디, 케인, 윗, 마리골드는 갑자기 비명 소리를 듣게 된다. 우연히 살인사건의 관계자가 된 프레디, 케인, 윗, 마리골드는 친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작가라는 공통분모로 프레디와 케인은 친밀감을 느끼는데……. 도서관에서 들은 여자의 비명 소리가 프레디의 핸드폰에서 울려 퍼진다. 이를 시작으로 네 명은 살인 사건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 살인사건에 휘말려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을 겪으면서 끈끈했던 그들 사이에 균열이 시나브로 생기기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전개에 흔들리면서도 ‘사랑’이라는 단단하고 깊은 감정을 키워나가는 프레디와 케인 그리고 예상과는 다른 윗과 마리골드, 네 명이 주고받는 감정을 살펴나가는 여정이 이야기 몰입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만약 내가 살인자라면 내 책이나 글이

다르게 보일까요? 예를 들자면요."




해나는 소설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살인자를 추적해나가야만 한다. 어쩌면 가장 바쁜 사람은 독자일지도 모르겠다. 독자인 우리는 설라리가 제공하는 정보는 물론이고 해나가 제시하는 범인에 대한 단서와 복선을 쫓아야 하니 말이다. 사실이라 믿었던 상황이, 사람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속임수인지 혼란스럽다. 치밀하게 짜인 플롯은 의심에 의심을 더해주었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서사는 사랑, 우정, 신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의미를 찾아가죠.

발견은 독자의 몫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작가가 보여주는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작가의 도덕성은 작가가 제시하는 길을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끼친다고 봐요."







『살인 편지』 깊이 일기를 하고픈 독자를 위해 숨겨둔(?) 팁을 참고하면서 읽어나간다면 소설의 주제를 더 밀도 있게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속을 누가 알겠어요?

마음이 끌리는 대로 따라가는 거잖아요. "





미스터리 추리극의 고전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필력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보여주는 대로 혹은 보이는 대로 다 믿으면 안 되는 미심쩍은 상황에서 물어보지 않으면 답하지 않아도 수수께끼 같은 이를 끝까지 믿고 싶은 마음은 단지 사랑일까? 입체적인 인물들의 합이 소설에서 현실에서 두 살인자를 쫓는 위험천만한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의혹의 눈초리가 한곳이 아닌 인물 한 명 한 명에 이를 수 있도록 설정한 설라리 젠틸의 예리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디 “나를 조심히 열어봐주세요…….“ 당부하는, 섬뜩한 편지 한 통이 도착하는 행운을 누리기를 바란다. 정말 사람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설라리 젠틸의 작품 속은 확실히 알았다. 속히 다음 이야기를 펼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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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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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산문/ 한겨레출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을까.

오늘 그리고 내일 또 내일에는.




책을 펼치고 처음 만난 문장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금 나지막이 소리 내 읽어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싸르르 가슴이 아려온다. 읽기 전과 후, 밀려오는 감정의 결과 깊이가 사뭇 다르니 어느새 ‘루돌‘이에게 빠져들었나 보다. ‘어리고 작은‘ 개가 몸과 마음이 다부져가는 시간을 지켜보니 절로 그렇게 되더라. 그러니 정이현 작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고 기쁘고 애달플까. ’왔다’에 이어질 ‘갔다‘ 전에 그 아이의 어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 애쓰고, 오늘을 채우기 위해 다가서고, 내일을 오늘로 만나기를 바라는 정이현 작가와 루돌이의 이야기는 마음을 데워주는 온돌이 되어주었다.








인근에 하천이 흘러 저녁마다 운동 겸 산책 겸 돌곤 한다. 반려견과 보호자를 종종 만나게 된다. 목줄을 찬 개, 안 찬 개, 대형견, 소형견, 중형견, 가족 총출동, 부부, 가족(대부분 엄마) 1인 등등 분류하자면 다양하다. 예전에 비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이 확연히 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아이들은 반려동물을 간절히 원했지만, 나는 무서워하고 남편은 싫어해서 이제는 마음을 접은 상태다. 독립 후를 꿈꾸고 있다. 어렸을 때는 애견카페, 애묘 카페를 찾아 갈증을 해소시켜주곤 했다.

그래서 비슷한 성향의 정이현 작가가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덜컥 ‘어린’ 개를 입양하고 법적 보호자로 등록되어 실질상•명의상 주보호자로 자리매김해나가는 여정이 흥미로웠다. 서로 다른 종, 생면부지의 두 생명이 만나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가는 시간이 아름답고 뭉클하였다.


유기견, 동물보호소, 임시보호, 입양, 안락사.

‘늑대‘가 인간친화적인 동물인 ‘개’로 진화한 순간부터 인간과의 관계가 그들에게는 중요해졌다. 세상에는 행복한 개와 행복하지 않은 개가 있다는 저자의 표현처럼 인간의 보살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개는 행복하지 않다. 개의 순수한 눈망울과 활기차게 흔들리는 꼬리를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건만 악의를 내뿜는 사람들이 있어 가슴이 저리다.





정이현 작가는 어린 개와의 만남으로 달라지고 풍성해진 영역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개가 아닌 ‘루돌’이가 알려준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수고와 기쁨을 전하고 있다. 개에 관심이 없던 자신이 입양한 개를 주보호자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겪은 일상적인 개인 이야기뿐 아니라 개로 연결된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상황에 대한 사회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반려견 용품을 공동 구매하는 펫플루언서, 동물 친화적인 마케팅을 하지만 제한이 있는 편의시설 등 ’상업적‘ 이용 혹은 활동에 대한 고민이 이 책과 맞물려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정이현 작가가 ‘어린 개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모르는지도 몰랐을 것들‘에 대하여 쓴 이 산문 덕분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쓸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떤 몰이해는 경험의 결핍에서 나온다‘는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힌다. 이토록 친밀하고 밀도 높은 유대감을 나누는 정이현 작가와 루돌이가 부러울 지경이다. 주저 없이 자신을 ’엄마‘라 부르며 아무 조건 없이 어떤 이유 없이 서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사이. 그 순수함이 아름답다.








’자유‘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작가의 변화가 놀랍다. 이제는 루돌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는 루돌이가 자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원하는 인생의 결을 유연하게 변하게 하는 이 다정한 존재는 압도적인 기쁨과 어렴풋한 슬픔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어린‘ 개가 온 이후, 삶은 달라졌다. 그 충만함에 자꾸 눈물이 나고 자꾸 미소가 지어지니 신기하다.








한겨레 하니포터10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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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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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웃을 일 없이 산 이가 어찌하여

저토록 맑게 웃을 수 있을까,

한 겨울 눈꽃처럼 새하얗게."


탁영/ 장다혜/ 북레시피





책을 읽다 보면 유독 떠나보내기 힘겨운 인물들이 있다. 장다혜 작가의 신작 [탁영] 속 백섬이 그렇다. 역병에 부모 잃고 매골승에게 의탁하게 된 다섯 살 때부터 수어의 최승렬 대감의 구곡재에서 구계로 살아가게 된 열 여덟 살까지 그는 참으로 기구하고 박복한, 짧디짧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원망과 분노 대신 향기로운 꽃을 품고 정갈히 사는 게 중하다 여기는 이였다. 본디 영혼이 결곡하고 영롱하였으리라. 그에게 행해진 악행을 활자로 읽는 이조차 마음이 먹먹해 목이 메고 눈시울이 시큰거려 읽기가 버거웠건만 백섬은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했다.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희제와의 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시대극을 좋아하고 서스펜스를 즐기는 이라면 ‘장다혜’ 이름 석 자를 새겨야 할 듯. [탄금] - [이날치, 파란만장]에 이어 [탁영]까지 작품 모두 흔들림 없는 필력과 눈을 뗄 수 없는 서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신분과 성별의 벽 그리고 재력과 권력을 쫓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캐릭터의 폭주로 참혹한 파국에 이르게 되는 흐름에서도 주인공들은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절절한 그 마음에 손을 모아 간절히 힘을 보태게 된다.

조선시대를 동경하는 장다혜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전부 조선시대다. 비록 양반, 중인, 천민 등 신분의 차이가 분명한 시대라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한 사람, 정인에게 끌리는 것은 하늘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 어이 막을 수 있으랴. 금와당 주인 희제는 속수무책으로 종 백섬에게 이끌리고 만다. 마음 주는 이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 허한 마음에, 누구에게도 다시는 주지 않겠다 다짐했던 마음에 불씨를 지펴 다정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풍요는 우리네 생활을 윤택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결핍은 우리네 정신을 윤택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누리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이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이는 삶에 대한 고찰과 열정으로 이어진다. 백섬은 벗 한번 사귀지 못해본 피폐한 삶, 피가 아닌 마음씨와 성정이 닮은 누이 막단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퍽퍽한 삶 속에서도 온기를 꺼트리지 않고 품고 살아왔다. 그를 만나 금박장 희제는 비로소 삶을 달리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림을 만나 마음을 열고 사귀어 ‘벗’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 이르기를 소설 [탁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서로에 대한 지극하고 진지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쌓여 비밀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진정 듬직한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런 벗을 만나는 일은 백섬이, 희제가, 칼두령 마도진이, 익위 방호가, 복순 어멈 원영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게 만들었다. 팔딱거리는 심장처럼 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가 마음이 머물러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다.





서늘하고 탐욕스러운 권력 투쟁의 장에서 우정과 연모와 사랑 그리고 정을 나누는, 선한 이들이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사력을 다하는 여정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측과 왜곡하려는 측의 쫓고 쫓기는 싸움,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인물들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져 흡입력을 한층 더 높여준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인생사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이 가져온 고통을 감내하며 기꺼이 바로잡고자 애쓰는 아름다운 사림들의 분투기에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애통한 탄식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제목이 ‘탁영’이라 슬픈 결말을 예상했지만, 너무나 비극적이다. 꽃그늘을 바라는, 의미 없이 살고자 한다는 그를 보내기가 참으로 아리다.



사회에서 정한 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과 갈고닦은 심성으로 곁을 내어주고픈 벗을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고운 이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여기 있다! [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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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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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청예 장편소설/ 창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은 우리의 무지를 크게 꾸짖는 듯 강력하고 묵직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찬란한 빛 아래 티탄처럼 거대해진 자연 생태계를 마주한 신인류 네오인 두 종족의 생존기가 처절하게 전개된다.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채 태어난 두 종족, 미미족과 두두족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살아갔다. 하지만 반복된 여름은 두두족과 미미족의 차이를 심화시켰고 끝내 갈라놓았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행성의 자연과 상관없이 쾌적한 실내에서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는 두두족은 그 에너지를 자연재해로부터 채집하는 임무를 미미족에게 부여하고 식량을 제공하였다. 강인한 체력으로 농경과 노동을 담당했던 미미족은 두두족이 과학기술을 공유하지 않아 원시적인 움집과 두두족이 허가하는 도구만을 사용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관계 또한 고대 선조의 예언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고대 선조가 남긴 ‘두 가지 흔적’을 찾기 위해 신인류 네오인 중 유일한 해독가인 ‘이록’과 미미족의 족장인 ‘주홍’은 콜로나 시찰을 나간다. 일억 번째 여름이 절대 오지 않기를 염원하며.


주홍과 이록, 일록과 연두, 백금과 주홍.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 이들은 절실해졌다. 용감하고 가여운 영혼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희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주홍과 두두족 족장 아버지와 미미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대 언어 해독을 할 수 있냐 없느냐로 그 운명이 결정된 이복형제 일록과 이록 그리고 채집자로 선택된 백금과 연두 모두 ‘쓰임’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들은 다음 세대인 자녀들에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 애쓴다. 살아남기 위해 절박한 아이들에게 사는 기쁨을,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전하고자 했다. 진정 살아있다! 소박한 하루가 반복되도록 내버려두어 감각하며 안 심심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어른의 바람은 건조한 세상에 부는 한줄기 바람처럼 아이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밤을 겪어보지 못한 낮의 시간이 삶의 전부인 등장인물들에게 어둠꽃, 행성의 뒤통수 구역인 어둠의 세계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예언 속 종말의 상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미미족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고단한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그 먹먹한 여정 끝에야 비로소 구인류가 신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청예 작가가 글 곳곳에 심어둔 단서들이 의미가 되어 튀어나왔다. 검은 폭포, 에너지의 정수, 궁극의 원천, 멸망, 멸족 그리고 정체불명의 도형들. 고대 선조의 예언처럼 선량한 지혜가 깃든 종족에게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낡은 한 종족의 멸망‘은 사랑과 욕심이 한자리에서 움터 분간할 수 없게 된 이기적인 종족의 멸망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보완하니까."




“우리는 중간값의 산물이니 그 자체로 완벽하단다. 차이 속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찾으라”는 이록의 어머니 말처럼 결핍되어 있기에 완벽해진다. 같이 있어 비로소 완벽해지는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활짝 피어나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연쇄적인 사랑과 희생, 그 빛이 지금의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힘 있게 반짝거리고 있다. 일억 번째 여름이 지나고서야 새로운 시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이들의 간절함이 우리를 들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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