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성우, 넥슨, 게임, 웹툰, 메갈, 메갈4, 페미니즘, 일베, 오유, 정의당 등등 여러 키워드가 얽혀있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다만 이제 어떤 것이 간명하게 정리되는,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낼 수 있었던 세계는 진즉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태는 동일하지만, 동일한 사태를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지지할 수 있는 지점과 지지할 수 없는 지점은 미세하게 갈라지고, 차이가 생겨난다.

 

그것은 물론 이 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경험과 성향,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 가지고 있는 정보량 등에 따라서 거의 어떠한 사건이든, 그 사건을 보는 개인의 관점은 수백, 수천가지로 갈라진다. 그리고 바로 그 관점이라는 것이 다시 사건에 영향을 미쳐 사건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거의 모든 사건들에는 늘 그것을 요약하려거나 정리하려는 시도, 혹은 간편하게 전선을 재정비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을 정리하거나, 간명하게 만들려는 이 시도 자체가, 사태를 왜곡시키거나 어떤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건에서도 이 관점들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다. (이것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자체가 어쩌면 그 관점들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관점의 차이를 면밀하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바로 그 미세한 차이들이 건설적인 논의로 갈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에서 이 선긋기 시도들은 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선의 이편인가, 선의 저편인가. 당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밝혀라.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지지자, 혹은 어떤 반대자라는 낙인을 찍은 후, 선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혐오하는 퍼포먼스에 재빨리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이 메커니즘은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복잡해진, 어떤 것도 사실은 간명하게 정리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별다른 스포는 없으니 읽으셔도 된다.) 영화에서 악의 축(?)인 양복남 용석(김의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석우(공유)에게 공격당하자, 냅다 소리부터 지른다. "이 새끼 감염됐어!" 그리고 그 순간 효과적인 전선이 만들어져 재빨리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외침은 예를 들어 이것과 매우 닮았다. 이 새끼, 빨갱이야! (여기 '빨갱이'에 다른 적당한 것을 넣어도 효과만점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혹은 '종북'만한 게 없다.) 그렇게 선을 긋는 것. 좀비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부산행>은 내게는 어떤 정치적인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차의 수많은 객차들과 각 객차들에 갇혀 있는 좀비들. (예전에 '촛불 좀비'라는 말을 여기서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리고 좁은 창문을 통해 저 너머 좀비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편의 정상인들. 그러나 과연 이편이 정상이고, 저편이 좀비인 걸까.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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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0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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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0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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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5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08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객차가 새삼 격차로 읽히네요. 맥거핀님이 보셨듯 연상호 감독 전작 특성상 <부산행>에서도 `정치적인 은유`가 안 담길 수는 없었으리라 봅니다. 한국은 지옥의 솥처럼 그게 들끓는 곳 아닙니까.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새누리가 `민주주의` 타령하는 우스운 꼴처럼 한쪽에선 선이며 정의며 말할 수 있지만, 누구든 어느 카테고리에서는 한쪽 귀, 한쪽 눈 감고 보고 말하고 있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걸요.
바쁘십니까. 제가 할 소리 아닌 줄 알지만ㅎ; 글이 뜸한 이웃이 왜이리 많죠; 맥거핀님의 글에 담긴 차가운 맛이 전 늘 좋아요 :)

맥거핀 2016-09-10 01:21   좋아요 2 | URL
부산행은 사실 메시지가 비교적 명징합니다. 그 마지막만 보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죠. 다만 중간에서 그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이 약간 미심쩍은 측면은 있지만요. 거기서 어떤 `징후`를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결말(그러니까 어떤 주장)은 좋다고해도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주장이 도출되는 과정)의 미심쩍음...위에서 제가 쓴 메갈 문제(이것도 아직 현재진행형이군요)도 물론 이와 비슷한 면이 있구요. 다시 말해서 요즘에는 어떤 것이 선 안인지 선 밖인지, 혹은 어떤 것이 정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016-09-08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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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4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북플에 접속할 땐 몰랐는데 맥거핀님 서재가 한달동안 글이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

맥거핀 2016-09-14 01:05   좋아요 0 | URL
요새 조금 뜸하죠? 글쓰기 뿐 아니라, 알라딘도 그다지 자주 오지를 않는데, 마침 오니 cyrus님 댓글이 있어 반갑네요.^^ cyrus님도 좋은, 행복한 추석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고합니다. 영화 <곡성>에 대한 각종 스포 있습니다.)

  

  

 

1.  

<곡성>을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곡성'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곡성 결말', '곡성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곡성>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곡성>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곡성>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2.   

사실 <곡성>은 영화를 본 후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이다. 그것은 영화 내부적인 면에서도, 혹은 외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의 개봉을 전후해서 이른바 '스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어떤 결에서 보면, 이 영화는 스포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어떻게 해석해도 그다지 틀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여러 갈래를 세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예를 들어 인터넷 누군가의 단평대로 이 영화를 그저 경찰관 종구(곽도원)의 한바탕 꿈이라고 해도 안될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이고, 불친절함을 넘어서 여러가지 반대되는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이끌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곡성>은 영화 시작부의 씬을 통해 이미 관객에게 일종의 경고 혹은 힌트를 준다. 던져지는 미끼, 넘쳐나는 떡밥.

 

3.   

그런 장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물론 무당 일광(황정민)이 '살을 날리는' 굿을 펼치는 장면일 것이다. 종구의 딸 효진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인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의해 거의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일광은 그런 외지인을 없애기 위해 굿을 벌인다. 그리고 장면들은 교차된다. 굿이 더 활기를 띠면 띨수록 외지인은 거의 죽음 혹은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며, 아이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관객은 믿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뒤집힌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묻게 된다. 아니, 그러면 그 장면들은 다 무엇이지? 친절한 홍진씨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장면은 외지인에게 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효진에게 사실 살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이것은 사실 꽤 이상하다. 이런 설명은 '감독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차편집 어디에서도 그것은 조금이라도 암시되지 않았다. 관객은 어리석거나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보통의 영화문법을 해석하는대로 일상적인 해석을 했을 뿐이다. 아니 도리어 감독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잘못된 씬의 설계이다. 그 설명대로라면 이 교차편집에서 외지인이 그런 식으로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잉여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맥락에 따라 포장되었지만, 사실 포장지를 풀면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낚시, 혹은 떡밥이라고 부른다. 

 

4.  

이런 식의 어떤 낚시들, 떡밥들이 이 영화에는 넘쳐난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 어찌 이야기들이 넘쳐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당수의 것들은 맥락에 따라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어보면 다른 것이며, 다른 나머지 것들은 그런 맥락조차도 없다. 저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되고, 이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안될 것은 없다. 뭐 좋다. 떡밥이 맛있다면, 그리고 그 떡밥을 먹고도 낚시줄에 걸리지 않고 다시 물로 돌아와 즐겁게 헤엄치며 배를 두드릴 수 있다면 그 떡밥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영화가 뭔가 꺼림칙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떡밥을 삼키고, 이제 마지막 떡밥을 삼키려고 할 때, 그러니까 영화로 말하자면 마지막에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처럼 보였을 때 생긴다.

 

5.  

영화에서 굳이 메시지를 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저 여덟 글자, 그러니까 '절대 현혹되지 마라' 정도가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파멸은 그들의 현혹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마지막에 나홍진은 이상해보이는 두 개의 만남을 이번에도 기어이 교차편집한다.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만나고, 사제 이삼은 그 외지인을 만난다. 그저 종구가 외지인을 만나는 것이 영화적으로는 훨씬 말이 되지만(그 개 앞에도 벌벌 떨던 이삼이 그 밤중에 외지인을 찾아가는 게 많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익스큐즈하자. 그런 것도 익스큐즈 안하면 이 영화에는 익스큐즈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홍진은 억지로라도 그런 구도를 만들어서 다시 교차편집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심을 교차하며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믿지 못하고, 무명의 팔을 뿌리치며, 이삼은 외지인이 악마라는 확신을 끝내 가지지 못하고 의심한다. 이 두 개의 의심, 혹은 두 개의 현혹. (물론 이 영화에는 이 현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초반부터 계속 꾸준히 쌓는 장면들이 있다. 반복되는 현혹과 의심들. 외지인을 의심하는 종구의 생각은 사실 명확한 증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어떤 근거없는 의심들에 더 가깝다.)

 

6.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공격을 읽고(사실 의심 속에서 종교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영화 그 자체'를 읽는다. 이 중 조금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영화란 현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사실 거대한 속임수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모든 일면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오로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한 것만을 본다. 물론 <곡성>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이 영화는 각종 현혹을 차례로 전시하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거나, 혹은 믿도록 암시한다. 위에 든 일광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이야기의 흐름상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흔히 나오는 얘기대로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그 현혹이나 암시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7.   

그것은 사실 이상한 자기모순이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일부러 현혹시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현혹시키는 것임을 전제하더라도 이상하다. 일전에 영화를 마술과 비교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영화와 마술이 통하는 점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건, 마술을 보는 이들이건, '이것이 현혹시키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현혹을 어떻게 잘 구축하는가에 그 공연(영화나 마술)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게임은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속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데에서 생겨나는 쾌감을 즐기는 게임이 아니고, '자 이제부터 속입니다'라고 말한 후, 정해진 규칙 내에서 그 속임의 정교함을 최대한 즐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나홍진의 <곡성>은 그 규칙들을 거의 지키지 않을 뿐더러, 그 속임의 세공은 (의도적으로) 허술하다. 이야기를 어떻게든 짜맞춰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역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짜맞춰도 서사의 빈공간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데, 게다가 이 영화는 거기에 이 메시지마저 덧붙인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8.  

그 결과물이 바로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많은 각종 해석들이다. 수많은 근거가 불확실한 해석들, 흔히 말하는 '스포'들로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들. (물론 내가 쓰는 이 글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재생산되는 방식은 영화의 초반부에 외지인에 대한, 혹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방식을 닮았다. 무명은 이 모든 것이 종구의 의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말했다. 사실 '의심의 문제'에서, 결국 그것이 실제로 진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글들은 그 의심들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닮았다. 영화 속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느 틈에 믿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영화 밖의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틈에 맞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영화 <곡성>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판을 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일광의 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네, 낚시할 때 뭐 어떤 게 걸려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뭣이 딸려나올진 지도 몰랐것제."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뭣이 딸려나올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9.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기 전 종종 덧붙이는 말이 있다. "절대 속지 마시고,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제스처가 그 속임(현혹)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마술사의 입을 쳐다보는 순간, 혹은 그 소리에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눈을 비비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술사는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뒤바꿔놓는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온갖 현혹을 점철하고 있는 이 영화 <곡성>은 속지 말라고 하는 마술사의 그 외침을 닮았다. 우리가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영화는 무엇을 뒤바꾸고 있는 것일까.

    

 

덧.  

사실 이 글에서 나도 한가지 낚시(?)를 했다. 위의 1은 예전에 <황해> 리뷰에서 썼던 문장들인데, 그대로 <곡성>으로 제목만 바꿨다. 이것은 나홍진의 영화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모두들 <곡성>에서 텅빈 냉장고 문을 열어보이며, 이것이 증거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주길 바란다.) 이야기에서 결락을 만들고, 이야기를 괜히 비트는 것은 이미 <황해>에서부터 보던 방식이며,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에 영화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는 글을 삽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마태복음의 한 대목. 원래 인간은 쉽게 현혹되고, 쉽게 미망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수련을 쌓은 제자들도 그런데, 우리 범인(凡人)들이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현혹되지 말라고 하며 각종 현혹을 남발하는 영화보다는, 어쩔 수 없이 현혹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에 대해 묵묵히 그려나가는 영화를 보고 싶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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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0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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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7 0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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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8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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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일1식을 하고 있다. 몸이 가벼워지는 듯도 하고, 먹는 데에 그다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어서 편리한 점도 있다. 그것만으로는 괜찮다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문제는 있다. 그것은 이 1일1식이 철저한 사전계획에 의한,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쩌다 참으로 애매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가. 어떻게 보면 1일1식이 아니라 1일다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해진 식사는 한 번 뿐이지만, 그 이외 시간에 자꾸 뭔가 자잘한 것을 먹게 되거나 먹는 것을 상상하고 있으니까. (지금도 이 글을 쓰기 직전, 냉장고를 뒤져서 나온 초코파이 한개와 에이스 과자 소포장 한개를 베지밀 에이(담백한 맛)를 곁들여 먹었다. 먹지 않으려 했지만, 먹지를 않으니 자판을 칠 힘이 없어서 먹었다...라고 합리화 중.)


어쩌면 정말 문제는 먹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도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그나마 조금 규칙적으로 살 때에는) 아침 저녁으로 책을 잡고 읽을 때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하루에 한 번 책을 잡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 - 그러니까 서평단 도서같은 것을 붙잡고 있으니, 이건 어쩌면 강제적 1일1식, 아니 1일1독 같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 내지 반대급부로 가끔 남는 시간에는 독서를 하지 않고 책상 옆에 쌓여 있는 '근시일내에 읽으려고 산 책들 1번 더미'를 바라보며 저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1번 더미에서 어떤 책을 빼서 2번 더미로 옮겨 놓을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게 아닌건가. 강제적 1일1식이 장점도 있는 것처럼 이런 강제적 독서에도 장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무엇인가를, 그것도 아마도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읽지 않을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것은 사실일테니 말이다.


지금의 강제적 독서, 그러니까 하루 한끼는 이번 서평단 도서인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집은 사실 서평단 도서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 그것은 이 단편들이 하나 끝날 때마다 어떻게든 떼어내고 다음의 단편으로 넘어가려는 나를 끈덕지게 붙잡고 놔주지 않은채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빨리 시간에 쫓겨 먹어야 하는 강제적 1일1식보다는 조금 더 공들여 먹어야 하는 손님들과 함께 하는 저녁만찬에 가깝다.) 일주일 전에 시작했을 때에는 700페이지를 조금 넘는 책이니 하루에 100페이지씩 읽으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오늘, 그러니까 파트장님께 리뷰를 올리겠다고 말씀드린 오늘에 겨우 소설집의 반에 해당하는 '레인트리 연작'까지를 읽었을 따름이다. 나머지 반을 그보다 훨씬 빠른 시간안에 읽을 수 있을까. 더구나 이미 난삽해질대로 난삽해진 메모를 그러모아(서평단 도서를 읽을 때는 늘 메모를 남기지만, 이번 메모는 아직 반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다른 때 메모의 두 배다.) 리뷰까지 쓴다고? 아...누가 이 책을 골랐단 말인가...누구긴 누구인가, 바로 나지.


지나간 내 선택을 원망하든 아니든, 아무튼 마지막 선택을 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지금까지 징징거린 걸로 봐서는 분명히 이 중의 몇 권은 빼야지 싶은데, 나란 인간은 원래 한두 번 당했다고 정신을 차릴 인간이 아니니, 지르자 질러. 어차피 이러든 저러든 마지막이니.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시작부터 832페이지짜리 책을 고르고 앉았다. 그래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개봉하기 전에 이 책을 읽고 싶은 소망이 있으니...어쩐다.



홀, 편혜영, 문학과지성사


편혜영의 전작들을 생각해봤을 때 표지의 저 집은, 아니 저 홀(hole)이 '행복한 나의 집'일 리는 없다. 저 구멍에는 무엇이 들어서서 빠져 나오려는 우리를 으스스하게 잡아당길까.



아머 - 개미전쟁, 존 스티클리, 구픽


거대 개미의 모습을 한 외계생명체가 지배하고 있는 행성에서의 전쟁이라고? (책 소개에 나온 대로) 설정만 봐서는 그 유명한 <스타쉽 트루퍼스>가 확실히 연상되는데, 그와 달리 조직보다는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더 맞췄다니 흥미로울 것 같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문학동네


이름부터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이 작가는, 마르케스 이후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한 남자의 죽음과 과거를 통해 마약과 폭력, 광기와 야만으로 점철된 콜롬비아 현대사를 반추한다고 한다. 예전에 EIDF에서 본 다큐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도 생각나고, 얼마전에 본 영화 <시카리오>도 생각나고...



저항의 미학, 페터 바이스, 문학과지성사


3권 통틀어 1500페이지가 넘는다. 문제는 단지 페이지 수만이 아닌 것 같은데...

지르자, 질러.(라고 써놓고, '어차피 안될거야.'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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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16-04-0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에 겐자부로 책은 정말 ㅠㅠ 생각할 거리는 많은데 서평은 써야겠고 해서. 이건 제가 지금 서평할 수준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그렇다고 다른 글을 만족스럽게 쓴 건 아닙니다만..최소한의 의견만이라도 적어야 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썼습니다ㅠㅠ 맥거핀님 리뷰가 기대됩니다.

맥거핀 2016-04-05 23:02   좋아요 2 | URL
아니..기대를 하시면 안되고요.^^; 오에 겐자부로 책은 조금 더 여유있게 시간을 가지고 만났으면 좋을 책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서로서로 의견도 많이 나누고, 같이 독서회하듯이 읽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또 각자 소설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를 것으로 생각되구요. 아무튼 서평단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를 만나게 되어서 좋군요. (아마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읽지 않았겠지요.)

2016-04-05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의딸 2016-04-05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책들 메모의 두 배... ^^ 그렇게나 기운을 빼는 책을 왜 읽어야하지 할때가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맥거핀 2016-04-05 23:05   좋아요 1 | URL
그래도 이런 책을 읽게 되면 꼭 성취감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또 제 안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서 (진은 빠지지만) 또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아요. 메모라는 건 별건 아니고, 그저 제 여러 질문들이죠,

CREBBP 2016-04-05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욕심에 저항의 미학을 넣고 싶은 걸 꾸우욱 참았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하루에 100쪽씩 읽기도 힘겹더군요...위에 하신 말씀 모두모두 동감~

맥거핀 2016-04-05 23:06   좋아요 1 | URL
아마 저 책은 선정은 안되지 않나 싶구요. 선정이 안되더라도 내용을 보면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책은 모두들 힘드셨던 것 같아서 저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cyrus 2016-04-05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신간평가단 활동을 안 하는 이유가 강제적 독서가 부담스럽고, 새 책을 고르는 일도 힘들어서 그래요. 그냥 신간평가단 회원분들의 글만 봐도 좋네요. ^^

맥거핀 2016-04-05 23:07   좋아요 1 | URL
cyrus님이야 원래 자발적인 독서를 엄청 하시는 분이니..이런 것은 저같이 강제가 필요한 사람(?)이 해야죠.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신간평가단 책이나마 읽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이바 2016-04-06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저만 힘든 줄 알았어요. 모임에서 읽고 토론하면 좋았으리란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도 저항의 미학 읽고 싶어서 일단 장바구니 넣어놨는데 세 권 다 역자가 다르더라고요. 대산문학총서는 번역가들이 지원하고 그 중 선정, 작업 후 출간되는 걸로 아는데 이 경우는 워낙 양이 방대하고 까다로울 수 있는 번역이라 재단 측에서 직접 의뢰한 건지 어떤건지 궁금해지더군요. 암튼 이런 책들은 나왔을 때 주문해야 하는데 요즘 읽으려고 주문한 책들이 쌓여서... 마지막 도서이니 저항의 미학이 선정되어 서평단 여러분이 읽으며 장렬히 산화하는 걸로... 안 되겠죠? ㅎㅎ

우끼 2016-04-06 14:58   좋아요 0 | URL
장렬히 산화 ㅋㅋㅋㅋ 멋져요..

맥거핀 2016-04-08 14:37   좋아요 1 | URL
아..그건 몰랐는데요. 세 권이 역자가 다르다니 조금 이상하네요. 세 권이라 해도 한편의 소설인데 역자가 다르면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요? 학술서 같은 데서는 나눠서 번역하는 게 흔하지만, 소설에서 그렇게 나눠서 번역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군요. 그래도 여전히 읽고 싶기는 합니다만..저도 장렬히 산화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선정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혹 선정이 된다면 나중에 리뷰쓸 때 조금 고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는 합니다만...

에이바 2016-04-09 15:24   좋아요 1 | URL
다시 책소개글을 읽으니 아래에 나와있더라고요. 십년 걸렸대요. 6년 여 번역, 2년 다듬기, 일년반 편집... 독문학자 세 분이 뭉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뤄낸 쾌거라 봐야겠더군요. 책소개를 보면 영어권에서는 1권만, 프랑스와 터키에서만 완역됐대요. 그렇다면 이 책을 엄청 홍보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데 왜 잠잠한건지...ㅜㅜ

우끼 2016-04-09 17:05   좋아요 0 | URL
엄청난 책이군요!! ㅠㅠ 기대된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요? 왜 잠잠할지 이유도 궁금하네요.. 선정이 안된다해도 꼭 읽고 싶은..

에이바 2016-04-10 12:45   좋아요 1 | URL
우끼님 대산문학총서는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소개하는데 의의를 두고 번역작업을 지원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상품가치랄까 그런데 연연하지 않아서 홍보도 미디어 소개 정도에 그치는 듯 해요. 저항의 미학 같은 경우도 완역은 프랑스, 터키 밖에 없고 한국어 번역도 10년 걸렸다는 문구 같은 걸 맨 앞으로 빼도 될텐데 책소개 저 아래에 숨겨놨고.. 내용은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럽 좌파 운동인데 운동가보다는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런 거래요. 암튼 이 책은 기념비적인 작업이라 수요가 꾸준할 것 같은데 대체로 고전으로 꼽히는 (인기가 없는?) 책들은 절판될 가능성이 높아서 나왔을 때 미리 사둬야 한다는게 제 생각...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도 개정판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어서 넘나 슬퍼요...ㅜㅜ 암튼 평가단 도서에 기대를 걸고 있어서(말도 안 되는?) 발표나면 구입하려고 해요

맥거핀 2016-04-11 23:59   좋아요 1 | URL
아..그런 내부사정이 있었군요. 뭐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번역가가 다른 것도 이해할만은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한 사람이 번역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아마도 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것 같기는 하군요. 아무튼 에이바 님 덕분에 저도 좋은 책 알고 갑니다. 대산문학총서에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이번에 오에 겐자부로 책에서도 나온 맬컴 라우리의 <화산 아래서>도 이 시리즈로 출판되었죠. (저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보지를 못했네요. 오에 겐자부로 책을 읽으면서 후회했습니다. 읽어둘 걸..) 한번 도전한다는 자세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막 알라딘 부천점에서 찍은 사진.
누군가가 방금 팔고 간 오체불만족.
행동하는 알라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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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3-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오체만족의 삶이라고 누가 댓달았길래 엄청 웃었습니다만 ㅎㅎㅎ

책한엄마 2016-03-25 18:10   좋아요 0 | URL
오체 full만족이었다고 하더군요.ㅎ

맥거핀 2016-03-25 19:03   좋아요 2 | URL
며칠 사이에 아주 기상천외한 드립들이 난무하더군요. ㅎ 그 중에 몇 개는 그분의 장애와 연결지은거라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억의집 2016-03-25 19:10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오체대만족이라고 쓴 댓글보고 한참 웃었어요. 동시에 사람 참 바보 만들기 쉽구나 하는 생각도..

cyrus 2016-03-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부탁해>가 심심해하지 않겠어요. ㅎㅎㅎ

맥거핀 2016-03-25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곧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이책들이 꽤 늘어나지 않겠습니까..나중에는 안받아줄지도...근데 지금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과연 사실 분이 있을지..

기억의집 2016-03-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자기계발서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여서....

맥거핀 2016-03-26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akardo 2016-03-2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저는 애초에 저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았으니 이 사태가 참으로 흥미로울 뿐입니다. 산 분들은 속이 좀 쓰리실 듯.

맥거핀 2016-03-26 01:22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akardo님. 근데 책을 쓸 때의 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100% 알 수 없으니까요. 그 책으로 인해 읽은 누군가가 좋은 영향을 당시에 받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할 수 만은 없겠죠.^^ 아무튼 대체로 책을 읽으신 분들은 꺼림칙만 면이 더 있으실 듯 합니다.

희선 2016-03-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뭔가 사기를 쳤나 하는, 팔 다리가 없는 걸 본 적 있으니 그건 아닌가보다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랐군요 안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아봤어요 무슨 일인지... 왜 그랬을까 싶네요 사람이 잘 되다보면 뭔가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겠어요(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잊어버린다고 해야 할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던데 그러다니, 지금까지 좋게 생각한 사람은 배신당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예전에 책 한권 보고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때는 그게 진짜였을 텐데, 그것까지 안 좋게 되었네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 하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6-03-26 01: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이번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장애와 연관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장애와는 또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장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쌓아온 모든 일들이 또 이번 일들로 다 폄하되는 것도 그렇게 옳지는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이번에 저지른 일은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요.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애 애쓰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도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게지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 3/4월호에 '영화여행을 시작하는 시네필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쓴 몇 편의 글이 실렸다. 100편의 영화, 영화사(史)의 순간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저자 구회영(김홍준 감독의 필명)과의 대담 등등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10권의 책'에 대한 글이 있어, 나중에라도 찾아보기 쉽게 여기에 목록과 소개의 일부를 옮겨둔다. 모두 한글로 출판된 책이다.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지만,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볼 수는 있겠지.

 

먼저 이 책들은 '바로 시작하면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들이다.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을유문화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라고.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민음인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것.

 

 

쇼트, 엠마뉴엘 시에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시점, 조엘 마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몽타주, 뱅상 피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일종의 가이드 형식의 책들.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없는 책들이다.

 


위대한 영화, 로저 에버트, 을유문화사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으라고. (아..근데 큰 일을 하루에 세번이나 보지는...이라는 쓸데없이 더러운 첨언.)

 













세계영화사, 데이비드 보드웰 & 크리스틴 톰슨, 시각과 언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볼 책.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의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절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이라는 점...그렇다면?

 

 

세계 영화 대사전,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 편집, 미메시스

위의 책의 대안. 정성일의 충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을 것.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강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라고 정성일은 충고한다. 이 책은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글이 일기처럼..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를 하기가..)

 

 

필름메이커의 눈, 구스타보 메르카도, 비즈앤비즈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일종의 다른 방법의 독서. 이 책은 거기에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

 

 

그리고 아래의 책들은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지금은'에 있다.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시네마 2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두 권의 책의 번역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이유라고.

그러니까 먼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를 읽을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길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향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이나 그 전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 먼저 설명을 들을 것.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시각과 언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 한나래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울력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 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비, 도서출판b)를 먼저 읽으라고. 자신(정성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이모션북스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며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지"나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하.

 

 

덧.

물론,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일 테다. 어제 조금 지나간 영화, 오승욱의 <무뢰한>을 보았다. <무뢰한>은 몇 가지 것들(예를 들어 어떤 허세들 같은 것, 혹은 불친절한 생략들)을 견뎌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남자감독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 김혜경(전도연)인데, 영화 속에서 끝내 바닥에 이르르는, 그래서 그 바닥으로 내려보내지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여성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화의 중심축은 정재곤(김남길)에게 끝까지 머물러 있는데도. 어스름에서 시작해서 어스름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어스름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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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7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ell-yuran 2018-02-06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뢰한 정말 좋은 영화죠!

맥거핀 2018-02-19 15: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마지막 그 김남길의 쓴웃음이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