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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평점 :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작가,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마르크 레비의 신작 소설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은 손에 쥐는 순간 책장을 덮기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운명이니, 가야 할 길로 인도해 준다는 작은 신호니 그런 걸 믿지 않았어. 점쟁이의 말이나 미래를 점치는 타로도 믿지 않았고. 난 단순한 우연의 일치, 그 우연의 진실을 믿거든.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中 p.9
1950년대 런던과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은 한 번 맡은 향은 잊지 않는 조향사 앨리스의 역사를 찾아가는 러브 스토리다.
앨리스에게는 금요일 저녁마다 홈 파티를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고독에 사무쳐 잠 못 이루는 나날을 살아간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친구들과 떠난 여행에서 점쟁이의 예언은 악몽을 심해진다.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래전부터 네가 찾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방금 전에 바로 네 뒤를 지나갔어." p.31
까칠한 앞집 남자 달드리 씨는 이를 듣고 앨리스를 데리고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고, 둘은 크리스마스이브를 같이 보내면서 달드리 씨는 앨리스의 삶에 훅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받게 된 달드리씨는 '앨리스의 운명의 남자'를 찾기 위한 튀르키예 여행을 추진하며 전폭 지원하고 나서는데...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마르크 레비는 튀르키예로 배경을 바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을 다룬다.
영국인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앨리스가 달드리와 튀르키에로 떠나 잊고 있던 자신의 역사를 찾던 중 자신의 진짜 부모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이유로 참담하게 죽었다는 슬픈 현실을 조우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완성되지 않는 퍼즐처럼 무언가의 고독에 쌓여있던 앨리스가 동생이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앨리스가 유모를 통해 동생 라파엘의 존재를 듣고 보석 같은 선물인 동생을 찾게 된다. 이로써 그녀는 악몽과 영원한 아픔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친근하지 않던 이웃사촌에서 런던, 오스트리아 빈,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달드리와 앨리스의 꽁냥꽁냥하는 애정라인을 시작으로
장거리 여행을 함께 가고, 편지를 나누는 우정까지.
조향사로서의 능력을 키워가며 '이스탄불' 시그니처 향을 만들어 내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앨리스와 교차로를 그리는 화가 달드리의 우정 같은 러브스토리는 한 폭의 영화 같다. 머지않아 영화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사실 여행경비를 대주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 달드리의 마음은 비즈니스 관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속이 보이는데, 앨리스는 진. 짜.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지만. 원래 '연애라는 게 그런 거지 뭐' 싶다. 옆에서 보면 다 보이는데,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거니 말이다.
예전에 아나톨리아 지역을 여행하며 핍박받던 기독교인들의 삶이 애처롭게 다가왔었는데, 오스만제국의 민낯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은 동서양이 만나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 성소피아 성당, 그랜드 바자 등 튀르키예의 아름다운 전경 뒤에 자리한 슬픈 역사를 바라보게 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무튼, 프랑스인들이 빅토르 위고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작가 1위로 꼽히는 마르크 레비는 우리에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삶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미래는 나의 선택에 의해 달라진다고.
지금 나의 모습은 내가 지금껏 선택해 온 결과이듯, 앞으로의 미래 역시 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는 내가 되기를 바라며.
달드리 씨와 앨리스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소설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호불호 없이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소설책으로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추천합니다.
※ 다만, 자기 전 읽는 책으로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계속 읽게 되는 부작용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휴일이나 최소 2시간 이상의 시간이 있을 때 펼치시기를. 그만큼 재밌답니다.
넌 고독에 사무쳐 있어. 넌 대단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걸 너무 두려워해.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종속된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니까. p.102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꺾어버리고 안전한 곳에서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온실 안에 가둬버리는 것임을. 시간이 흘러 그 아름다움이 시들면 남자들은 다른 꽃을 꺾으러 떠나죠. 그래서 나는 다짐했어요. 어느 날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 꽃을 절대 꺾지 않고 지켜주겠다고. p.265
후각적 기억만이 유일하게 절대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은 세월이 흐르면 지워지고 목소리도 잊히지만, 냄새만은 아니에요. 절대로. p.294
첫눈에 반하는 사랑,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일이지. 현실에서 감정이란 건 서서히 쌓이는 거야.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천천히.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