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들다.

   捕風捉影(포풍착영)

 

한나라 성제(成帝)는 스무 살에 황제 자리에 올라 마흔이 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 고민하던 끝에 성제는 방사(方士)들의 말을 듣고 장안 교외 상림원(上林園)에서 대대적으로 제사를 올리며 하늘을 향해 자녀를 갈구했지만 기력만 낭비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또 방사들의 불로장생약을 복용했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이에 광록대부(光祿大夫) 곡영(谷永)은 글을 올려 인간의 본성과 세상 만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귀신 따위에 제사를 올리지 않으며, 허황된 불로장생(不老長生) 이론이나 그런 약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들려는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성제는 곡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귀신에 대한 제사 따위를 중단했다. ‘포풍착영은 근거도 없고 증명된 바도 없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내세우거나 그런 행동을 비유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성어이다.

 

한서(漢書) 교사지 하(郊祀志下)

 

 

 

 

 

중국사의 오늘:

1956916

대만(臺灣)에서 처음으로 인구 조사가 진행되었다. 전체 인구가 931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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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경조윤

   五日京兆(오일경조)

 

서한 선제(宣帝) 때 장창(張敞)은 수도 장안 지구의 경조윤(京兆尹) 자리에 있으면서 엄격한 법 집행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선제의 마음을 잡았다. 장창은 경조윤 자리를 장장 9년을 맡았는데, 그 뒤 사건에 연루되어 자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장창을 파면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파면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장창은 흔들림 없이 업무에 충실했고, 그 무렵 발생한 절도 사건을 부하 서순(絮舜)에게 서둘러 처리하도록 명령했다. 서순은 닷새면 경조윤에서 물러날사람이 무슨 사건 조사냐며 코웃음을 치면서 집에 돌아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이 사실을 안 장창은 서순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때는 한 해가 끝나기 며칠 전이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마지막 달에 죄인을 처결하게 되어 있었다. 관서는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그해가 저물기 전에 처형되었다. ‘오일경조는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말하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자나 그런 언행을 비유한다.

 

한서(漢書) 장창전(張敞傳)

 

* 장창

 

 

 

 

 

 

중국사의 오늘 :

1915915

초기 공산주의 이론을 수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진독수(陳獨秀)가 상해에서 월간 청년잡지를 창간했다. 이듬해 912권 때부터는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진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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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지적받으면 그 자리에서 기뻐하다.

   聞過則喜(문과즉희)

 

공자의 수제자 가운데 자로(子路)는 개성이 남달랐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스승에게 늘 질책을 받았고, 끝내는 그 성질 때문에 제명에 죽지 못했다. 하지만 공자 곁을 지키면서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스승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과 생각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수양 정도와 관계가 깊다. 맹자는 정리했다. 맹자는 자신의 학생과 함께 타인의 비평과 질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토론하던 중 자로의 이런 면을 두고 누구든지 (자로의) 잘못을 말해 주면 바로 기뻐했다는 말로 자로를 높이 평가했다. 맹자는 그러면서 고대 전설 속 제왕인 우()와 순()의 미덕을 함께 거론하여 자로의 이런 자세를 한층 높이 끌어올렸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 대개는 기분이 상하고 상대가 미워진다. 하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야만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기수양은 그 어떤 미덕보다 큰 미덕이 될 수 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 자로

 

 

 

 

 

 

중국사의 오늘 :

736914(당 현종 개원 248월 임자)

현종의 생일을 맞이하여 신하들이 귀한 거울을 축하 선물로 올리자, 재상 장구령(張九齡)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길 바라는 의미에서 과거의 흥망성쇠를 5권의 책으로 정리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생일 축하 선물로 올렸다.

 

 

* 장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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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이 돌을 뚫다.

   水滴石穿(수적석천)

 

송나라 때 사람 장괴애(張乖崖)는 공평무사하고 청렴하며 강직한 관리였다. 숭양(崇陽)에서 현령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관아를 순시하고 있는데 말단 관리 하나가 황급히 창고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붙들어 추궁했다. 관리는 정색을 하며 딱 잡아뗐지만 장괴애의 거듭된 추궁에 마지못해 창고에서 한 냥을 갖고 나왔을 뿐입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절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라며 버텼다. 이에 장괴애는 하루 한 냥이면 천 일이면 천 냥이다. 먹줄이 나무를 썰고, 물방울이 돌을 뚫는 것이야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붓을 들어 판결을 내리고 직접 보검으로 관리의 목을 쳤다. 이후 관아 내에서는 이런 일이 일절 발생하지 않았다. 자고로 상은 크게 주고 벌은 약하게 주라고 했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서는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한다. 공직자의 기강이 현저히 무너졌을 때는 특히 그렇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림옥로(鶴林玉露)

 

* 장괴애

 

 

 

 

 

 

중국사의 오늘 :

1922913

채화삼(蔡和森)이 주관하는 중국공산당 중앙기관 주간 간행물인 향도(嚮導)가 상해에서 창간되었다.

 

* 채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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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듯 하다.

   勢如破竹(세여파죽)

 

삼국 시대 말기 서진(西晉)의 무제 사마염(司馬炎)은 촉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 정권을 탈취한 이후 오나라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실력을 좀 더 키운 뒤 공격하길 바랐다. 이때 대장 두예(杜預)는 사마염에게 글을 올려 오나라의 힘이 빠진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279년 사마염은 20여만 병마를 동원하여 수륙 두 방향으로 오나라를 공격했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두예는 오나라 수도를 향해 진격하려고 하자 사람들은 장강의 물이 불었다며 기다렸다가 겨울에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두예는 군대의 투지란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 몇 마디 쪼개면 나머지는 칼날만 갖다 대도 쪼개진다라며 반대했다. 여기서 세여파죽이란 성어가 탄생했고, 흔히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많이 쓴다. 막힘없이 밀고 나가는 기세나 강력한 기세로 계속 승리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파죽지세의 기세로 백성과 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

 

* 사마염

 

 

 

 

 

중국사의 오늘 :

710912(당 예종 경운 원년 8월 계사)

예종(睿宗)이 재상 요원지(姚元之), 송경(宋璟)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종(中宗) 때 내린 사봉관(斜封官) 수천 명을 파직시켰다. 사봉관이란 주로 돈을 내면 주던 관직인데, 황제가 조칙을 내릴 때 봉투를 비스듬히 봉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중종 때 위 황후는 안락공주 등과 결탁하여 엄청난 매관매직(賣官賣職)으로 조정을 문란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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