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퍼스 고스트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5월
평점 :
비말 감염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안정화를 찾아가는 시기에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페퍼스 고스트》는 '비말 감염'을 통해 타인의 미래를 보는 주인공이 테러사건을 저지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린 미스터리 소설이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초능력
일명 '선공개 영상'
비말 감염된 타인의 다음 날 체험할 일부 장면을 영화의 예고편처럼 본다.
인간은 똑같은 인생을 영원히 반복할 뿐이다. 요컨대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나 곤경에 빠진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위기를 극복하더라도, 언젠가 또 같은 꼴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막막할뿐더러 헛수고한 느낌이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뭘 어찌해도 소용없다. 다 때려치워라.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허무주의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106
《페퍼스 고스트》는 인간은 똑같은 인생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바탕으로 크게 세 가지의 굵직한 사회적 이슈를 베테랑 작가의 필력으로 맛깔나게 버무렸다. 카페 테러 유가족 모임인 '동우회'의 폭탄 테러, 비말 감염을 통한 초능력의 발현 그리고 소설 속의 또 다른 소설의 고양이를 학대한 사람을 응징하는 '고지모 사냥꾼'이야기가 교차하다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재미가 극대화된다.
다이아몬드 카페 테러사건으로 절망의 낭떠러지에 선 이들이 만나 결심한다. 그들의 세계를 끝장내기로. 소설이기에 너무 딱딱 들어맞는 우연들이지만, '마치 소설 속 세계 라면 몇 번을 읽든, 어디서부터 읽든 일어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야말로 영원히 똑같은 스토리 속을 살아가는 셈이다.'라며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해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단과 학부형의 만남은 우연 아닌 필연이었다. 얼마 후 학부형의 실종으로 단과 동우회가 만나게 되고, 고지모 사냥꾼들이 사람을 찾다 우연히 단을 만나면서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착실하게 살아온 결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독과 허망함이었어.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327
사건을 이어나가는 중학교 국어 교사 단은 아버지로부터 '비말 감염' 초능력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미래를 미리 알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공상에도 미래가 보이는 건 의외로 고통스럽다는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의 경우, 영상의 등장인물이 일면식도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충고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무력감이 쌓여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되도록 담아두지 말고 잊어버리도록 노력할 뿐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단은 자신의 영상에서 본 테러 사건을 막기 위해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위험을 자처하며 이타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눈길이 간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참담함을 겪었을 때,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인생에 허무함을 느끼며 살아갈지라도,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영혼을 뒤흔들만한 행복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사카 고타로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선공개 영상'을 봄으로써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회귀 사상에 갇혀있기보다 한계를 뛰어넘어 고차원적인 인간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니체의 초인 사상이 녹아있었다.
인생을 살며 영혼이 떨릴 만한 행복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그 때문만이라도 영원한 인생이 필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말이죠.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요.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332
이사카 고타로는 30년 만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었다며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쏙쏙 들어왔다고 한다. 《페퍼스 고스트》에 영원회귀 사상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초반부에는 고사모 집단의 과격한 횡포가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고양이 학대가 일본에서 굉장히 큰 이슈였음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말도 안 되게 대갚음해 주는 모습 역시 인과응보겠지?싶었으나, 홀연히 사라지는 장치로 설정한 것 역시 그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디 망각의 동물이라 누군가가 처한 아픔을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물론 자기 삶을 살아가기도 벅차 타인의 아픔에 마음을 쓰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담담하게 전한다.
나를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첫 발을 담게 한 작품이 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였다. 그의 작품을 10여 년 만에 다시 읽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중반부 소설 속의 소설이 현재 시점과 합쳐져 허상과 현실의 모호함 속에서 미래의 선을 향해 하나씩 발 맞춰지는 스토리라인이 과연 대작가 답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초능력의 발현이 '비말 감염'이라는 독특한 전개는 물론이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에 불쑥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등 트릭을 사용해 관객 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연극의 무대 장치 기법 '페퍼스 고스트'를 절묘하게 녹여내며 제목의 이유를 끄덕이게 하는 천재 작가의 매력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페퍼스 고스트》는 시사성, 고발성, 작품성, 오락성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올여름 펼쳐 보시기를 추천한다.
책장을 덮고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책장의 철학서 코너를 보니, 니체의 책이 제법 보인다. 언젠가 니체의 책들을 쌓아놓고 다시 니체에 빠져봐야지...
무튼, 매일매일을 기쁨으로 채우며 살기로!
이 세계의 비애는 깊다.
기쁨은 깊은 고뇌보다 더 깊다.
비애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을 소망한다.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