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만 차지하고 밥만 축내다.

   尸位素餐(시위소찬)

 

서한 원제(元帝) 때 주운(朱雲)은 강직하기로 이름난 인재였다. 그는 무능한 고관대작들을 대 놓고 공격하다 결국은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났다. 원제를 이은 성제(成帝)는 장우(張禹)란 자를 사부로 모셨다. 주운이 글을 올려 성제를 뵙고자 했다. 성제를 만난 주운은 다짜고짜 지금 조정 대신은 자리만 차지한 채 밥만 축내는 무능한 자들이니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나머지에게 경고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성제가 누구의 목을 베려 하냐고 묻자 주운은 서슴없이 승상 장우라고 답했다. 성제는 노발대발하며 주운을 끌고나가 목을 베라고 했다. 좌장군 신경기(辛慶忌)가 주운의 강직함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사 간청했다. 주운 대신 자신의 목이라도 내놓겠다는 신경기의 간청에 성제는 주운을 석방했다. 자리만 차지한 채 국민의 세금만 축내는 밥버러지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지적하는 주운 같은 강직한 관리는 아예 씨가 말랐다는 사실이다.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

 

 

 

 

 

중국사의 오늘 :

962911(북송 태조 건융 38월 을미)

송 태조 조광윤이 조서를 내려 뇌물로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된 자를 고발하면 고발한 자가 노비든 이웃이든 친척이든 누가 되었건 상을 내리게 했다.

 

* 송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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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석 장에 나귀가 없다.

   三紙無驢(삼지무려)

 

옛날 재주가 남다른 한 서생이 늘 자신의 유식을 뽐내고 다녔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박사라 부르며 비꼬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다. 하루는 서생의 집에서 나귀를 한 마리 사게 되었다. 습관에 따라 간단하게 계약서를 써야 했다. 서생은 거창하게 지필묵을 대령하여 계약서를 써 내려가는데 큰 종이로 석 장을 쓰고도 다 쓰지 못했다. 날은 저물고, 나귀를 파는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지만 서생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자가 뭐가 급하고 재촉하는가? 곧 나귀 ’() 자를 쓰려고 하는데……라고 했다. 석 장을 쓰고도 정작 써야 할 나귀 자는 나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수나라 때 사람 안지추(顔之推)안씨가훈에서 박사가 나귀를 사면서 종이 석 장을 쓰고도 나귀 자가 없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삼지무려는 문장이나 말이 요령을 얻지 못하고 온통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찬 상황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안씨가훈(顏氏家訓) 면학(勉学)

 

 

 

 

중국사의 오늘 :

1508910(명 무종 정덕 38월 신사)

무종(武宗)이 특무기관인 내행창(內行廠)을 다시 세워 환관 유근에게 맡겼다. 명 왕조는 신하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악독한 감찰기구를 여러 곳 세워 정치를 암울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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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벗은 듯하다.

   如釋重負(여석중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소공(昭公) 때 조정의 실제 권력은 계손씨(季孫氏)를 비롯한 이른바 삼환(三桓)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소공은 무기력하게 일손을 놓은 채 놀이에만 빠졌다. 심지어 모친상 중에도 웃는 얼굴로 사냥을 다닐 정도였다. 백성들은 소공의 무기력과 무지를 비웃었고, 민심은 떠나갔다. 그 뒤 소공은 어쭙잖게 숙손씨(叔孫氏)와 계손씨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이들의 연합 공격을 받고는 노나라를 빠져나가 제나라로 갔다. 백성들은 소공의 망명을 안타까워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을 하며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듯후련해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변의 와중에 타국으로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백성이 속 시원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는 소공이 진즉에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백성의 안위는 아랑곳 않고 사냥과 놀이에 빠지는 등 국정을 게을리했고, 그저 삼환을 비롯한 귀족 세력에 빌붙어 구차하게 보잘것없는 자신의 권력을 연명하려 했다. 백성은 때로는 독재자 못지않게 무기력한 지도자를 증오한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소공(昭公) 29년조

 

 

 

 

중국사의 오늘 :

15999(동한 환제 연희 28월 정축)

환제(桓帝)가 환관 당형(唐衡), 단초(單超) 등과 함께 양기(梁冀)와 그 일당 수십 명을 주살하고, 양기의 재산 30여억 냥을 몰수했다. 그해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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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다.

   千人所指(천인소지)

 

서한 애제(哀帝)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선호했는데, 특히 동현(董賢)이란 자를 애지중지하여 금전은 물론 높은 벼슬까지 내려 주었다. 또 비단으로 장식된 기둥이 있는 호화스러운 집을 지어 주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기한 물품들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정도를 넘은 우대를 보다 못한 왕가(王嘉)는 애제에게 글을 올려서 속담에 천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면 병이 없어도 죽는다면서 동현에 대한 세간의 우려와 분노를 전했다. 하지만 애제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왕가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왕가는 이를 거부하면서 옥에서 굶어 죽었다. 왕가가 죽자 바른말 하는 사람도 사라졌고, 동현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더해만 갔다. 그러나 애제가 병으로 죽자 동현은 의지할 곳을 잃었고, 실권을 쥔 왕 태후는 동현의 모든 관직을 박탈했다. 그 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동현은 자신의 아내와 자살했으며 가산도 몰수되었다.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오래가는 권세와 권력은 없다. 대중의 분노는 물이나 불보다 무섭다. 분노에 담긴 기운을 느낄 줄 아는 자만이 자리를 제대로 보전할 수 있다.

 

한서(漢書) 왕가전(王嘉傳)

 

 

 

 

 

중국사의 오늘 :

197998

공산당 중앙 부주석이자 국무원 부총리인 등소평(鄧小平)이 당정 대표단을 인솔하여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건국 30주년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 등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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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의 본심은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안다.

司馬昭之心, 路人皆知(사마소지심, 노인개지)

 

삼국 시대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司馬懿)는 정변을 일으켜 조상(曹爽) 형제와 그 일당을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했다. 사마의가 죽자 그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권력을 계승했고, 사마사가 죽자 그 동생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이 되어 조정 대권을 좌우했다. 괴뢰 황제였던 조모(曹髦)는 이런 상황을 단숨에 해결하고자 시중 왕침(王沈) 등을 불러 사마소의 야심은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안다. 나는 앉아서 죽을 수 없다. 기다리다가는 사마소에게 폐위당할 것이 뻔하니 우리가 함께 저들을 토벌하자라고 제안했다. 조모의 계획은 물론 수포로 돌아갔고 그 자신은 칼에 찔려 죽었다. 나이 19세였다. 위나라는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司馬炎) 때 결국 사마씨에게 멸망당했다. ‘사마소의 본심은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안다는 이 말은 누군가의 야심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상황을 비유한다. 대개 음모나 야심은 감추기 마련이지만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거나, 당사자가 사악하고 비열한 자라면 아예 대놓고 야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마소가 그랬고,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고귀향공기(高貴鄉公紀)

  

 

 

 

 

중국사의 오늘 :

162597(명 희종 천계 58월 임오)

환관 출신으로 명나라 최대의 간신이었던 위충현(魏忠賢)이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동림(東林) 서원 등을 철거시켰다.

 

* 위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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