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인의 고백, 아틱 라히미,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속된 전쟁으로 페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그곳에서 한 때 전쟁영웅이라고 불렸던, 이제는 총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는 한 여인의 삶. 포성은 계속 울려퍼지고, 먹을 것을 달라고 딸들은 보채고, 끊임없는 기도에도 남편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는 왠지 익숙하다는 선입견을 준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의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 역시 고통스럽지만, 스크린 밖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과 또한 우리는 그런 것에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줄 것이라는 선입견 말이다.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영화는 슬슬 이상한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고통 속에서 기도와 인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였던 여자는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편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에서 영화가 달라지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녀가 고백을 하는 시점부터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만드는가. 중요한 것은 고백의 내용이 가지는 어떤 파괴력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즉 그녀가 발화자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화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듣는 쪽이었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메추라기들을 싸움 붙이는 도박에 미쳐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를 도박빚 대신 나이든 남자에게 넘겼고, 그녀 역시 단지 전쟁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인내하는 삶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남편은 밖에서는 전쟁영웅일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었고, (영화에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말을 하는 쪽은 그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이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니 말을 넘어서 이제 둘 사이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아내이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은 그녀의 보호 없이는 죽고 말 것이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부의 관계, 즉 역전되어 버린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이 인습과 굴레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조차 표현하기에 부족해보이는 이 이슬람 사회 전체에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시작은 그녀를 몸을 파는 여자라고 오인한 한 젋은 군인과 그녀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어린 그녀가 남자와의 성관계를 처음 배운 것은 거칠고 나이든 그녀의 남편으로부터였고, 그 관계에서 그녀는 단지 남편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르다. 이 젊은 군인은 여자와의 관계가 처음이고, (처음의 시작은 남자의 오인과 일방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관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그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성적인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가장 큰 메타포는 그 남자가 극도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그녀고, 이 남자에게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간 소년병 출신이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도 그녀다. 즉 이 관계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그녀이고, 그 남자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그녀이다.

 

즉 이 영화에서 조금씩 희망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입을 닥치고 난 이후이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이어지는 폭력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과 총소리, 종교지도자들의 지나친 간섭, 식물인간으로 큰 짐덩어리처럼 보이는 남편,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들과 잔혹한 살해, (그녀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어린 시절에 그녀를 지배했던 아버지의 폭력.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이고, 남자들의 폭력이다. 그런데 그녀의 고백과 맞물려 이야기의 중심이 조금씩 여성들에게로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나아져 간다. 짐덩어리에서 이제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남편, 그녀가 피신하는 그녀 이모집의 기이해 보이는 여성공동체(물론 이것이 기이해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또 한편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사람이 '고모'가 아니고 '이모'임을 주목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니라 두 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녀와 젊은 군인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점하는 우위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그녀의 이모는 약간의 유머 섞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잘 하는 남자가, 전쟁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폭력, 외부의 만연한 폭력은 사회 내부의 폭력, 작게는 한 집안 내부의 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이 집 안에서 벌이는 메추라기들을 데리고 하는 투기(鬪技)는 외부의 지독한 전쟁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성이 지배하는 작은 사회에서는 폭력은 없다. 여인은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고백을 하며 돌보고, 이모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여인을 감싸 안으며, 또 여인은 소년병으로 학대받아야 했던 젊은 남자를 품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결국 폭력과 전쟁이 지배하는 부계사회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이 지배하는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과 그녀가 보여준 행위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진전이기도 하다. 그것의 시작은 단지 몇 마디의 말, 고백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의 힘, 그것이 가지는 작은 파괴력이 어쩌면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동력으로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덧.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데, 빛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 답답함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때로는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는 인물의 감정을 잘 잡아낸다는 주된 효과 외에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잘 어울려 영화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주인공을 맡은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영화 초반부와 영화 마지막에 이른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아..그리고 이 영화는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영화로 만든 경우다('제2의 이창동'이라는 카피가 있어서 조금 웃겼다). 공쿠르상을 받은 소설이라고 하는데, <인내의 돌>이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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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0-1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찜해두고 있는데 요새 비프 영화들 골라 보고있느라ᆞᆢ다음주나 이번 일욜까지 걸려있을 지 모르겠네요. ^^ 오랜만에 맥거핀님 영화이야기 반가워요. 저도 뜸하다 못해 아주 밀려있지만요.

맥거핀 2013-10-11 14:44   좋아요 0 | URL
아..비프. 가고 싶었는데, 주말에 간다해도 제대로 영화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올해에는 몇몇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매년 이맘때 쯤이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이 늘 부럽습니다. 다음주에 EIDF가 있는데, 그곳에서 아쉬움을 달래야겠습니다(몇몇 영화를 예매해두었어요). 볼 수 있을 때 보세요. 영화는 볼 수 있을 때 봐야합니다.^^

암튼 프레이야님 오랜만에 반가워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아이리시스 2013-10-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어째서 원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의 고백]인가 했더니 그래서 그랬군요. 리뷰가 쏙쏙 들어와서 좋아요. 영화제는 진짜 활짝 핀 꽃같아요. 정말 재밌어보이는 영화들이 많은데 티켓 경쟁에서도 밀리고 시간도 겹치고 아무리 많이 봐도 결국 놓치는 게 있고 그래서 아쉬워요. 올해는 특히 관심영화가 엄청 많은데..

EIDF도 재밌을 것 같아요. 부럽.. 영화제도 신나게 개막식 한번쯤 가보고 싶은데 올해는 정각에서 3초만에 티켓경쟁에서 실패... 아, 저희집 근처에도 예술관 있어서 이 영화 하네요. 가봐야겠어요.^^

맥거핀 2013-10-14 14:58   좋아요 0 | URL
근데 대체로 영화제를 가면 말이죠, 여러 편 많이 보기는 하는데, 정작 좋은 건 1-2편 밖에 안되요. 여러 편 봐도 다 잘 들어오지도 않구요. 처음에는 막 의욕적으로 하루에 3편 이렇게 보다가, 술에 쩔고, 피곤에 쩔면 나중에는 하루에 1편, 그것도 영화관가서 막 졸고 있어요. (아마도 다들 그러지 않나요?)

EIDF는요, 거기에서 상영하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동시에 EBS에서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시간만 잘 알아두면 좋은 작품들을 집에서도 볼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블랙 아웃>이라는 작품 좋을 것 같아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빛을 찾아서 공부를 하는 얘기예요. 그 동네에는 밤에 불이 있는데가 잘 없으니까.

으흐흐..3초만에 티켓경쟁에서 실패요? 저 이번에 야구 플레이오프 게임보려고 예매해볼까 생각중인데, 저도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LG야구는 올해 가을야구 못보면 또 언제볼지 모르는데..이번에도 11년만에 진출한거라..

넙치 2013-10-1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볼까말까 망설이는 중인데 맥거핀님 리뷰 읽으니 봐야겠어요. 불끈!ㅋ eidf 올해는 제가 놓쳤나보다 했는데 다음 주란 정보도 얻고 가네요.^^

맥거핀 2013-10-14 15:01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18일 개막입니다. 저도 이번에는 가능한한 많이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이번에 흥미로워보이는 작품들이 많더군요. 제가 위에 리뷰 쓴 작품도 좋아요. 예상했던 패턴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라 좋았습니다.

2013-10-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후반부군요. 달라지는 삶, 처음과 너무 다른 여주인공. 갑자기 <바그다드 카페> 생각이.. 이 영화랑 전혀 다르지만.ㅎ / 블랙아웃, 저도 관심.. 비프에서 페루음악에 관한 다큐 봤는데 좋았어요. 그리고 태국영화 하나 봤는데, 이건 보고 나서 친구들하고 씹는 재미가 있었다는..ㅋ

맥거핀 2013-10-16 17:10   좋아요 0 | URL
아..비프 가셨었군요. 영화제의 참맛은 영화보고 나와서, 돼지국합 한그릇, 혹은 회라도 한접시, 돈이 안되면 오징어 한마리라도 먹으면서 잘근잘근 씹는 맛이죠 (아..오징어 말한 겁니다.ㅋ).

아..그리고 밑에는 도움이 될까 싶어서 EIDF 영화들 EBS 시간표예요. 시간만 잘 맞추면 양질의 다큐들을 집에서 볼 수 있어요. (뭐 이러니까 홍보하는 것 같군요.;;)

http://www.eidf.org/kr/movie/tvSchedule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추천도서를 올려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한 분야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정해볼까, 아니면 예전처럼 '밀어드리기 특집'이나 해볼까, 아니면 될 가능성이 높은 책들로만 골라볼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다른 분들의 추천 도서만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참...다른 서평단 분들의 추천도서를 읽다보니, 다들 정성스럽게 추천의 변을 올려주셔서 이 책을 보면 이 책이 좋아보이고, 저 책을 보면 저 책이 좋아보이고, 올리신 책들 중에 어떤 책이 되어도 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물론 원점이란 결국 (책이 선정될 가능성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는 것이다. 서평단을 하기로 한 목적이 예술 분야나 과학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자는 생각이었으므로 그 분야에서 몇 권의 책들을 골라본다.

 

 

 

빅 아카이브 / 스벤 스피커 / 홍디자인

 

'아카이브'라는 것은 결국 시간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아카이브라고 하면 통상 지루한 문서들의 저장, 단조로운 목록들, 단지 기록으로서의 가치 같은 것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 그 아카이브를 창조의 원천으로 활용한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카이브는 20세기 예술에서 시간의 집적을 넘어서, 새로운 시간의 창조에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록의 집적이라는 19세기의 아카이브는 이제 그것을 읽는 우리까지 기록하는 거대한 '빅 아카이브'가 되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카이브를 만들었지만, 이제 아카이브가 우리를 만든다.

 

 

위대한 수학문제들 / 이언 스튜어트 / 반니

 

페르마의 정리, 푸앵카레 추측, 리만 가설, 4색 정리...지나가다가 혹시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수학의 대표적인 난제들이 있다. 대체로 난제들일수록 문제 자체는 명확하고 간결한 경우가 많으며, 의외로 답이 간단할 듯한 인상을 준다(물론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그저 수학자들의 단순한 지적 게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여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한 가지 난제의 해결은 단순히 수학자들의 만족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크게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사진 예술의 풍경들 / 진동선 / 문예중앙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는 우려를 받았고,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시각예술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책은 사진이 발명된 초창기의 근대 사진부터 지금까지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의 역사를 주요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며 일별하는 책이다. 모든 예술에서 결국 혜안을 기르는 것은 그 분야의 좋은 작품들을 수없이 맛보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한 지각과 기호와 이미지의 혜안을 조금이라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을 상상하다 / 케빈 맥도날드, 마크 커즌스 / 커뮤니케이션북스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다큐멘터리에 둘러쌓여 있다. 이제 TV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나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사건을 재연하는 시사 프로그램, 리얼리티 쇼, 생활밀착형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 중요한 스포츠 경기의 재구성 등등 이제 보도나 오락, 스포츠 프로그램에서도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카메라가 발명된 거의 초기의 다큐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까지 중요한 작품들을 골라 평론과 인터뷰 등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서 현실을 새롭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힘과 그 위험, 그리고 앞으로서의 가능성을 동시에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 없는 우주 / 빅터 J. 스텐저 / 바다출판사

 

진화학적 관점에서 지적설계론의 허구를 살펴본 다른 책들과 다르게, 이 책은 천체물리학자가 물리학적 관점에서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책이다. 이 천체물리학자가 사용한 방법은 '우주에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상정하고, 그 가설을 입증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가설이 어떻게 되었는지의 여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입증의 과정에서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물론 믿음은 앎보다 늘 우선하므로, 여전히 논란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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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스토커>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는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와 <스토커>에 대한 리뷰는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연작의 선상에서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투리들 몇 가지를 간단하게 남겨본다.

 

 

1.

<박쥐>에서 인물들은,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 혹은 일종의 순환(악순환)의 구조에 놓여져 있다. 먼저 이 이야기들의 전제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부 상현(송강호)의 몸 속에서 바이러스들은 돌고돈다. 상현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는 이브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실험에 자원한다. 그러나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한다. 그 순간에 그를 살려내는 것은 수혈 과정에서 그의 몸 속에 주입된 뱀파이어 바이러스다. 즉 상현의 몸 안에는 두 가지의 바이러스가 공존한다. 이브 바이러스와 뱀파이어 바이러스. 이브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가까이 갈 것이고, 뱀파이어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죽지는 않겠으나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즉 상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신부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극단 안에서 왔다갔다 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그는 죽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라는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이상한 딜레마에 처해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상현이 이브 바이러스를 스스로 몸 속에 주입한 것은 전적으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된다는 악이다. 즉 상현은, 아니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몸에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존재이다. 악이, 즉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악해질 것이며, 선이, 즉 이브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더 선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일종의 비유로서 보여지듯이 그렇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이 더 몸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즉 다시 말해서 이브 바이러스가 몸을 더 지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죽음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이 '이브'이고 이것이 젊은 남성들에게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박찬욱의 유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브'는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곧 위해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속 태주(김옥빈)처럼 말이다.) 즉 선해지기 위해서는 댓가가 따른다. 악의 길은 늘 더 쉬우며, 늘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행에 댓가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 하나는 죄책감과 같은 댓가다.

 

그래서 대체로 (상당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들은 선행과 악행 속에서 적당히 왔다갔다 한다. 마치 '박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박쥐는 이중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솝 우화의 박쥐일 수도 있고, 뱀파이어의 비유로서의 박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의 무리에도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악의 무리에도 낄 수가 없다. 그 중간 어디에서 끊임없이 양쪽에 왔다갔다 하여야 하는 일종의 순환 지옥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그것을 영화의 영어제목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thirst, 즉 목마름이라는 것은 결국 결핍의 상태이며, 그것은 뱀파이어의 혹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뱀파이어 상현은 목이 말라서 끊임없이 피(욕망)를 갈구하지만, 그는 피라는 욕망, 혹은 태주라는 욕망을 충족하고 나면 다시 일시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그것을 멀리한다. 그러나 그것을 멀리하는 것을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악순환)되며, 그것은 보통의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이는 직관적인 장면으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상현은 태주를 죽이려 하고, 죽어가는 태주에게 순간적으로 욕망을 느낀 상현은 그녀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일시적인 목마름이 충족된 상현은 다시 죄책감이 들어 태주를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으로) 살리려 하고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다시 상현의 피를 마신다. 즉 상현과 태주의 피는 돌고돈다.) 그리고 이 '목마름-악행-죄책감-악행을 멀리함-고통-목마름'이라는 순환은 계속 반복된다. 마치 그의 이름 '현상현'처럼 말이다.

 

2.

이 돌고 도는 것은 박찬욱의 전작들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복수의 등가교환이라는 환상으로서 말이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등가교환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박찬욱의 전작들이 보여주듯이 완전한 등가교환은 존재하지 않고 늘 추가적인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러므로 복수라는 것이 등가교환의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복수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등가교환으로서의 복수는 계속 무엇인가를 남기고, 그 남긴 무엇인가는 실물이 되어 다시 다음의 복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등가교환은 환상이나 정신병에 가깝고, 등가교환의 시도는 늘 잔여물들을 남기고, 대체로 그 잔여물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체로 오인과 오해를 담아) 확대되어 거대한 실물로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되돌아왔다. 그 주인공들은 진짜 실물을 보기도 했고, 때로는 실물이라고 믿어지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 <박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태주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강우(신하균)의 살해를 감행한 상현과 태주는 이제 당연하게도 실물로서의 강우를 만난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 물을 흘리는 강우를 말이다. 그렇다면 박찬욱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잔여물들이 남긴 것, 즉 다음의 복수는 이어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결국 라여사(김해숙)에 의해 이루어지는 태주와 상현에 대한 복수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복수는 전작의 연작들과 상당히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복수와는 달리 이 복수에서 라여사는 지켜볼 뿐, 결국 복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를 감행하는 것은 상현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현은 영화 속에서 두 번째 자살을 감행한다. 두 번째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그가 이브 바이러스를 이용한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기 때문이다(이 연구를 담당하는 박사는 심리적으로 자살과 순교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우며, 그가 자살의 방편으로 이 연구에의 참여를 자원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자살은 다르다. 처음이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라면, 이 두 번째는 자살을 가장한 순교다. 그는 결국 돌고도는 복수, 혹은 고통스러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멈추는 것이다. 일종의 소멸이라는 형태로의 자살.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교를 실행하기 전,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신도들을 일종의 거짓 퍼포먼스로 밀어낸다(선에서의 탈출). 그는 자신이 그저 선과 악에서 왔다갔다 하는 복수와 정념에 휘둘리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물론 상징으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의 죽음이며,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어떻게든 애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상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것은 그가 결국 애쓰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다 쉬운 길은 태주처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마음껏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이러한 인물들은 딜레마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애를 쓴다.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는 소멸의 길을 택한다. 즉 복수 연작의 인물들과 상현은 다르다.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 결과 그들은 죽거나, 혹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미치거나, 혹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영혼의 구원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상현은 그 육체를 기꺼이 소멸함으로써, 혹은 그 애씀의 댓가로서 영혼의 구원은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면 태주는 이렇게 말하는 인물이다.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을 그 이후에 한 번 더 보았다.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해원. 그래서 나는 해원이 조금 무서워졌다.)

 

이 마지막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들의 대단원이며, 결국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이 라여사의 강한 응시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장면은 우리가 영화라는 사각의 스크린을 보듯이, 라여사가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때 박찬욱은 우리가 라여사의 위치에서 이들의 소멸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이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애쓰는 그의 모습과 그들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두 켤레의 구두이다. (그 구두는 영화의 중반부 그들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4.

그리고 그 다음 박찬욱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구두 이후의 이야기, 구두를 신었던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결국 구두를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 이야기인 <스토커>를 찍었다. 구두를 벗고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성장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두에서 시작하여 결국 구두로 끝났던 <박쥐>의 루프가 아니라, 이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형철은 <씨네21>에서 이 영화가 은유로서의 성장담임을 훌륭한 글로 잘 보여줬는데, 나도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형철이 말했듯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은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논리가 없다.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은유는 마지막에 하나의 장면으로서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인디아는 아버지의 벨트를 매고,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삼촌이 준 하이힐을 신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은유로서) 아버지가 되어 보았다가, 삼촌이 되어 보았다가, 어머니가 되어 보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의 혼합으로서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성장하는 이들은 타인이 되어 보면서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예전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였고, 타인과의 공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고,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발목이 붙잡힌 올드보이들이었다.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살펴볼 수도 있는데, 인디아가 성장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반복하자면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인물들은 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 결과 <올드보이>에서는 혀를 잘리는 징벌을 받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은 입이 꽁꽁 틀어막힌 채로, 자신에 대한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격정적인 토론을 들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디아는 다르다. 인디아는 들을 뿐더러, 심지어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까지' 듣는다(그리고 그것은 <박쥐>의 상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아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하게 타인이 되어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교차편집의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교차편집이 인디아와 다른 인물을 동일하게 놓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이 때 인디아는 '영화적으로도' 그 순간 그 인물이 되어보는 중이다.)

 

지금까지 놓고 보면 박찬욱의 <스토커>는 할리우드라는 '새로움'과 동시에 이야기로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찬욱의 길고 긴 복수의 이야기는 상현의 소멸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제 박찬욱은 그것을 뒤로 하고, 새롭게 성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5.

여담으로서 하나 붙여두자면 오우삼의 비둘기와 같은 것이 박찬욱에게는 계단인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들에서 이야기에 계단을 활용하는 것과 그것을 촬영하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꽤 흥미롭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자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처음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만나는 공사장 건물의 비계(飛階)처럼 보이는 빈 계단과 그것을 역광으로 잡는 숏과 같은 부분, <올드보이>에서 독특하게 생긴 회상 장면에서의 학교 계단과 카메라의 움직임(동선),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가 오르는 나선형의 아파트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가 하늘을 날기 위해 오르는 계단을 건물 외부에서 창을 통해 보여주는 것, 그리고 <스토커>에서 인디아의 집에 있는 나선형 계단. 특히 <스토커>는 계단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계단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그 계단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디아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그녀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해준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계단의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덧.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뭔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올 때마다 내심 찜찜했는데, 이제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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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10-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제가 궁금해했어요(진짜에요!). 맥거핀님 글은 리뷰든 페이퍼든 뭔가 명확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해요. 이게 글을 잘 쓴다는 거겠죠? (전 중언부언, 어불성설의 일인자..)

전 <박쥐>가 박찬욱 감독 영화 중 가장 기묘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었고(공포나 경악이 아니라 뭔가 이상한, 기묘한) 그러나 에밀 졸라의 원안이 미친듯이 좋았기에 영화에 대해 약간의 냉소가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상현이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이 이 영화 중 가장 기억나는 장면인데도 그게 인디아와 이어진다는 생각은 미처 안 해봤어요. 좋군요, 마무리 지은 글까지 보니까, 덩달아 좋네요 :)

맥거핀 2013-10-14 15:20   좋아요 0 | URL
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상현이라는 캐릭터 말이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도 어떻게든 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 좋아요. 영화 중에, 내가 사람 안 죽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아?,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대사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왔어요. 순간순간 괴물 같은 송강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도 하구요.

구두가 발에서 툭 굴러떨어질 때도 말이죠. 사실 말이 안되는 장면인데(그거 하나만 불타지 않고 굴러떨어진다는 건..), 그거를 박찬욱 감독은 일부러 넣거든요. 구두로 흥한자 구두로 망한다, 뭐 그런거죠. 아니면 적어도 그 구두는 불태우지 않고 남겨둬야한다는 마음이랄까요. 박찬욱 감독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무엇을 지켜보도록 만듭니다. 냉소하면서도 서늘해지게 만들지요. 박찬욱 감독한테 바라는 거는 딱 한가지 자주 좀 만드세요, 이게 제일 커요.

제가 볼 때는 Shining님은 엄살의 일인자입니다.ㅋ

네오 2013-10-2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입니다..그런데 요새 와서 생각이 든건데 박찬욱이 맥거핀님의 평론의미를 담은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을까라는 의심은 드네요,,사실, 포스트 봉준호-박찬욱-홍상수가 나오지 않는 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참 궁금한데요,,분면 박찬욱이 위에 열거한 의미를 다 담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 후학은 그것을 배우고 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텐데 ,지금 그런말한 감독이 있나요? 굉장히 회의적입니다만,,저는 그래서 아예 해외로 눈을 돌려 영화를 찾고 있어요,,국내는 아예 포기하고요ㅠㅜ

맥거핀 2013-10-28 13:43   좋아요 0 | URL
사실 감독의 본래 의도란 이런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글들은 다 실패하는 것이기는 하죠. 그렇게 한 가지로 귀결되는 영화는 결국 좋은 영화가 아닐 것이구요. 뭐 이 글도 가능한 수많은 상상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이 지리멸렬한 수준이라는 것은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특히 '메이저' 영화들 말이죠. 말씀하신 그 이름들 이후에 이렇다할 만한 감독이 별로 눈에 띄지가 않아요. 인디 쪽에서 재능을 보여줬던 감독도 메이저 데뷔 이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가 힘이 없어져 버리고 마니, 재능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얼마전에 <관상>을 보았는데, 영화가 아무런 특색이 없어서 이거 누구 영화야 하고 보았더니, 한재림 감독의 영화더군요. 우아한 세계,까지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는데, 왜 어쩌다가...싶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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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현실에서는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을 받았을 법한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고, 반면 허구들은 어떻게든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현실은 '실물보다 점점 커져서' 점점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호들이 되어가고 있고, 반면 허구는 그 구호들에 가려진상들을 보여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실상은 한편으로 다른 구호를 가진 허상으로 작동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있다.

 

물론 그 적당한 타협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 허구(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실을 보여주기, 이름하여 '논픽션'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논픽션(non-fiction)이란 1912년 <퍼블리셔즈 위클리>가 베스트셀러를 발표할 때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분한 데에서 유래한 말로, '픽션'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서사, 즉 소설 이외의 서사물로 르포, 역사서, 자서전, 전기 등을 포괄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국내에 꾸준히 소개하여 잘 알려진 조영일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미스터리의 계보>의 해설에서 논픽션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며 그것의 본질은 형식으로는 '영상화'이고, 내용으로는 '추적 혹은 추리'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추적 혹은 추리'라는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과 같은 시사 다큐멘터리는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의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이것이 기존의 사회소설(노동문학/민중민족문학)의 상당부분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서사구조의 유사성이 논픽션과 (TV) 다큐멘터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서사구조의 유사한 부분에 관한 것보다도, 이 (TV) 다큐멘터리가 기존의 사회소설을 대체했다는 부분인데, 한 때 대체하는 것처럼 보였던 TV의 시사 다큐멘터리들은 요즘 들어서 이상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추악한 뒷모습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보여주었던 몇몇 진지한 프로그램들은 운명을 다한지 오래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프로그램들도 점점 김전일 소년의 기괴한 사건기록부가 되어가거나, 소비자 고발류의 프로그램들이 되어 착한 무엇인가를 추적하거나, 휴먼 다큐라는 이름을 가진 말랑말랑한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사회소설을 진정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독립(인디) 다큐들과 인터넷 매체들, 그리고 <현시창>,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르포 혹은 기록 노동들 뿐이지만, 지난 공지영과 기록 노동자 이선옥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에서 볼 수 있듯, 사회(노동)를 영상으로 혹은 글로써 기록하는 일 역시 또한 그 가치를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산체스네 아이들 / 오스카 루이스 / 이매진

안나와디의 아이들 / 캐서린 부 / 반비

 

이런 때에 최근에 출간된 몇몇 책들이 조금 흥미롭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논픽션, 르포들이 연이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은 1961년 처음 출간된 책으로, 멕시코의 어느 빈민가의 생애사를 세밀하게 추적하여 기록하였다. 각 가족들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서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35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번에 나온 것은 50주년 기념판으로 또한 이들 가족의 후기를 새롭게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한 조은의 한 도시빈민 가족을 추적한 훌륭한 연구이자 책, 그리고 영화인 <사당동 더하기 25>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인도 뭄바이 안나와디의 빈민가를 4년 동안 추적한 기록으로 인도라는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내버려진 도시 슬럼가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 르포르타주라는 형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전지적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소설처럼 이 이야기가 읽히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노동 계급은 없다 / 레그 테리오 / 실천문학사

1942 대기근 / 멍레이 외 엮음 / 글항아리

 

레그 테리오의 <노동계급은 없다>는 미국의 어느 부두노동자의 르포르타주로 책 소개만으로는 오웰의 영국 북부의 탄광지대 노동자들을 다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나 프랑스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룬 플로랑스 오브나의 <위스트르앙 부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25%가량 높아졌지만, 도리어 노동 인구 60%의 실질소득은 13년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지난 월스트리트 시위에서도 보았듯 세계의 중심지라는 그곳이나 여기나 빈부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노동 현장은 온갖 부조리와 횡포가 만연한 것 같다. <1942 대기근>은 역사서와 르포의 경계선에 위치한 책이다. 1942년 삼백만 명이 굶어 죽은 중국 허난성의 대기근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면서 또한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감춰 버린 사라진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네 권의 책들은 빈곤 혹은 가혹한 노동이라는 거대한 것에 맞선 생존의 기록이면서, 그 생존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추적한 기록 논픽션들이다. 또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가혹하게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추는 작은 등불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빈곤에 맞서는 대응방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으로서, 또한 하나의 기록문학으로서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 / 리즈 스텁스 / 커뮤니케이션북스

 

마지막 책은 조금 다른 범주의 내용으로 리즈 스텁스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라는 책이다.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 프로듀서인 저자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13인의 인터뷰를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감상이 일천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저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다. (그래도 다이렉트 시네마의 아버지라는 앨버트 메이슬리스나 지난 EIDF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로스 맥켈위 등의 이름은 들어보신 분도 꽤 있지 않은지..?) 책 소개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편으로 이 논픽션으로서의 다큐를 시청하게 될 대부분의 독자들 입장에서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자신의 의자가 결국 어떻게 만들어져 그 스크린 앞에 놓여있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의자가 혹 부러진 의자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일 듯 싶다.

 

아무튼 논픽션에서 결국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기록한 자의 선의 혹은 다짐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위대한 르포의 하나인<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존 리드는 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중요한 날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꼼꼼한 취재기자의 눈으로 사건들을 보려 했고, 또한 진실만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이 다짐과 그를 믿은 사람들의 진지한 독서는 결국 이 책을 오늘날까지 중요한 기록 문학의 하나로 남아있게 했다. 위의 책들에서도 저자들의 선의 혹은 다짐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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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체스네 아이들.....음악이 꽤 유명한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가 생각나네요. 같은 작품일까요?

시사프로그램의 연성화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요즘 다루는 소재가 고만고만한 도전자를 골라 방어전을 치루는 디팬딩 챔피언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아 맥거핀님...서재 이미지가 바뀌셨네요..^^ 저 이미지의 영화도 혹시 페이퍼 생각 있으신가 궁금합니다..^^)

맥거핀 2013-09-06 18:33   좋아요 0 | URL
아..그런 영화가 있었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보수 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작들, 그리고 종편의 탄생들과도 연관이 있겠죠. 근데 그런 것 이외에도 TV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이나 사회전반적인 분위기 등 여러가지가 또 관련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요즘에는 그리 '각잡고' 볼만한 TV 다큐들이 없더군요. 얼마 후에는 매년 하는 EIDF가 또 시작될텐데, 그 때나 좀 챙겨서 봐야겠습니다.

저 영화는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인데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마도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별로 특별히 쓸 이야기도 없구요.^^) 힐링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봤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좀 유치합니다만, 좋기는 하더군요.

날씨가 흐린 금요일 저녁입니다. 술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날씨군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저는 며칠 전에 사서 <안나와디의 아이들>이랑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읽고 있어요. 에세이들의 표본이죠. 으하하.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흑단>도 좋은데요.. 내일 기차 타는데 아무래도 다 읽고오지 싶은데 냅다 잠만 잘지도 모르겠어요.. 비행기 타려다가 기차 타는 거니까 독서라도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요..

<산체스네 아이들>도 장바구니에 두고 책구입할 여유를 기다리는 중인데, <위스트르앙 부두>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이 논픽션들 너무 제 스타일이에요. ^-^bbb


2013-09-0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3-09-0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이 신간평가단을 하시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요, 암요. 저는 아무래도 평가단, 앞으로 안 하지 싶은데 지난 소설부문 선정책이 <파과>인걸 안 후 마음이 쓰리는 건 왜일까요_- 평가단이 됐든 아니든 책이 선정되든 아니든 저는 이 책을 샀을텐데요. 흐음, 묘한 심리에요.

저, 왔다갑니다. 음, 9월 9일 오전 11시 6분경이에요 :)

맥거핀 2013-09-09 17:12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이번에 첫 두 권만 받고도 허덕허덕 하는 중입니다. 한 권은 거의 600페이지, 다른 한 권은 거의 700페이지..물론 늘 그렇듯이 중요한 건 두께가 아니라 제 마음가짐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서평단 하면서 역으로 좋은 점(?)은 평소에 잘 안 읽게 되는 책들, 손이 잘 안가는 책들을 억지로라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독서의 편식을 줄일 수 있다고 할까나..뭐 Shining님 같은 분이 신간평가단이 되는 건 저로서도, 그리고 출판사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ㅋ 11시 6분경이라..제가 오늘 저 시간에 뭘했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2013-09-17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짚의 방패>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이 있다. 물론 사실 이 말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는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결국 참여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거의 모든) 영화는 결국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는 무엇인가이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추론하게 만들거나, 이야기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야기된 무엇인가라도 일부러 오해를 하게 만들거나 하는 등등의 직접적인 참여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숏과 숏의 연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숏과 숏의 연결, 그 아주 찰나적 순간에 관객은 영화에 끊임없이 참여를 한다. 즉 어떤 숏의 이후에 다음의 다른 숏이 붙을 때 우리는 그 사이의 무엇인가를 아주 짧게라도 상상을 한다(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숏들을 보는 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우리는 감독이 제안하는 게임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게임일 수도 있고, 어떤 철학적인 고찰에 대한 게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게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어떤 게임은 성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게임은 실패하기도 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나름의 성공 혹은 나름의 실패이다(즉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감독이 이긴다고 관객이 지는, 혹은 관객이 이긴다고 감독이 지는 그런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에 본 아래의 두 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들보다 훨씬 더 게임의 위치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 물론 나는 감독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관객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그 성공 혹은 실패의 기록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루이스 리터리어, 2013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은 없다. 이 영화는 결국 4번의 마술공연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4번의 마술공연이란 영화의 주인공들인 4명의 호스맨이 보여주는 3번의 마술 공연과 감독이 관객에게 행하는 1번의 마지막 공연이다. 이 마지막 공연은 지금까지 영화의 모든 트릭을 만들어낸 최종의 마술사(범인)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마술이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벌이는 일종의 마술 혹은 게임이다. 즉 이 영화는 마술과 영화를 일종의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영화를 통해서 마술을 보여줌은 물론, 마술을 통해서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다보니 이야기와 별개로 영화와 마술이라는 것이 꽤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영화와 마술 모두 기본적으로 수많은 관객을 앞에 놓고 벌이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마술이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이나 어떤 도구적인 트릭으로 관객을 속인다면, 영화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트릭, 편집의 활용, 사운드나 기타 도구의 활용 등등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관객을 속인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속이기 위해서는 일부분을 관객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한다(혹은 숨김없이 보여준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술사는 카드를 섞는 모습을 일부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카드가 어떤 트릭없이 섞였음을 관객에게 믿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추리물이라면 추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 정도의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비슷한 수법을 활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마술은 기본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것으로 이끌면서 이루어지는 트릭이다. 예를 들어 마술사가 기를 불어넣는다며 특이한 동작을 하거나, 기합을 넣는 것, 혹은 늘씬한 미녀 조력자를 등장시키는 것 등등은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시키고,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를 벌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정신을 끌만한 장치(맥거핀)를 영화 속에 일부러 삽입한다. 또한 영화나 마술이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며, 그것에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다. 영화든 마술이든 그 표면만 볼 때에는 말 그대로 일종의 마법이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그 숨겨진 내부에는 미리 철저하게 준비된 무엇 혹은 때로는 아주 복잡하거나 더럽고 이상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하는가에 따라서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공통점이고, 보다 깊숙히 들어가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마술이든 영화든 결국 관객과의 일종의 규약으로 성립이 된다는 점이다. 즉 두 가지 모두 관객은 속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속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규약이란 이미 마술사와 사전에 약속을 한 특정의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술을 보고 있는 모든 관객들은 '저것이 마술이다' 즉 일종의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잘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앞 부분에서 보여주듯이 정해진 시간 내에 물이 가득한 수조를 탈출해야 하는 마술을 마술사가 벌일 때 모든 관객들은 마술사가 결국 빠져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혹은 빠져나오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관객은 마술을 즐길 수가 없을 뿐더러, 그 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마술사의 이야기처럼 금고에 갇힌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마술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 결말이 결국 마술사가 금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이미 마술이 아니라 비극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실제로 죽지 않았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와 관객이 맺는 일종의 규약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규약을 지키지 않고 즐기려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데 있다. 즉 실제로 어떤 이들은 마술사가 결국 수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에 더 쾌감을 느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는 데에서 그 죽음을 보는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이미 마술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그저 (내 관점으로 보면) 참혹한 것일 뿐이다. 즉 이것을 즐기는 것은 마술이나 영화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술을 하나의 영화로서 보는 입장에서 결국 이 영화 안에서 결국 가장 곤란을 겪을 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의 아쉬움이다. 왜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 마지막은 상당히 치밀하지 못한 트릭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관객은 영화관에 속기 위해서 가며, 또한 감독과 관객의 게임 역시 기본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카드 마술로 말하자면 카드를 섞을 때 관객의 눈앞에서 섞는 것이 아니라 모자 속에 숨겨놓고 섞는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마술사가 내가 골라낸 카드를 아무리 맞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영화는 시작부에 관객이 가까이에서 볼수록 속이기 더 쉽다, 고 관객에게 조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언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마술은 대신 면적 1 제곱미터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마술이라는 점이다. 멀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짚의 방패, 미이케 다카시, 2013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단지 쾌감을 위해 때려 죽인 연쇄 살인마가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여자아이는 재계 거물의 손녀였고, 그 재계 거물은 그를 죽이는 자에게 10억엔을 준다는 신문광고를 낸다. 실제적인 위협 앞에서 그 살인마는 도리어 경찰에 자수하는 방법을 택하고, 그를 심문하고 재판에 넘기기 위해 그가 자수한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이송하는데 경호팀이 동원된다. 이송 도중에 경찰 및 정예 경호요원이 포함된 이들 경호팀에게 끊임없는 공격(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일반인의 공격보다 주위 경찰들의 공격이다)이 이어지고, 이들의 위치가 인터넷에 노출되고, 미수자에게도 1억엔을 주고, 그 재계 거물의 관련 회사에 취업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져든다. 특히 그들의 위치가 계속 알려진다는 점은 그들 경호팀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이 내용이고 보면, 여기서의 게임이란 과연 이들 중에서 내통자가 누구인지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 중에서 이 연쇄 살인마를 결국 죽이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영화 속 정예 경호요원인 메가리(오사와 타카오)의 말을 빌어서 보면, 정작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훈련받고 무기도 갖춘 경찰들, 즉 이 호송 차량의 경호를 위해 나선 주위의 경찰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장하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 경호팀이다. 이들은 그들이 이송해야 하는 연쇄 살인마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뿐더러, 모두 무기의 사용이 용이하다. 또한 이들 조직은 여러 다른 배경을 가진 오늘 처음 구성된 조직으로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걸리는 것은 감독의 이름이다. 감독은 (요즘 들어서 많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비지터 Q>, <카타쿠리가의 행복>, <이치 더 킬러>의 소소한 변태 미이케 다카시니까.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씨네21>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어울릴 듯한 이 이야기에 이 미이케 다카시가 끌렸는가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포인트는 호송 과정의 스릴이나 스펙터클, 혹은 누가 내통자인가를 찾는 추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그 다른 것이란, 예를 들어 과연 악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이 연쇄 살인마를 어떻게든 죽이고 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이 사람들을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여기 이 남자가 연쇄 살인마라면 그를 죽이는 것이 도리어 선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들을 경호하는 경호팀이 아무리 상부의 지시라고 해도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즉 명확해 보였던 선과 악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관객은 점점 명확히 판단을 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상한 변태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이 이어나감으로써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즉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흩뜨려놓고 관객을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었던 그의 전작들처럼 말이다. 더 수상한 것은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는 마치 악 그 자체, 악의 극단의 끝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쾌감을 위해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때려 죽였다는 사실로도 그러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던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는 그 죽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소식을 탈출의 기회로 이용하는 등 그는 보호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죽이는 것이 당연히 마땅한 인물로 보인다(이 기요마루 역할은 <데스노트>의 키라로 등장해 잘 알려진 후지와라 타츠야가 맡고 있는데, 그 이미지와 겹쳐서 더 사악해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가 수상한 것은 영화 내내 이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의 사악한 반응숏과 그의 행동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이 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관객들마저 이 게임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를 죽이는 게임, 혹은 이래도 이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게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내 이 기요마루를 죽이고 싶어서 혼났다, 혹은 왜 이런 살인마를 보호해야 하지? 영화의 설정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와 같은 이 영화에 대한 짧은 100자평들은 영화평이면서 동시에 이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소감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동시에 사형제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사형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 내내 충돌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이 살인마를 보호하려는 사람들 각자의 내부에 싹트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이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 혹은 국가기관이 보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형제에 내재된 질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설혹 악마 그 자체라도 살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메가리를 비롯한 경호팀들이 그를 살려서 데려가도 결국 사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도 보인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사악한 살인마라도 말이다. 그가 '결국에 죽는다는 것'과 '그를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후회한다. 어차피 사형을 당할거라면 이왕이면 더 많이 죽일 걸 그랬다."라고 이 남자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를 죽이고 싶어할까, 아닐까. 미이케 다카시는 당신에게 사악한 게임을 제안한다. 아무래도 그는 변태인가 보다.

 

(근데 '짚의 방패'라는 제목은 '짚으로 만든 방패' 등으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의'라는 사용이 아무리 보편화되었다해도 이것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아무리 일본 영화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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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0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에 악의 교전을 영화로 봤습니다. 근사하게 튀는 피와 살점을 보며 이거 다카시 영감 영화 같은데....하며 필모를 나중에 살펴보니.....다카시 영감 감독이 맞더군요...ㅋㅋ

맥거핀 2013-09-03 23: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영감님 영화를 봤더니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결기가 살아있어요. 이 영화 볼 때 악의 교전도 시간이 되서 그걸 볼까, 이걸 볼까 고민했는데 <씨네21>에 이 영화의 평이 흥미로워서 선택했거든요. <악의 교전>도 괜찮을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3-09-04 09:49   좋아요 0 | URL
사실..호스텔에서 까메오 출"현"하실때 제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셨잖아요. 도살장 걸어 나오면서 넋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ㅋㅋ 이대로 그냥 후진양성만 하시나 했더니 여전히 건재하시다는 걸 몸소 보여주시네요..

맥거핀 2013-09-05 15:15   좋아요 0 | URL
아..호스텔에서도 나오셨군요. 역시 세살 변태 여든까지 간다를 몸소 보여주시는 영감님입니다. 마지막 은퇴하시기 전에 정말 센 거 하나 만들고 끝내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리시스 2013-09-0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다카시 감독의 영화는 두 개가 동시에 걸린 거예요? 으흠. 둘 다 보진 못했지만 <악의 교전>이 이제 개봉하구나..한 게 얼마 전인데 다른 영화가 또 있네요?

제가 어제 영화 리뷰 썼거든요. 이 영화(나우 유 씨 미)의 감독과 스텝들은 관객을 현혹시키는 마술에 실패한 것 같다. 저는 이 글 제가 쓴 줄 알았네요. 물론 논리적 정렬은 맥거핀님 리뷰를 못 따라가지만. 날리듯 대충 흐느낌처럼 써서. 그런데 네 개의 마술이라고 쓰진 않았지만 비슷한 얘기를 언급했.. 우와..똑같다.. 이러면서 다 읽었어요. 이제는 못본 영화든 본 영화든 따지지 않고 리뷰를 다 읽기로 했습니다. 볼 때 보면 되고 읽을 때 읽으면 되고 상관이 없어요.

맥거핀 2013-09-03 23:40   좋아요 0 | URL
두 영화가 거의 동시에 개봉한 것 같아요. 근데 아마도 곧 내려갈 것 같아요. 미이케 다카시 영화 같은 건 한국에서 별로 볼 사람이 없어서 영화관도 할랑할랑하고 좋더군요.-_-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이게 <인크레더블 헐크> 만든 그 감독 영화인 것을 알았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안봤을텐데. 그 영화보고 꽤 실망했거든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마술이었는데, 앞의 세 개 마술에 너무 힘을 쏟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은 대강 처리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근데 왜 알라딘에는 영화 리뷰 안 올려요? 알라딘에도 좀 올려봐요.^^

마녀고양이 2013-09-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눈다는 자체가 무리다.. 라고 얼마 전에 저는 결론내렸답니다.

상담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제 신념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부분을 들어줘야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좀 미묘한 부분인데, 살인이나 범죄까지 안 가더라도 윤리적으로 음... 이런 것들,
하지만 사람이란게 워낙 복잡 미묘한 역사를 가지는 존재인지라, 어렵습니다.
나중에 제 페이퍼에서 정리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님, 즐거울 가을되세요~

맥거핀 2013-09-03 23:52   좋아요 0 | URL
근데 사실 영화를 보면 대부분 우리는 쉽게 나누거든요. 얘는 우리편, 얘는 나쁜놈편, 그렇게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나눠버리지요. (그 경계선에 있는 인물들은 또 대체로 관객이 좋아하지 않기도 하구요.)

근데 사실 현실은 안 그렇잖아요. 거의 모두들 선과 악의 중간 경계에 위치하고 있죠.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현실에 무엇인가 선택을 해야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가치들이 충돌할 때 어떤 것을 포기해야하거나 어떤 집단에 포함되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럴 때 결국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가치관과 내담자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상담자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참 어렵네요. 나중에 정리된 얘기를 혹시 쓰신다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날들 보내시구요.^^

2013-09-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어요.진짜 마술하고 영화는 비슷하네요. 속으려고 간다는 것, 죽지 않는 걸 알기에 기꺼이 본다는 것... 그리고 <짚의 방패>도 흥미로워요. 볼 기회 있음 봐야겠다는 생각이.. 미야케 다카시는 이름만 많이 듣고, 하나도 본 영화는 없는데 왠지 맘에 드네요. 그치만 왠지 보기가 두렵긴 하네용. 요즘 들어 더더욱 센 영화는 안 보게 되어서.. 예를 들어, 공포물을 본지가 300만년은 된 거 같아요..-_-
+ <짚의 방패> 제목 오류, 동의합니다~. '~의'는 원래 우리말에 없는 구문구조라지요. '의'를 쓰면 문장의 애매모호함이 하늘을 찔러요.

맥거핀 2013-09-04 00:02   좋아요 0 | URL
얘기가 그렇게 약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충분히 보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악의 교전> 같은 거는 피가 난무한다니 피하시는 게 좋을 듯 하구요.)

저는 요즘에 영화의 리얼리즘, 리얼의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관객들은 리얼이라는 것에 극도로 노출되어있는데, 이런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말이죠. 저는 영화가 그 영화 나름의 현실을 얼마나 잘 구축하는가에 영화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는데, 요즘의 영화들은 실제를 너무 따라가려고 발버둥쳐요. 영화는 최소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이니까, 뭔가 다른 게 있어야죠.

네..'짚의 방패'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짚으로 만든 방패, 혹은 (내부의) 짚을 방어하는 방패라는 여러 뜻을 동시에 지니니까요. 그리고 영화 상으로 보면 두 가지 모두 다 말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중의적인 뜻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구요.

2013-09-04 11:2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짚의 방패>, '쎄서' 못 보는 게 아니라,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 안 해서 못 보는 게 더 일차적 이유겠군요. ㅠㅠㅠㅠ

맥거핀 2013-09-05 15:16   좋아요 0 | URL
지방 영화팬의 비애로군요. 참 서울이 지긋지긋한데, 또 이럴때는 그래도 낫긴 나아요.

Shining 2013-09-0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저런 개연성, 설명 부족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실 제법 즐겁게 관람했어요, <나우 유 씨 미>. 워낙 속도감이 빨라서 그건 좋았고, 제시 아이젠버그가 의외로(?) 잘 생겼다는 생각(전 이 배우하면 사실 <소셜 네트워크>보다 <좀비랜드>가 떠올라서 완전 얼빵한 모습만 기억나나봐요;) 반전(?)은 맞추기 쉬웠고, 멜라니 로랑은 예뻤고ㅎㅎ <짚의 방패>는 잡지에서 읽고 뭐야, 이 내용은. 하고 뻥찐 기억이... 있는데 미이케 다카시 영화였군요.

음, 영화보다 맥거핀님 글이 더 좋은건, 매번 빠지는 함정.

맥거핀 2013-09-06 00:14   좋아요 0 | URL
저는 앞에 3개 마술 나올 때까지는 나름 좋았는데, 마지막에 좀 이게 뭐야, 싶더라구요. 이 영화 전체가 하나의 마술인데, 좀 복선을 촘촘히 쌓으시지, 갑자기 홀랑 그런 식으로 반전이 등장해버리니 이거 원 싶어서..

제시 아이젠버그는 그 특유의 떠벌이 캐릭터 잘 어울려요. 어째 보니까 매번 약간 비슷한 캐릭터인 것 같은게, 일부러 그런 배역만 맡는지 아님 연기가 다 그렇게 수렴되는 건지 모르겠지만...저는 우디 해럴슨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습니다. <짚의 방패>도 볼만해요. 물론 제 기준은 헐렁헐렁합니다.^^

그건 그렇고 언제 댓글을 달고 가셨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