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책 궤짝

    立地書櫥(입지서주)

 

 

북송 때 오시(吳時)란 인물은 박학다식하고 일 처리도 신속했다. 화주(華州) 정현(鄭縣)의 현령으로 있을 때 어떤 지식인이 쓴 문장에 조정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이 있어 큰 사건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다. 오시는 그 문장을 가져오게 한 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글을 화로에 던져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다음 신하 된 사람으로도 이런 글을 차마 견디지 못하거늘 황제께서야 오죽하겠는가라고 했다. 글을 쓴 자는 화를 면했고, 다들 오시의 일 처리가 적절했다고 여겼다. 오시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지혜롭고 신속하게 처리했을 뿐 아니라, 문장을 쓰는 속도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이 모두가 엄청난 독서량에서 나온 것이었다. 훗날 오시가 도성으로 올라와 관직을 맡자 그와 만난 당시 최고 학부인 태자감과 태학의 사람은 그를 두고 모든 일에 두루 능통한 만사통’(萬事通)이니 걸어 다니는 책 궤짝이니 하는 별명으로 그를 칭찬했다. 이렇게 해서 입지서주는 공부를 많이 하고 학식이 박학한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송사(宋史) 오시전(吳時傳)

 

 

 

 

중국사의 오늘 :

1643921(명 사종 숭정 168월 경오)

청 태종 황태극이 향년 52(1592년생)로 죽었다. 무덤은 심양의 소릉(昭陵, 일명 북릉)이다. 그는 생전에 조선과 몽고를 정복하여 동서 세 방면에서 명나라를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 황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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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이 지름길이다.

   終南捷徑(종남첩경)

 

당나라 때 사마승정(司馬承禎)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여간 아니었으나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대산(天臺山)에서 수십 년을 은거했다. 중종부터 현종까지 그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불렀으나 그는 거절했다. 사마승정이 도성으로 와서 예종을 만나고 가던 중 장안(長安) 남쪽의 종남산(終南山)에서 은거하다가 벼슬을 받은 노장용(盧藏用)과 마주쳤다. 노장용이 종남산 쪽을 가리키며 저곳에 확실히 무궁무진한 재미가 있소이다그려라며 웃었다. 이에 사마승정은 그렇소이다. 내가 보기에 종남산은 확실히 관리가 되는 지름길이라오라고 응수했다. 사마승정은 벼슬자리가 여의치 않자 일부러 도성에 가까운 종남산에 은거하여 이목을 끈 다음 벼슬을 얻은 노장용의 행위를 이렇게 비꼰 것이다. 그 뒤 종남첩경은 벼슬이나 명리를 추구하는 가장 좋은 길이나 방법을 비유하는 성어로 정착했다. 불편한 옛날 복장에 지저분하게 수염 기른 채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자는 대개는 명리에 목을 매는 위선자다.

 

대당신어(大唐新語) 은일(隱逸)

* 사마승정

 

 

 

 

 

중국사의 오늘 :

1865920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 등이 상해에다 강남기기제조총국(江南機器制造總局)을 설립했다. 이 기구는 청나라 정부의 양무파(洋務派)가 세운 최대 규모의 근대 군사기업이었다.

 

* 증국번

 

* 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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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다.

   鄭人買履(정인매리)

 

정나라에 신발을 한 켤레 사려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발의 크기를 몰라 끈으로 발의 크기를 잰 다음 크기에 맞게 끈을 잘라서 의자 위에 걸어 두고는 기분 좋게 신발을 사러 도성으로 들어갔다. 신발 상점에 도착해서야 발을 잰 끈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발 상점 주인이 신발을 한 번 신어 보면 되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이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어가 그 끈을 찾아서는 다시 성안으로 뛰어왔다. 하지만 신발 상점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지나가던 사람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누구에게 신발을 사 주려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정나라 사람은 , 내가 신으려는 것이지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행인이 그럼 자기 발을 이용해서 신발을 한 번 신어 볼 일이지 뭣 하러 끈을 가지러 집에까지 갔다 왔단 말이오?”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나라 사람은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내 발이 이 끈보다 정확할 수 있겠소라고 반문했다. ‘정인매리는 훗날 실제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틀에 박힌 조항에만 얽매여 변통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런 사고방식을 비꼬는 성어로 정착했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

 

 

 

 

 

중국사의 오늘 :

1959919

중국 혁명박물관과 중국 역사박물관이 북경에 건립되었다.

 

 

* 중국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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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과 기쁨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休戚相關(휴척상관)

 

춘추 시대 진()나라 도공(悼公)은 젊었을 때 여공(厲公)의 박해를 받아 자기 나라에 살지 못하고 주나라 낙양에서 생활했다. 도공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중하고 인품이 뛰어나 주나라의 귀족 단양공(單襄公)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단양공은 죽으면서 그 아들에게 도공을 진심으로 잘 돌보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도공은 늘 조국 진나라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나라에 좋은 소식이 있으면 기뻐했고, 좋지 않은 소식을 들으면 근심으로 가득 찼다.’ 여기서 휴척상관이란 성어가 탄생했다. 그 후 진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여공이 살해되자 대부들은 낙양으로 사람을 보내 도공을 맞이하여 국군으로 즉위시켰다. ‘휴척상관이란 성어에서 기뻐하다라는 뜻이고, ‘슬퍼하다, 걱정하다의 뜻이다. 기쁨과 슬픔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니, 관계가 아주 가깝거나 이해가 서로 일치하는 것을 형용하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예컨대 조직의 발전과 쇠퇴는 조직원이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와 휴척상관이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국어(國語) 주어 하(周語下)

 

 

 

 

 

중국사의 오늘 :

1043918(북송 인종 경력 38월 정미)

범중엄(范仲淹)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이른바 경력신정(慶歷新政)으로 불리는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 범중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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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말을 바꾸다.

   信口雌黃(신구자황)

 

위진 시대는 문벌을 중시하는 풍토가 판을 쳤다. 명문가 출신의 왕연(王衍)은 총명하기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자기 멋대로 하는 성격인 데다 자신의 이익밖에 몰랐고, 논리에 모순이 많다는 지적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말을 바꾸었다. 왕연은 태자에게 딸을 시집보낸 후 태자가 모함에 빠지자 황제에게 간청하여 딸을 이혼시켰다. 훗날 태자의 억울함은 풀렸지만 태자는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 서진 궁중의 내란 때 왕연은 거듭 권세가에 빌붙어 고관대작에 올라 부귀영화를 추구했다. 서진이 망했을 때는 자신은 조정 일에 간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시치미를 뗐지만 죽음을 면치는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왕연을 두고 신구자황이라고 평했다. ‘자황은 황적색의 광물이다. 당시에는 황지(黃紙)라는 종이에 글을 썼는데 글자를 잘못 쓰면 자황으로 만든 안료를 칠해 글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신구자황은 사실 관계는 확인도 않고 마구 헛소리를 내뱉거나 수시로 말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흥미로운 성어이다. 요즘 이런 자들이 우리 주위에 넘쳐 난다.

 

문선(文選)에 인용된 손성(孫盛)진양추(晉陽秋)

 

 

 

 

중국사의 오늘 :

745917

당 현종이 양태진(楊太眞)을 귀비에 책봉했다. 당나라 현종과 함께 전성기의 당나라를 추락시키는 데 큰 작용을 한 그 양 귀비이다.

 

* 양귀비출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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