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 - Chang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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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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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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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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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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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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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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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맥거핀 > 데이빗 린치 감독전- 박찬욱 감독과의 시네토크 후기

데이빗 린치. 그의 영화들을 보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기로 하는 것은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이다. 뒹굴뒹굴 구르다 채널을 돌리면서 봐도 되고, 배가 고프면 사과를 깎아먹고 와서 봐도 되는 어떤 영화들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만은 피할 길이 없다. 친절한 알라딘에서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를 주었고, 무엇보다도 데이빗 린치와 박찬욱의 만남이 아닌가. 물론 박찬욱 감독님 스스로가 데이빗 린치의 열혈광팬임을 밝히고 있기도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의 어떤 부분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물론 박찬욱 감독이 데이빗 린치보다는 훨씬 친절한 면이 있지만)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이 말은 그대로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에 가져와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감독전에 가는 길에 친구를 기다리며 잠깐 들른 교보문고에서 본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은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씨네토크 시간에 박찬욱 감독님이나 김영진 평론가님이 말씀하신대로 나도 "이게 데이빗 린치가 직접 쓴 책인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조용하고 짤막한 이야기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금은 데이빗 린치스러웠던 것이 짧은 글에서 강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고집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을 보다가 혹은 박찬욱 감독님의 책 <박찬욱의 오마주>를 보면서 다가올 시간을 기다렸다. (<박찬욱의 오마주>는 박찬욱 감독님의 평론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책으로 이 책에는 곧 보게될 영화 <광란의 사랑>의 영화평이 나와있기도 하였다. 다른 부분 보다도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로드무비라고. 이것은 집 잃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친구가 서둘러 도착했고, 허겁지겁 저녁을 먹은 후 7시 30분 시간에 맞춰 씨네토크 및 영화상영이 진행되는 씨네큐브에 도착하였고, 8시부터 씨네토크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금 더 여유있게 도착시간을 말해주었어도 좋을 뻔 했다. 햄버거를 깨물어먹으며 서둘러 도착했는데, 30분 동안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으니까.) 씨네토크는 혼자 진행하기 버거워하시는 박찬욱 감독님의 요청으로 김영진 평론가님과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름 영화 내외적인 내용을 고루 전달해주신 것 같다. 특히 영화 내부의 이야기들보다는 우연히 린치를 마주친 일이며,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심사위원장 카트린드뇌브 이하 모든 심사위원들과 함께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러갔던 일 같은, 박찬욱 감독님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님이 린치와의 인연을 개인적인 회상으로 들려 주는 사이에 김영진 평론가님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린치의 작품 세계나 (최근에는 린치가 안드로메다로 갔다는 말씀 ㅋ) 린치의 작품에 얽힌 일화들 및 배경들을 들려주며 박찬욱 감독님의 이야기에 보완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이어 데이빗 린치의 1990년도 작품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이 상영되었고, 마법의 110분이 지난 후 'Love Me Tender'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와 로라 던의 자동차 위에서의 익히 잘 알려진 키스신과 함께 엔딩크레딧을 보게 되었다.  

글쎄.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뭐 어쩌면 작품의 구조나 이야기,장면들의 분석,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 및 함의를 쓰려고 한다면 몇 페이지에 걸친 긴 분석을 해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능력도 안될 뿐더러, 여기는 영화평을 쓰는 공간도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나 스토리를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 영화는 린치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여(<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제외한다면) 훨씬 구조가 눈에 드러나고 스토리도 눈에 보이는 영화이긴 하나, 이 영화에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스토리라고 해봤자 결국은 여자친구 어머니의 반대 속에서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 감옥을 다녀오고도 사랑을 이루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 밖에는.) 하기는 뭐 데이빗 린치는 매번 그래 왔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저 다만 몇 가지 것들만을 기억해두기로 하자. 시작 부분에 <Love Me>를 부르며 타인의 코를 박살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다시 코를 얻어맞고 <Love Me Tender>를 부르며 사랑을 이뤄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대구(對句). 그 당시에도 여전히 느끼해주시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빛 연기(!)와 뱀가죽 자켓(이런거는 어디서 팔죠?). 주라기 공원에서 애들을 보호하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로라 던의 섹시한 망사그물스타킹(왜 혼자 있을 때 이런 걸 입고 있는지..)그리고 몇 가지의 데이빗 린치의 유머들. 예를 들어 시작부분의 그 세밀한 장소 묘사 자막하며, 니콜라스 케이지가 감옥에 있던 날들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 하며, 튜나 간판 뒤의 'fuck you'와 같은 것들. 그리고 우리의 바비 페루(윌렘 데포)와 그의 교정이 꼭 필요한 잇몸들(그의 악당 연기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다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지막 니콜라스 케이지의 'Love Me Tender'의 느끼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자동차 보닛 위에서의 로라던과 니콜라스 케이지의 키스신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았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가끔 비가 내리는 화면이었더라도 말이다. (영화사 관계자께서 화질 안 좋다고 무지 미안해하셨는데, 괜찮았어요. 옛날 영화가 이 맛이죠.)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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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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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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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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