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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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특별한 종교가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 그러나 간혹 어떤 종교든 의지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하지만 워낙 선천적으로 무조건 믿는 것을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게을러서 믿음을 실천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은 서지 않는다. 주변에는 기독교를 믿는 친구도 있고 불교를 믿는 친구도 있으며 카톨릭을 믿는 친구도 있다. 다만 아직 이슬람을 믿는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과 대화할 때 종교가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거나 의견차이를 보인 기억은 없다. 어쩌면 대화에서 종교에 관한 문제는 배제했기 때문에, 애당초에 문제거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남의 종교를 최대한 존중해 주려 노력한다. 왜냐, 나와 별 상관이 없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내가 철썩같이 믿는 종교가 비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저자는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논조를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굳이 '생각이 든다'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박식하고 유명한 사람의 의견을, 그리고 저작을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일개의 독자가 어떻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나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쩌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미리 만들어 놓는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미 언론이 선정한 100인의 지식인 가운데 5위에 손꼽히는 사람답게 다양한 인물들을 인용하고 그보다 더 다양한 많은 서적들을 인용한 '덕분에' 그 중 읽어본 것이 별로 없는 나는 나의 무지를 개탄하며 읽어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

그러잖아도 요즘 종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슬람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도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라고 비판하는데도 정작 그 신도들은 우상처럼 떠받드는 모습을 보며 종교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래서 더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의견에 진작부터 동의하고 있던 차였고. 그 어떤 종교도 순수하다거나 절대적이라거나 위대하다는 환상을 버린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아마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조차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극히 일부 아닐까. 다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자신의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다기 보다 종교의 원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서부터 사람들로 확대한다. 예수에 대한 논쟁이나 모하메드에 대한 논쟁 등은 이미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해당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파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카톨릭이나 기독교에 대한 집단적인 광기나 횡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는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독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종교든 그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읽는다면 반응이 어떨까 자못 궁금하다. 저자가 재치 있고 대단한 은유를 씀으로써 웃음짓게 만드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간혹 매끄럽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재치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미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쓴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아마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식이 너무 협소한 내게는, 그리고 종교에 대해 두루 알지도 못하는 내게는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저자를 탓할 게 아니라 나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는 점,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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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 고정관념 Q 9
폴 발타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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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에 구독하던 주간지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읽을 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고 왜 그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저 안개 낀 숲속을 걸어가듯 답답한 느낌만 들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비록 내용은 기억이 안 날지라도)그런 기사가 났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걸 보면 꽤나 인상에 남았었나 보다. 당시는 지금처럼 다방면의 책을 읽지 않고 그저 한쪽에만 빠져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문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 그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못하겠기에 약간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활자화된 문자를 읽은 것일 뿐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막연히 얻은 결론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며 명쾌한 해결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부터 살펴봐야겠다. 처음 유대인에 대해 접하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치에 의한 학살을 당해야했던 불우한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는지를 알기 이전에 그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설움을 많이 받았듯 그들도 그랬겠구나라는 일종의 동병상련이랄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교육방법에 관심이 갔다. 아마도 그 시기는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어떻게하면 아이를 똑똑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키울까 고민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과연 그들의 그런 육아방법이 우리가 무작정 따라할 정도로 올바른 것일까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는 유대인들이 주변 국가들에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며 아무리 훌륭한 육아를 하더라도 남을 짓밟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취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교육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예전에 핍박을 받았다고 지금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이 얕은 내가 보기에 지금 그들(유대인들)의 행동은 그에 버금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거대 권력 미국을 등에 업고 내지는 그들의 뒤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나치에게 그러한 학대를 당했는지는 몰랐다. 땅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난히 뒷전으로 밀려났던 지역이 있다. 특별히 어떤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한편에선 조선시대 때 유배지로 선택될 정도로 소외되었고 그런 탓에 오히려 능력있고 유능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가 그 지역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나마 여러 방면에서 발전이 되었다. 실제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격차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유없이 학대를 당했을까. 물론 독일이라는 나라는 유난히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해서 자신들의 혈통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단지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미 유럽의 많은 나라는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고 정신적 토대였던 카톨릭을 이해한 뒤에야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 없는 선입견에 의거한 것이고 논리적 근거도 없는 것이라지만 이미 굳어진 '믿음'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었다. 단지 예수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긴 것이 유대인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 때문이란다. 예수도 유대인이었건만 그들에게 그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핍박에 대해 가해자가 사과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오늘날 이렇게 해법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유럽인들이 사과의 뜻에서 체결한 조약은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을 혼돈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과 아랍 지역, 그리고 나아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본의 아니게 말려들었다. 왜 그들은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제 다시 분쟁의 불씨를 제공하는가. 그러나 더욱 답답한 것은 그들만을 탓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기에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지난한 삶에 동정이 일고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잘 되길 바란다. 그러나 반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또 그들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되고 얼마나 기가 막힐지 공감이 간다. 그러나 현실은 단순히 이해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한 내 생각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았었더라도 지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행동은 합리화될 수 없다고 본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에 만족하지 않고 점점 더 욕심을 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영토를 획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그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흔히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종교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그 종교 문제란 바로 카톨릭,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의 종교와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아랍인들의 종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종교가 우월하고 훨씬 인간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여진 의견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별다른 걸름망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러나 점차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연 카톨릭은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인간적이었을까. 종교가 그들을 지배할 때 벌어졌던 갖가지 악행들을 그들은 정작 잊었단 말인가. 지금의 이슬람이 서양인들이 겪었던 예전의 시행착오를 단지 한참 뒤인 '현재' 겪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배려일까. 언제 어디에나 '전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현재의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전부 맞는 것도 아니고 전부 틀린 것도 아니다. 간혹 그들 중에는 그것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악한 모습은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슬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아닐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들여다보자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토의 문제이며 자원의 문제다. 다만 그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치장을 했을 뿐이다. 

사실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서구인들이 씌워준 안경을 아직 완전히 벗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은 한다. 이 세 권의 책(<이슬람>,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읽으며 나 스스로도 많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일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교육열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어도 서로 교류하며 산다고 한다. 며칠 전에 북한에도 과외를 금지하는데도 암암리에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의아했던 적이 있다. 마치 그곳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해서도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리고 가장 많은 (잘못된)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그냥 바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도저히 해법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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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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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 것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젠 인터넷 없이는 답답해서 못살 것 같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기 힘든, 그러나 인터넷이 되는 산속에서는 살 수 있겠다. 그만큼 인터넷에 중독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블로그를 만들고 가꾼지 어언 2년이 되어간다. 누구처럼 여기에 올인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글이나 여행을 갔다 오면 블로그에 정리를 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느낌이 든다. 물론 카페에도 꼬박꼬박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직성이 풀린다. 가히 중독 상태다.

그런데 역사와 인터넷이 만났단다. 재미있겠네라는 생각을 하며 펼쳐보는데 감탄사가 먼저 나온다. 정말 흔히 보았던 블로그 형태의 글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정말 아이디어 한번 끝내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흔히 사극에서 보는 임금의 도도한 자세와 위엄이 가득 들어있는 말씨만 기억날 뿐인데 여기서는 비밀글을 통해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이 느껴진다. 또 댓글은 어떤가. 지금의 인터넷 문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포함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플도 있고 한때 유행했던 사기성 글도 있고 콕 찝어서 일갈하는 논객도 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나.

조선 블로그라는 제목 답게 이성계의 블로그부터 시작된다. 태종을 비롯해 세종과 광해군도 있으며 조광조, 이순신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블로그도 있다. 사실을 기반으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블로그를 만들었다지만 그 인물이 정말 그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는 공감을 얻으며 읽는 게시글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진 인물들의 블로그만 보여준다면 그 또한 뭔가가 빠진 느낌이 들 게다. 그래서 농민을 대표하고 양반을 대표하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시대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의병 카페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의병 활동과 적의 상황을 읽는 맛도 느낄 수 있다. 또 풍속화 카페에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 팬들이 자기들이 지지하는 화가를 힐책하는 글을 만나면 달려가 비토하는 모습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꼬는 듯하다. 거기에는 물론 각 빠들의 습성을 날카롭고 통쾌하게 비판하는 어느 님의 글이 읽는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을 펴낸 계기가 불로구, 갑회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로구란 여러 개의 칸이 있고 거기에 별개의 글들이 적혀 있는데 그 글을 적은 이는 여기에서도 나오는 세종이나 이순신 등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즉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불로구란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문이라고 하여 다른 인물이 글에 대한 감상이나 댓글을 달아놓았단다. 또 갑회는 의병들, 실학자들, 풍속화 애호가들이 각각 모여 글을 쓰고 대문을 달아서 만든 책이란다. 과연 저자가 이렇게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인터넷 공간의 블로그나 카페를 연상하는 것일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당시에도 그처럼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장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다만 그것이 지금처럼 각자 집에서 가상공간에 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났다는 점이 다를 뿐이겠지. 그러고보면 지구상에 새로울 것은 없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때로는 몰랐던 것을 새로 알기도 했고 때로는 정말 그랬을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간혹 웃음 짓게 만드는(그것이 씁쓸한 웃음이든 통쾌한 웃음이든) 댓글 싸움에 지루한 줄 모르고 조선을 만났다. 그래, 역사가 꼭 딱딱하고 근엄하게 다가와야 하는 법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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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미국연수 43일 - 수잔 선생님과 다섯 악동들의
홍승연 지음 / 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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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방학 때 큰아이가 시에서 주최하는 영어캠프에 다녀왔다. 장장 3주일을 집을 떠나 그곳에서만 하는 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왜 신청했느냐며 가기 싫다고 하던 아이가 돌아와서는 또 가고 싶다고 주말 프로그램이 있다던데 거기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일단 외국인과 3주를 생활해서인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남들은 방학만 하면 외국으로 간다는데 우린 아직 그 정도는 못하겠고 그나마도 작년까지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캠프였는데 의외로 좋아해서 좋았다.

그런데 미국에 43일을 머무른 사람들이 있단다. 그것도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나 캠프를 보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생님이 다섯 명만 데리고 떠나는 연수란다. 목적도 물론 영어와 친하기 위해서라지. 그야말로 부모들이 원하는 그런 연수가 아닐까싶다. 게다가 현지에서 아는 사람집에 머무는 홈스테이라니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진행하는 선생님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내 자식 하나 둘도 어려운데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 넷을 데리고 다녀야 하다니. 또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으니 더욱 그렇겠지. 천방지축 꼬맹이들을 데리고 말이다.

출국해서 귀국하는 날까지의 43일을 날짜별로 써 놓은, 그야말로 연수를 함께 받고 돌아온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한 기록이었다. 그 많은 날들을 어쩜 이렇게 알차게 보낼 수가 있을까 놀랍다. 그리고 연수를 떠나면서 주의해야 할 일이라던가 참고할 만한 것들도 함께 이야기해 주어서 직접 연수를 떠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겠다. 처음에는 두께에 놀라서 언제 읽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술술 넘어간다. 

중간중간 아이들의 일기를 보여주는데 그 놀라운 발전이 눈에 그대로 보인다. 그리고 하루하루 정해진 일을 미리 계획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냥 대충 떠난 연수가 아니라는 게 확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때 함께 연수 갔던 아이들이 그 후에도 끊임없이 만나서 영어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우리 아이도 캠프 갔다 온 후로 그 리듬을 계속 유지시켜 주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안타깝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선생님은 후속 프로그램도 꾸준히 하고 있다니 역시 베테랑이구나싶다. 앞에 매일매일 적은 글이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마지막에 그 부분을 읽으니 다르게 보인다. 그 아이들은 참 행운아들이다. 마침 아이가 영어캠프에 다녀온 후 읽게 된 책이라 참 많이 공감했고 더욱 호기심이 일었던 책이다. 이런 경험, 아이에게 한번쯤 시켜줘도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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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흐린 날엔 그림책을 펴세요
야나기다 구니오 지음, 한명희 옮김 / 수희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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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림책 예찬론자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러니까 내가 좋아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을 알았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으며 그래서 결국은 어린이책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읽혀줄 목적으로 그림책을 보게 되었지만 지금은 내가 볼 목적으로 사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저 좋은 그림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사는 것이 사실이니까.

책의 중반부를 넘을 때까지 작가가 여자라고 생각했다. 저자에 대한 소개를 읽고 시작을 했는데 당연히 여자라며 그에 맞춰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그 상황에서 현실로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가 '엄마'라고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착각이었으며, 그림책을 접하고 거기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은 당연히 '여자'가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두 번째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남자라는 것을 안 순간 다시 소개를 봤다. 그때는 남자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모순이라니.

어쨌든 우연히 그림책의 매력에 빠진 후로 그림책을 알리는 역할을 자임했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진솔하고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인용한 그림책 대부분이 번역이 안 된 일본 그림책이어서 답답했다. 그러면서 이런 걸 왜 우리가 읽어야하지라는 괜한 심통도 났다. 물론 그 저변에는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람이 없는걸까라는 아쉬움이 더 컸겠지만 말이다. 어린이책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보고 그림책에 빠져들 기회가 될 확률은 얼마 없어 보인다. 그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그저 그림책의 매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읽으며 공감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이야기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 나도 그림책의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감을 하는 것이다. 또한 책 읽어주기를 했었고 그림자극도 했었기에 더욱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림자극이라는 것을 여간해서는 구경하기 힘든데 그것을 우리 모임에서는 벌써 4년인지 5년인지를 공연한다. 물론 행사 때만 해서 좀 아쉽지는 하지만. 그리고 그림책이라는 것을 유아나 저학년(사실 저학년들도 그림책은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다.)들이나 보는 것으로 생각해서 고학년이 되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 하고 있던 내 마음과 어쩜 그리 똑같은지. 그래서 지난 해 2학년에게 책 읽어주기를 하면서 고집스럽게 그림책을 선정했다. 물론 아이들 모두 너무 좋아했다. 이 좋은 그림책을 왜 유아들만 본다고 생각하느냐 말이다. 안타깝다. 이 책에서 소개한 책 중에서 진작 사고 싶었는데 미루었던 그림책을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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