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겉모습과 내재된 인품이 어울리지 않으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나온다.

   服美不稱, 必以惡終(복미불칭 필이악종)

 

춘추 시대 제나라 경봉(慶封)이란 자가 사신으로 왔는데 그 수레가 화려했다. 맹손(孟孫)이 숙손(叔孫)에게 경봉의 수레가 별나게 화려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숙손은 복장과 인품이 어울리지 않으면 끝이 좋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화려한 수레야……라고 했다.

 

사람은 정신적 수양이 공부에 앞서야 한다. 그래서 덕성(德性)은 내면에서 움직이고, 의례(儀禮)는 밖에서 움직여야만 군자의 기질과 풍모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외모와 내면의 품성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외모 지상주의가 내면의 정신적 경지를 좀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젊은이들은 무용한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기성세대들은 진퇴의 기로에서 방황하면서 물질은 물론 정신적 허영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러면 나라가 병이 든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27년조

 

 

 

 

 

중국사의 오늘 :

24925(삼국 위 가평 원년 정월 갑오)

대장군 조상(曹爽) 등이 명제 조예의 무덤으로 간 틈을 타서 이날 사마의(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조상을 비롯한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죽이고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그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西晉) 왕조를 여는 터를 닦았다.

 

 

 

* 도판 위는 사마의, 아래는 사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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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적 조치는 외교의 선택에 달려 있다.

   安民之本, 在于擇交(안민지본, 재우택교)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많지만 안으로는 어떤 인재를 기용하느냐는 용인’(用人)과 밖으로는 어떤 나라와 어떻게 지내느냐는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

 

전국 시대 유세가 소진(蘇秦)은 연나라를 거쳐 조나라에 가서 조왕에게 6국이 연합하여 막강한 진()에 대항하자는 합종’(合縱)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은 외교의 선택에 있습니다. 선택이 적절하면 백성은 편안할 것이고, 외교가 적절하지 못하면 백성은 죽을 때까지 안정을 얻지 못합니다.”

 

대북 관계는 물론 대중대일 관계의 난맥상이 국민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주었는지는 실컷 경험했다. 사실 외교를 잘하면 다른 분야는 걱정할 것 없다. 관계 설정을 지혜롭게 푸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중국사의 오늘 :

96024(북송 태조 건융 원년 정월 을사)

조광윤(趙匡胤)이 진교 정변(陳橋政變)으로 후주(後周)를 대신하여 이날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건륭이라 했다. 수도는 개봉으로 정했다.

 

* 도판은 송의 태조 조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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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49년의 잘못을 알다.

   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연오십이지사십구년비)

 

서한 시대 개국 황제 유방(劉邦)의 손자이자 당시 황제 문제(文帝)의 이복동생인 회남왕 유안(劉安)은 자신의 문객들에게 백과전서류의 잡가(雜家)에 속하는 회남자를 편찬하게 했다. 이 명구는 원도훈이라는 편에 나오는 것으로 그 앞뒤를 함께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릇 사람의 수명은 70이다. 그사이 자신의 거취와 행동에 대하여 날마다 달마다 뉘우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거백옥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지난 49년의 잘못을 알았다. 앞서 가는 사람이 알아서 깨닫기는 어렵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그래서 경력과 경험이 많을수록 자신을 반성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이와는 정반대인 사람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많을수록 허물도 그만큼 많이 쌓이는 사람이 참 많다. 하기야 그런 사람은 반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

 

 

 

 

 

중국사의 오늘 :

196023

신화사(新華社) 통신이 신강(新疆) 타클라마칸 대사막에서 완전한 상태의 남녀 합장 미라를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감정 결과 약 2,000년 전의 동한 시대 사람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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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소중한 물건

   文房四寶(문방사보)

 

과거 붓으로 글을 쓰던 시절 꼭 필요한 네 가지인 종이, , , 벼루를 우리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 불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문방사보또는 문방사사’(文房四士)라 쓴다. 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警奇)는 명나라 때의 작가인 능몽초(凌濛初)의 구어체 단편소설집이다(능몽초는 이 작품집에 이어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도 출간했다). 여기에 아들 춘랑을 시켜 문방사보를 가져오게 해서는 바른 자세로 붓을 들었다가 갑자기 멈추었다는 대목이 보인다. 송나라 때의 문인이자 강력하게 항금(抗金)을 주장한 애국자로서 1만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육유(陸游)는 평생 자신 의지할 수 있는 선비들이라는 뜻으로 문방사사라 했다.

 

글을 쓰는 데 꼭 필요한 네 가지를 두고 우리와 중국의 문인은 글자 하나를 달리해 표현한다. 두 민족의 정서와 기질에서 미묘한 차이가 보인다. 이와 비슷한 예로 우리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하지만 중국은 주마간화’(走馬看花)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중국인 특유의 과장과 한자의 묘미를 엿볼 수 있다.

 

초각박안경기20

 

 

 

* 도판은 각박안경기

 

 

 

 

중국사의 오늘 :

49622(북조 북위 효문제 태화 20년 정월 정묘)

북위(北魏)의 황제 효문제(孝文帝)가 선비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라는 조서를 내렸다. 황제의 성인 탁발(拓跋)은 원()으로 바뀌었다. 효문제는 이 조치를 내리면서 노골적으로 우리 조상은 황제(黃帝)에게서 나왔다고 했다. 이로써 북위 한화(漢化) 개혁 정치가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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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뿔에 책을 걸어두다

   牛角掛書(우각괘서)

 

수나라 때 사람 이밀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잠깐이라도 낭비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평소 존경하던 포개를 방문하기 위해 이밀은 『한서』를 챙겼는데, 길을 가면서도 어떻게 하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갯버들을 뜯어 안장을 만들어 소등에 앉은 다음 소뿔에 책을 걸어 놓고 읽었다. 길을 가던 세력가 양소가 이밀을 보고 어떤 서생이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양소를 알고 있던 이밀이 소에서 내려 인사를 드리자 양소는 뭘 읽고 있냐고 물었고 양소는 항우열전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일화는 그 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독서와 관련한 고사 중 가장 유명한 고사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선비를 우각서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고사에서 파생된 단어로는 괘각’(掛角), ‘한서우배독’(漢書牛背讀), ‘서괘우각’(書掛牛角) 등이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아동용 교과서로 그 영향력이 컸던 『삼자경』(三字經)에도 후학들에게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인용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84 이밀전(李密傳)

 

 

 

 

 

 

중국사의 오늘 :

74821(당 현종 천보 612월 기사)

당 현종이 고구려 출신의 장수 고선지(高仙芝)를 안서절도사로 임명했다. 고선지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으로 이주한 고사계의 아들로 서역 원정과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는 등 무공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 모함으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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