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두려워 않는 장군

   斷頭將軍(단두장군)

 

삼국 시대 유비(劉備)가 병사들을 이끌고 사천(四川)으로 들어가 유장(劉璋)을 공격했다. 장비(張飛)는 강주(江州)를 격파하여 파군태수 엄안(嚴顔)을 사로잡았다. 엄안은 오랏줄에 묶인 채 장비 앞으로 끌려왔다. 장비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째서 투항하지 않고 저항한 것이냐?”라며 호통을 쳤다. 엄안은 전혀 두려움 없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내가 왜 투항해야 하는가? 우리 성에는 단두장군만 있을 뿐 투항장군은 없다라고 응수했다. 더욱 화가 치민 장비는 당장 끌고 나가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엄안은 더욱더 차분하게 목을 자를 거면 자르면 되지 왜 그렇게 화는 내는가라고 비꼬았다. 엄안의 꼿꼿한 기백과 정신에 감동한 장비는 몸소 오랏줄을 풀어 주고 상객으로 그를 대접했다. 이후 단두장군은 목이 잘리는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불굴의 용감한 무장을 일컫는 용어로 정착했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중국사의 오늘 :

779828(당 덕종 대력 147월 경진)

당 덕종이 장안에 머무르고 있는 회흘을 비롯한 외국 사람에게 당나라 복장을 입지 말고 본국의 복장을 입으라는 조서를 내렸다. 1천 명이 넘는 이들이 당나라 복장을 하고 장사에서 폭리를 취하고 당나라 부녀자를 유혹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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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주인은 미워하다.

   盜憎主人(도증주인)

 

춘추 시대 진()나라는 극씨(郤氏) 3형제가 정권을 농단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충성스럽고 바른말을 잘하는 대부 백종(伯宗)이 눈엣가시 같아 틈만 나면 국군 앞에서 백종에 대한 나쁜 말을 늘어놓았다. 혓바닥이 쇠를 녹인다고 했던가, 국군은 백종의 충성과 재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소한 잘못을 트집 잡아 백종을 죽였다. 진나라의 현자 한헌자(韓獻子)는 착한 사람들을 해치는 극씨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백종이 죽기 전부터 그의 아내는 늘 도둑은 자기가 훔친 물건의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관리를 미워하기 마련입니다. 바른말만 좋아하는 당신께 재앙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도증주인은 사악한 자는 정직한 사람을 증오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세상이 이런 자들이 적지 않다.

 

좌전 성공(成公) 15년조

 

 

 

 

중국사의 오늘 :

1524827(명 세종 가정 37월 신묘)

명나라 한림원수찬 양신은 세종에게 큰아버지뻘인 효종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서 운남으로 유배 조치되었다. 이 문제는 곤장에 맞아 죽은 사람이 17명이 발생할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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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반의 집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다.

   班門弄斧(반문농부)

 

이 성어는 유종원(柳宗元)의 글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인묵객이 즐겨 인용하곤 했다. 명나라 때 시인 매지환(梅之煥)이 채석기(采石磯) 근처에 있는 이백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 앞에 낙서처럼 어지럽게 쓰여 있는 문장들을 보고는 화가 나서는 채석강변 흙더미, 천고에 길이 남은 이백이란 이름. 노반의 집 앞에서 큰 도끼를 휘두르는 심정으로 시 한 수 남긴다라는 글을 남겼다. 노반(魯班)은 춘추 시대를 풍미한 목수이자 건축가였다. ‘노반의 집 앞에서 도끼를 휘두른다는 것은 우리 속담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와 같은 뜻이다. 최고 실력자 앞에서 자신의 솜씨를 드러내려 하는 것을 비유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와 비슷한 격언으로는 호랑이 앞에서 웃통 벗는다거나 돼지 앞에서 코 뒤집는다따위가 있다. 곳곳에 고수들투성이인 세상이다. 따라서 어설픈 지식 따위를 자랑해서는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왕씨백중창화시서(王氏伯仲唱和詩序)

 

 

 

 

중국사의 오늘 :

1698826(청 강희제 377월 계사)

영정하(永定河)에 대한 치수사업이 완공되었다. 작은 황하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영정하는 워낙 범람이 심하고 물길이 자주 바뀌어 무정하(無定河)로 불렸는데,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영정하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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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풀이 움직이다.

   風吹草動(풍취초동)

 

돈황변문집에는 중국 역사 고사도 일부 수록되어 있는데 춘추 시대 사람 오자서(伍子胥)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에 의해 아버지와 형님이 살해당하는 화를 겪고 간신히 초나라를 빠져나가 오나라로 망명한다. 여러 기록에서 오자서가 초나라를 탈출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대단히 다양하고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탈출 과정에서 오자서는 한 어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어부가 먹을 것 가지러 잠깐 집으로 간 사이 강변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오자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부를 기다렸다. 그런데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갈대와 들풀이 소리를 냈다. 오자서는 깜짝 놀라 풀숲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초나라의 추격병인 줄 알았던 것이다. 알고 봤더니 바람이 불어 풀이 움직인 것이었다.’ 아버지와 형님을 잃고 전국에 수배령이 내린 급박한 상황에 탈출을 감행한 오자서로서는 바람이 불어 나는 풀 소리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자서의 절박한 심경을 잘 나타내는 네 글자라 할 것이다.

 

돈황변문집(敦煌變文集)

 

* 오자서

 

 

 

 

 

 

중국사의 오늘 :

651825(당 고종 영휘 28월 을축)

대식국(大食國, 로마) 사신이 당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당과 로마는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다양한 문물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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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친구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다.

   高朋滿座(고붕만좌)

 

왕발(王勃)은 당나라 초기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천재 시인이다(그를 포함하여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 이 네 사람을 초당사걸’(初唐四傑)이라 부른다.) 그가 즉석에서 남긴 등왕각서(滕王閣序)는 천고의 명편으로 꼽힌다. 675년 왕발은 남창(南昌)을 지나다가 등왕각(滕王閣)에서 열린 등왕각 중수(重修) 축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연회를 개최한 염() 도독은 자기 사위의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미리 잘 쓴 서문을 준비해서는 마치 즉석에서 발표하는 것처럼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필묵을 나눠 주며 각자 서문을 짓도록 했다. 도독의 의도를 알아챈 사람들은 작문을 사양했다. 그러나 왕발만은 눈치 없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등왕각서를 써 냈다. 염 도독은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왕발이 쏟아 내는 문장은 자리를 가득 메운 모든 사람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천고의 명문 등왕각서가 탄생했다. 여기서 왕발은 千里逢迎, 高朋滿座’(천리봉영, 고붕만좌)란 여덟 글자로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자리를 가득 메운 귀한 친구와 성황을 이룬 연회를 묘사했다.

 

등왕각서(滕王閣序)

 

* 왕발

 

 

 

 

 

 

중국사의 오늘 :

1973824

중국 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가 5일간의 일정으로 북경에서 열렸다. 대표 1,249명과 대표당원 2,800명이 참석했다. 이어 30일에는 10회 일중전회를 거행하여 모택동을 주석으로 주은래 등을 부주석으로 선출했다. 강청 등 소위 4인방도 중앙정치국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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