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어드벤처 4 :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아트 어드벤처 서양 편 4
정나영 글, 김강호 그림 / 상상의집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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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음악회는 잘 안 갔지만 전시회는 가능하면 데리고 다녔다. 책에서 보는 그림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 미술관에 가서 직접 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전시회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열심히 보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끌고 다녔다. 그림에 별 관심 없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끌려' 다녔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그토록 투덜거리며 따라다니던 큰아이가 전시회 다녔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땐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웬일이냐고 했더니 그땐 철이 없었다나.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다니길 잘했다고 이야기하니 다행이다. 그러면서 모네의 '수련' 그림을 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책에 그림의 사이즈가 나온다 해도 우리가 보는 건 어쨌든 책 사이즈를 넘을 수 없는데 한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을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을 나도 고스란히 기억하는 바다. 이처럼 직접 보았을 때 느낌이 살아 움직이는 법인데, 만약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직접 본다면 훨씬 더 충격 받지 않을까 싶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지만 정작 누군가가 내게 그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못하겠다. 마치 고전의 제목을 이야기하면 작가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지만 정작 그 책은 읽지 않았던 것처럼 작품 이름은 말할 수 있지만 화가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책은 읽었는데 미켈란젤로는 워낙 유명하니까 당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읽을 생각을 안 했나보다.

 

   <천지창조>가 서서히 사라지자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루리와 수호가 과거로 돌아가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를 이루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각 장이 끝나는 부분의 정보 페이지에 있다. 설정 자체가 황당해서 어른들이야 만화는 잘 안 보려고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그 부분도 궁금해서 샅샅이 읽게 된다. 일반 책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만화책을 엄청 빨리 보던데 이상하게 나는 만화책 읽는 속도가 더 느리다. 여하튼 만화 부분에서는 아주 약간의 정보만 취하면 되고 진짜는 정보 페이지다. 부디 아이들도 정보 페이지를 읽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언제 시스티나 성당을 직접 가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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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 고장 났어요! 튼튼곰 3
이수영 글.그림 / 책읽는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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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약간의 지장이 있긴 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끊길' 잘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부터 텔레비전을 안 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집은 남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척 조용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렇긴 하지만.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과감히 텔레비전 전원을 끄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학교에서도 저학년 아이들이 밤늦게 끝나는 드라마 이야기 하는 걸 보면 그닥 좋아보이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사실 자체도 그렇고, 결코 어린 아이들이 볼만한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부모들이 좀 자제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뭐, 내용이야 너무 뻔하고 결론도 처음부터 예측 가능하지만 민수네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 보며 자기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특히 텔레비전을 무지 좋아해서 아침에 늦잠 자는 모습이나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만 쳐다보는 모습이라던가 밥 먹으면서도 가족의 얼굴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그림을 보며 반성할 필요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도 예전에는 밥 먹을 때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었는데 요즘은 가끔 그런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더라도 말이다. 우리집은 거실에 텔레비전이 들어앉을 공간이 없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모니터는 너무 작으니까. 대신 간혹 다같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며 먹고 싶을 때는 상을 들고 방으로 간다. 아주 가끔.

 

  리모컨 때문에 싸우다 텔레비전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휴일을 텔레비전 없이 보내게 된 민수네는 처음에 공황상태에 빠지지만 차츰 일거리를 찾는다. 볕이 좋아 이불 빨래를 다 함께 하고 모처럼 아들과 놀아주는 좋은 아빠가 된다. 달리의 늘어진 시계가 있는 사막이었다가 차츰 뛰어노는 숲 속으로 변하는 그림만 봐도 민수네 가족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거실에 텐트 치고 그림책도 읽어주는 멋진 시간을 보내니 민수가 텔레비전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집이 이처럼 변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가정은 그렇질 못하다는 것이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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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미술가 - Art in Nature
김해심.존 K. 그란데 지음 / 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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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예술작품이란 특정한 공간에 설치되거나 전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시, 조각품만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앗'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이런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내지는 이것도 예술작품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만한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설치미술을 보고 재미있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지 자연에 속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건물이나 공원에 설치된 작품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언덕에, 산속에 설치한 작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음, 가만 생각해 보니 간혹 어떤 사람이 혼자서 산속에 돌탑을 쌓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처럼 전문적인 미술가는 아니었기에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나 보다.

 

  왜 우리는, 아니 나는 공원이나 야외 미술관, 혹은 건물 주변에 있는 것들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 속에 있는 건 작품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솔직히 브루니가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배를 만들었다는 '승선'이라는 작품은 설명을 보니까 작품인 줄 알지 사전 정보없이 그곳을 간다면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니와 바바리의 공동작품인 '개울 길'을 보면 무척 부럽다. 그처럼 개울을 정비하는데도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그들의 문화가. 우리 같으면 예술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포클레인과 레미콘을 불렀을 텐데.

 

  자연에 있는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최대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순응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웠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이다. 산에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뭔가가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설명하는 누군가도 없다면 말이다. 사진으로 봐도 글쓴이가 설명하지 않으면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거나 어떤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는 작품도 많았다. 역시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구나. 암튼 공원에 작품을 설치해도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지구미술가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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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우 이야기 동화 보물창고 51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전하림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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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정에서 한 달간 지낸 적이 있다. 큰아이가 네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함께 곰돌이 푸우를 많이 봤다. 지금도 '곰돌이 푸우'하면 떠오르는 것이 낭랑하면서 마음씨 착해 보이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목소리와 어리숙해 보이지만 친근한 푸우 목소리와 푸우가 노래하는 모습이다. 거기에 더해 10월의 한적하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이 함께 떠오른다. 그것은 당시 시골에서 지냈기 때문에 떠오르는 영상이다. 만약 곰돌이 푸 비디오를 그냥 아파트에서 봤다면 지금처럼 그런 아련한 향수로 기억나진 않을 것 같다. 그 후로 둘째가 컸을 때도 푸우를 많이 봤던지 곰돌이 푸우가 기억나는지 물어보니 당연하단다. 그러면서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아직도 어딘가에 인형도 있을 것이다.

 

  비록 원래의 곰돌이 푸우가 내가 지금 기억하는 푸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곰돌이 푸우가 무지 좋다. 꿀을 따 먹기 위해 노래하며 나무 위를 오르다가 결국 덤불로 떨어지던 모습, 로빈에게 우산을 가지고 와서 비가 오는 것처럼 벌을 속여달라고 부탁하는 모습 등 여러 내용들이 영상으로 떠오른다. 만약 영상으로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그러면 순수하게 내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등장인물들을 재창조했겠지. 하지만 영상으로 접했기 때문에 다른 장면들을 더 쉽게 기억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추억을 떠올리는 좋은 시간이었다.

 

  비디오를 보면서도 푸우의 재치와 유머 때문에 웃었지만 책으로 읽으니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특히 푸푸우가 토끼네 집에 가서 꿀을 너무 많이 먹어 문에 낀 이야기, 어찌나 재미있는지 혼자 깔깔대며 웃었다. 뭐, 문에 끼인 장면이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푸우가 토끼에게 안에 누가 있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재미있다. 어른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는 대화지만 어른이 읽어도 무척 재미있는 대화다. 분명 객관적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재치와 유머, 위트(같은 뜻의 단어를 반복해서라도 이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을 못 찾겠다.)가 잔뜩 느껴지니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먹는 것 앞에서는 모든 것이 리셋되는 푸우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다른 인물이라면 너무 자제심이 없다느니 돼지 같다느니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푸우는 그마저도 귀엽다. 친구에게 꿀단지를 선물하기 위해 들고 가다가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깜빡 잊고 꿀을 다 먹질 않나, 친구 집에 가서도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만 찾는 푸우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친구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푸우가 전혀 밉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사랑스럽다. 어디 푸우 뿐인가. 모든 친구들이 그렇다.

 

  앞 부분에서 푸우는 항상 거꾸로 쿵쿵대며 걷는다기에 왜 그러나 의아(비디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했는데 마지막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로빈이 푸우의 다리를 잡고 계단 올라가는 장면을 떠올리니 어찌나 웃기고 귀엽던지. 그걸 또 '로빈이 푸우를 거꾸로 들고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크리스토퍼 로빈 뒤로 푸우가 계단 올라가는 소리를.'이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재치라니. 곳곳에 이런 재치가 있어서, 책 읽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실 웃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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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덩 덩 둥덩 가야금 소리 들어 볼래? - 가야금 명인 황병기 우리 인물 이야기 28
송재찬 지음, 이윤희 그림 / 우리교육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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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것이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것이 변하는 게 아니라 예전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거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어렸을 때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맥락에서 설명하자면 국악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국악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내 경험해 비춰봐도 학창시절에 들었던 가요나 팝송을 지금 들으면 아련한 향수까지 합쳐져서 더 감미롭게 들리지만 판소리를 지금 듣는다고 해서 무척 좋다거나 하진 않는다. 물론 요즘에는 국악도 현대에 맞춰서 만들기 때문에 예전의 그런 것과는 다르지만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 국악을 제대로 접해주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솔직히 말해서 해금 연주곡은 간혹 들었지만 가야금 연주는, 우연히 들은 적은 있어도 적극적으로 찾아 듣지는 않았다. 주변에 가야금이 좋아서 배우는 어른도 있고 가야금을 매일 연주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는 지인의 딸도 있다지만 여전히 내게는 먼 이야기다. 마음으로는 우리 악기니까 사라지는 걸 바라지 않지만 그 주체가 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가야금이 어떤 악기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헌데 이 책을 읽어보니 가야금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병기라는 인물이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때 그것을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 애쓰고 무엇보다 악보로 옮겨 적어서 다른 사람들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만들었다니 그 분야에서는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악보가 없이 스승으로부터 연주를 듣고 외워서 배울 수밖에 없었단다. 게다가 정악과 산조가 엄격히 구분되어 정악하는 사람들은 산조하는 사람들을 경시하기까지 했단다. 황병기가 처음으로 정악과 산조를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하니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음악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황병기'라는 사람이 있어 세계적으로 가야금을 알릴 수 있고,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가야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꾸준하게 이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는데 정말 다행이다. 황병기라는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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