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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피베리
곤도 후미에 지음, 윤선해 옮김 / 황소자리(Taurus) / 2023년 7월
평점 :
출간 즉시 베스트 셀러에 오르며 일년 만에 10만 부를 돌파한 곤도 후미에의 장편소설 《호텔 피베리》는 평온함 아래 숨어있는 불안을 섬세하게 묘사해 단숨에 읽힌다.
피베리,
열매 안에 쓸쓸하게
혼자 잠들어 있는 희귀한 콩.
그 안에서 우리는
나 홀로 외로이 잠들어 있었다.
곤도 후미에, 호텔 피베리 中 p.228
하와이의 한적한 섬 힐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호텔 피베리》는 여느 호텔과는 조금 다르다.
최대 3개월까지 머무를 수 있는 단 6개의 객실과
한 번 투숙한 손님은 다시 방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구나 딱 한 번만 묵을 수 있는 이곳의 하루하루는 평온함의 연속이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어느 날 호텔에 홀로 있던 가모우가 호텔 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가모우 사건 이후 호텔을 떠난 아오야기 마저 사흘 후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다. 연이은 사망 사건으로 기자키의 마음에는 의혹이 일었다. "이 호텔 손님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가모우의 말이 쉬이 잊히지 않고, 평온할 것 같았던 힐로 피베리호텔은 어두운 공기가 짓누르게 되는데...
하와이 섬에는 11개의 기후대가 공존한다는 여주인 가즈미의 말은, 방문객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호텔의 특성상 평온할 것 같은 작고 아름다운 호텔 피베리도 다른 얼굴을 보일 수 있다는 복선처럼 느껴졌다.
호텔 피베리의 투숙객 다섯 명은 각자의 사연들이 지니고 있었다. 여제자와의 스캔들로 퇴사를 한 기자키. 약혼남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3개월 장기 여행을 떠나온 구와시마, 소설을 쓰려고 왔지만 서핑만 하는 사키모리까지 자신의 민낯을 감추고 있었지만, 산자의 진실은 수면 위로 밝혀진다. 별을 보러 섬에 왔다는 아오야기의 진실과 망자 가모우의 베일에 싸인 채.
《호텔 피베리》는 의문의 두 사건과 함께 가즈미에 대한 기자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으로 서사를 이어간다. 끝을 알기에 편하게 접근했으나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관계. 기자키는 가즈미의 갑작스러운 호텔 운영 중단 선언으로 더 이상 피베리 호텔에 머무를 수 없게 되지만, 사건은 뜻밖의 진전으로 급물살을 타 베일에 싸였던 가모우의 정체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누구나 딱 한 번만 묵을 수 있는 《피베리 호텔》은 평온함의 상징이었지만, 예측불허한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곤도 후미에의 안정된 심리 묘사는 소설의 중심을 잘 잡아준다. 그리고 완벽한 범죄는 없음을. 비밀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피베리 커피를 맛보고 싶어 지는 소설, 《피베리 호텔》
단숨에 읽어내려갈 너무 무겁지 않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싶다면 추천한다.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도 11개의 기후대를 품고 살아가듯,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일들과 감정을 품고 살아가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닮았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이라서 시련을 겪고 번뇌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도 우리 이상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 역시 우리처럼 피조물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첫 해외여행지를 하와이로 선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장기 여행으로. 비록 친구의 권유로 택한 여행이었지만,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은 주인공의 심리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은 낯선 땅에서의 일탈과 또 다른 사건사고. 역시나 홀로 떠나는 여행은 매력적이라기 보다 위험하다는 결론으로 귀결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같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한들, 이제 와 알 수 있는 것은 드러난 것들의 일부일 뿐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짤막한 인생 줄거리를 듣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곤도 후미에, 호텔 피베리 中 p.118
내 인생 같구나. 중요한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그 중요한 것마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인생
곤도 후미에, 호텔 피베리 中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