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실려있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읽지 않으신 분들은 아래 글을 건너뛰어도 좋겠습니다.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 실려있는 <세상의 모든 바다>의 설정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편안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저 우연하게 만나 열정을 가진 학생에게 뭔가를 보답이라도 해야겠어서 건넨 한 마디가 초래한 결과가 감당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 문장은 관조하는 듯 보이지만, 마음은 매우 편치 않았을 것 같아요. (이런 반응도 소시오패스들은 다르게 느낄까요?)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초래한 어떤 결과가, 적극적을 한 건 아니나 호의에서 한 행동이 낳은 결과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 고등학교 써클 입부 시 이런 식으로 상황을 던지고 답을 하라고 한다고 해서, 아예 아무데도 가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을 던지는지 그리고 이런 대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현실에서 행동을 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다시 읽러봐야겠습니다만, 이 소설은 개인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좋아하는 소설들은 작가들의 생각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집이 불편했던 이유를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혹은 멋있지 않더라도 그가 내린 선택과 그 과정을 통해 공감을 해보려는 것이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갖는 시간들입니다. ‘아,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구나’,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최근에 새로 읽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선릉산책»은 언론에 나왔던 평만큼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오늘에서야 왜 그랬는지 알게 됐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관찰을 통해 묘사되는 글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 두 권에서는 아직 그런 지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