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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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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폼나게 지하철에서 일본 소설을 한 권 꺼내서 읽는 것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이니,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같은 그런 일본 소설들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니, 스탕달의 <적과 흑>을 들고 있는 것도 꽤나 폼나 보이기는 하나 너무 고루해보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고 있자니 얼치기 운동권 같고, 그렇다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너무 경박해보이고. 그래서 적당히 가볍고, 또한 적당히 무게 있어 보이는 그런 조건에 충족되는 소설들로는 일본 소설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당시(1990년대 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 코너에는 은근히 사람이 붐볐고, 마음먹고 도서관에 임무 수행을 떠났다가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오는 패자들이 생겨나곤 했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내 독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조금 무겁다 싶은 것을 하나 읽은 후에는 중간중간 일본 소설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 읽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를 동정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따위의 문구들을 나우누리 자기소개란에 올려놓고 슬며시 웃는 것이다.

  그런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게 있음- 이것은 오늘 날의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설 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재미있기는 하되, 너무 무겁지 말 것, 그러면서도 너무 경박하지는 말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니, 요시모토 바나나니, 히라노 게이치로니 하는 작가들의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또 일군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추리물이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일종의 로맨스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방금 다 읽은 <악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다.

  이 소설 <악인>은 한 여자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녀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그 남자들이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추리물이나, 범인을 밝히면서 긴박함을 강조하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를 조용히 따라가며, 우리 인간에게 악의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악의란 것을 가지게 되며, 그 악의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영화를 찍듯, 그리고 등장인물이 사건의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하듯, 조용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일단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때로는 그 묘사가 지나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가끔 어쩌다가 낮에 집에 있게 되면,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로 드라마가 방영될 때가 있다. 그 때 난감한 것은 이러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치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고 그냥 ‘느끼면’ 된다. 그러나 화면해설 방송은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봅니다’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는지,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냥 한 번 무심히 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oo이 oo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oo도 oo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이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정도만 설명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만다. 즉 묘사와 설명의 중간에서 무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한 줄타기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솔직히 ‘독자의 사유가 선과 악을 판별하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는 옮긴이의 말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도 비교적 명확할 뿐 아니라, 혹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여주는 어떤 트렌드적인 경향에 길들여진(혹은 지나치게 패턴화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며, 일견 복잡한 듯하나 너무 평면적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부터 그런 기미가 조금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부잣집 도련님과 어머니가 항구에 자기를 버리고 간 청년. 뭐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다른 많은 일본 소설들과 같이 이 소설도 같은 한계점에 머무른다.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긴 하였고, 잘 짜여진 좋은 이야기들과 좋은 대사들도 있으나, 일시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게를 주지는 않는 것. TV를 끄고 나면, 그 불우한 청년이 어쩌다 실수로 한 사람을 죽였으나 사실 그는 나쁜놈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나쁜 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산’이 노론 척신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건 말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듯이 말이다. 좋은 소설이 가지는 공통점인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나의 삶에의 어떤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이는 우리 독자들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독자들이 요구해온 일본 소설의 경향이 그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출판사도 그런 작가들의 책을 중심으로, 또 ‘아쿠타가와상’이니, ‘나오키상’이니 그런 적당히 무게감 있는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번역하고 출판해온 것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에게도 일정 부분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번역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번역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문장을 읽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레이먼드 카버’의 간결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주 좋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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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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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이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그 기원에 대해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저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작은 이야기’라고 보자면, 소설은 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은 골라내어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여 점점 살을 붙여 나가 하나의 틀에 잡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라 함은 그 소설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혹은 정교하게 축조된 허구이든 간에, 그 소설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혹은 어떤 깨달음을,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을 주는 데에 그 일차원적 효용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역시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주는 데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쾌감, 이야기를 내려놓음에서 느끼는 안도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주었다는 만족감 등이 복합된 또 다른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큰 효용일지도 모른다.

 

2.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1990년대 초 불안한 시국에서 살던 운동권 대학생인 ‘나’의 이야기를 전반부에는 여자친구인 ‘정민’과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그가 대학생 예비대표로서 북한에 입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및 그가 겪게 되는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도 그가 비디오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실물로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정민’의 삼촌 이야기,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 ‘레이’, ‘헬무트 베르크’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과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정민’과 ‘나’는 ‘더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끊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며,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길용’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종내에는 서로 뒤엉켜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즉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할아버지가 연결되고, 또 ‘정민’의 삼촌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존재를, ‘정민’의 존재를, ‘이길용’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3.

소설이 앞에서 말한대로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줄곧 거대담론에 맞서서 사람들 각각의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거대담론 속에서는 ‘1987년 5월에 몇 만의 군중이...’라는 식으로 숫자로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몇 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거리로 나섰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또한 무수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 소설 속에 있는 ‘나’, ‘이길용’, ‘정민’도 그러한 역사의 거대담론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숫자로 밖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일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알지 못할 -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처럼 -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존재를 증명해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거대담론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모든 작중 화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맞춰’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거대한 시대에 거대한 힘에 맞서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김연수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어떤 것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나갈 것. 거대한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거대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이야기, 거대한 힘이 몰락했다고 말해지는 지금 이 세기. 이 세기에서 개인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분절되고, 개인은 자신의 존재들을 증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할 뿐, 이야기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반갑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 얘기를 해봐. 들어줄테니. 이것이 바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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