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2012.

 

 

 

(글 중간중간에 영화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상당수의 다른 프랜차이즈 시리즈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편의 성공과 그보다 나은 2편, 그리고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유산들을 모아 가까스로 선방을 해낸 3편, 그리고 만들지 않았던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는 4편, 그리고 시리즈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감독들이 시리즈를 이끌어나갔을 때 그나마 적용되는 것이다. 2편부터 망가진 시리즈들이 얼마나 많던가.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하는데, 1편은 리들리 스콧, 2편은 제임스 카메론, 3편은 데이빗 핀처, 4편은 장 피에르 주네이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올해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 즉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종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나왔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이야기하였듯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프리퀄이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프로메테우스>의 느슨한 서사, 빈공간이 뻥뻥 뚫린듯한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 논쟁들을 낳고 있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혹은 <인셉션>)나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제시하는 꽉 짜여진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데터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제외하더라도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 자체가 이미 헐거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게시판들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서로가 자신이 맞는 답이고, 다른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어지게 될 몇 개의 이야기를 놓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이는 낚인 물고기들이 바구니에 담겨서는 내 떡밥이 더 맛있었다, 혹은 네 떡밥이 더 맛있었다며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는 구멍이 많은 서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만큼은 사실이고, 설혹 프리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괴하고 끈적끈적하고 음울한 분위기만은 잘 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나 미술적인 부분, 혹은 캐릭터의 활용(아마도 많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들은 이 <프로메테우스>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당할지 쉽게 예상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의 큰 줄기를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왔다. 그 하나는 여전사 리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숍으로 상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화론의 세계와 창조론의 세계. 진화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생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창조에는 그러한 생식의 과정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생식 혹은 임신(수태)에 대한 상징 혹은 이미지들인데, 여성 전사 리플리, 인간(숙주)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형상, 2편에서 리플리와 소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생물체 에이리언 역시도 그러한 번식과 관련된 부분들이 계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이리언도 번식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프랜차이즈인 영화 <주라기공원>에서 가장 섬뜩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섬의 공룡들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창조된 안드로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흔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생식과 관계된 부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이라는 것은 생식 혹은 번식과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가장 비통한 괴성이 터져나왔던 장면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퀸 에이리언이 자신의 알을 불지르는 리플리를 보고 내뱉은 괴성이었다.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파스빈더)이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꾸는 꿈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왜 그는 이 꿈을 보는가.)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는 외부의 괴물말고도 이 창조된 안드로이드를 보는 (생식하는) 인간의 섬뜩한 감정이 내내 지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한편으로는 밖의 괴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안드로이드에게도 해당된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장점은 마이클 파스빈더가 이 섬뜩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식은 아비가 죽기를 바란다."고 대사를 할 때를 보라.) 그리고 그 섬뜩한 기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안드로이드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결국은 진화론 쪽이었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여전사 리플리였으니까.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단지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밖에는 여전히 에이리언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이리언은 그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니까.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일종의 헤테로, 그것이 에이리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그것을 조금 더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에이리언이라는 괴물은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쇼 박사의 임신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다시 그것이 엔지니어(스페이스 자키)와 결합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최초의 에이리언은 인간의 정자, 그리고 불임의 수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이한 역설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창조되었지만, 생식의 과정으로 이 세상에 기어나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의 탄생에도 단지 진화만이 아닌 창조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창조에는 외부의 손길, 외계인들의 어떤 작용이 개입되었다는 것. 즉 이는 일종의 변형된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론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어떤 외부의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놓고보면 인간은 에이리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에이리언이 처음 엔지니어들의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가, 우연히 진화의 과정(영화 속 쇼 박사의 임신의 형태)을 거쳐 탄생된 것처럼, 인간도 결국 엔지니어들이 먼 옛날 뿌려둔 씨앗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 무엇이 된다. 즉 그 태생적 뿌리는 인간이나 에이리언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에이리언이 괴물이라면 인간도 괴물이 아닌가. 에이리언의 행동들은 결국 번식을 향한 본능이고 생존본능이다. 'Alien'이라는 것은 '외계의', '이질적인'이라는 뜻일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이 에이리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이리언과 같은 지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발버둥이 생기며 창조론의 오래된 믿음 저편에 있는 것, 그러니까 신이 등장하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창조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론에는 한 가지 뿌리깊은 믿음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에 의해 자신과 닮은 어떠한 것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믿음이다. 즉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겨우 원숭이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적어도 완벽의 시작지점에 있는 어떠한 것, 그것이 인간이 되려면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그 창조의 시점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러한 믿음에 몇 가지 불길한 가설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을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하지 못한, 자신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불사(不死)를 향한 웨이랜드 회장의 믿음과 그것의 깨어짐은 이미 엔지니어들의 죽음이 발견된 처음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야 말로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들여다보고 있는 쇼 박사의 꿈을 생각해보라. 그 장례식 장면. 생과 사에 대한 동경.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은하철도 999>에서 <블레이드 러너>까지.) 아니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어떤 형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간을 독수리에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듯이, 처음 지구에 남겨진 엔지니어는 마치 사약을 받는 죄수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의 반대편에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영화 초반부 데이빗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몇 번 따라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불을 잡을 수 있지?" "뜨겁지 않다고 믿으면 되지." 영국인으로서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이 영화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대사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 이는 마치 인간에 대한 데이빗의 조롱처럼 보인다. 웨이랜드 회장은 데이빗을 인간들에게 소개하며 말한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그러나 데이빗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편으로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이 보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불을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내 데이빗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섬뜩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단지 잘못 창조된 존재로 점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박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쇼 박사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이 이 와중에 그것을 하고 싶냐고 조롱하지만) 데이빗이 벗겨낸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 목걸이는 인간이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창조주)과 닮은 형상의 어떤 것이라는 믿음. 그녀는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두 명의 생식기능이 없는 존재, 즉 불임의 쇼 박사(그리고 이를 전시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이제 생겨났다)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주들의 별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SF 영화의 팬들은 어떤 장면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장면. "내가 네 아버지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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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지트윈스 덕분에 탄생된 글..아하하 져도 좋으니 멘붕이나 안오게 해주세요...-_-

Shining 2012-06-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메테우스>가 <에일리언>의 프리퀄이었어요?; 전 SF, 판타지, 신화(타이탄 같은)는 영 못 보는 이상한 성격이라; 이 영화도 완벽한 무관심이었는데_- 궁금해지네요.

그런데요 맥거핀님, 맥거핀님은 영화에 늦게 입문(??) 하셨다면서 왜 이렇게 분석을 면밀히 잘 하시는겁니까! 사람 기죽게! 맥거핀님 때문에 전 영화글 더 이상 못 쓰겠어요, 흑.

맥거핀 2012-06-30 14:48   좋아요 0 | URL
저도 판타지나 신화물은 잘 안보지만, SF는 꽤 봅니다. SF는 모든 소년들의 로망들의 아니겠어요. 특히 에이리언 시리즈는 나름 애착이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구요. 제 기준에서는 이 영화 꽤 괜찮았어요. 에이리언 시리즈는 특유의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잘 살려냈더라구요.

어..역시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곱습니다. 하하.

아이리시스 2012-06-2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네오님 리뷰 보고나서 스콧인데 제끼기로..어차피 제가 모든 영화를 다 본 건 아니니까요 맘 편히ㅋㅋㅋ 저는 SF, 판타지는 모르겠고 '타이탄'류의 신화물은 쭉 좋아해왔는데 이 영화는 공부해야겠네요. 궁금하지만 공부 안하면 보이는 게 없을 것 같아요 -_-

저 리뷰 좀 빌려주세요. 본 영화가 없어서 이번달에는 영화리뷰 네 편을 못 채우게 생겼네요. 한 편 썼는데 푸하하(3개월만에 나가떨어질지도 모르는 파워리뷰어)

맥거핀 2012-06-30 14:52   좋아요 0 | URL
아니..스콧이면 이 영화를 봐야죠.^^ 리들리 스콧하면 사실 화면빨..(리들리 스콧이 <블레이드 러너> 덕분인지 철학적인 어떤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런 거 별로 없다고 생각...)

뭐 마음 같아서는 빌려드렸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 숫자 채우는 거 되게 짜증나죠! (적극 공감)

2012-06-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리언 시리즈를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 프로메테우스도 패쓰~입니다. 이 글 읽어보니 조금쯤 흥미도 생깁니다만.. 그러나 은영전 시리즈 어디 재미없어서 안 보겠습니까? 다만 인생이 짧아서이지요.ㅎㅎ
아, 쇼 박사가 무얼 만날지 1편도 안 본 내가 2편이 궁금해지는 것은 이 글을 성실히 읽은 증거인 겁니다..^^

맥거핀 2012-06-30 14:57   좋아요 0 | URL
네..저도 여기 알라딘 분들이 무슨 소설 시리즈 얘기할 때 과감히 패스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별개의 영화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에이리언 시리즈를 좀 봐야만 여러가지로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담번에 쇼 박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면 얘기를 전해드리죠.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가 들어있음)

 

 

 

홍상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특히 최근작에 들어서 그런 경향이 좀 짙어지는데, 과거로 돌아가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나가는 시간(지난 여름에 좋았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의 <하하하>와 '일기'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밤과 낮>)과 증폭되거나 급속하게 축소되어 있는 시간(영화의 어떤 부분들이 영화 속 인물인 옥희가 찍은 영화임을 암시하는 <옥희의 영화>와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게 해놓았던 <극장전>. 결국 영화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을 보여주다가 <북촌방향>에 이르러서는 이 시간의 흐름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이 영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표면상으로 이 이야기는 원주(정유미)가 쓰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 시나리오는 각각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 개의 시나리오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교적 비슷한 흐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이 세 개의 시나리오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모항이라는 곳에 온 안느(이자벨 위페르)라는 외국여자가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이 모항의 펜션과 그 주변에서만 이루어지며, 이 안느는 안전요원(유준상)이라는 공통의 인물을 만나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영화감독 종수(권해효)와 그의 부인(문소리)를 만나고 이들과 어떤 관계가 이루어진다(이 부부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뒷모습이 살짝 비치며, 대신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영화감독 종수 대신에 이름도 비슷한 다른 영화감독 문수(문성근)가 등장한다). 그리고 안느는 이 각각의 시나리오에서 '등대'를 찾는다.

 

즉 어떻게보면 이것은 세 개의 평행한 시나리오이며, 세 개의 비슷한 세계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몇 가지 것들을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두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고, 그것에서 또 몇 가지를 미세하게 바꾸면 아마 세 번째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 개의 평행우주이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것의 하나의 힌트는 이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이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세 편의 시나리오에서 공통적으로 안느는 호기심이 많고, 어느정도 포용력이 있고, 타인과 대화를 하고자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다른 인물들도 어느정도의 공통성이 보이는데, 안전요원은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순진하고, 조금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며, 펜션의 여주인(정유미)는 친절하고, 영화감독 종수의 부인은 술마시고, 여자를 밝히는 종수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므로 이 전체 이야기를 세 개의 평행우주, 세 개의 다른 나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 개의 다른 나라들. 이 각각의 다른 나라에서 미세한 몇 가지가 어그러졌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것인가.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느낌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유쾌하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왠지 쓸쓸했고, 서늘한 감정이 남았다. 물론 홍상수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그리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홍상수의 이야기는 상당수 찌질한 남자들이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코믹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에서 늘 불안한 기운들이 맴돌고 있었고, 전면적인 죽음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홍상수 영화들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를 본 어떤 이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안하고 불길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이 사실. 이 넓은 스펙트럼이 가능한 영화는 많지않다.) 그것은 이 <다른 나라에서>의 이야기의 흐름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들 중 영화내내 가장 미소를 짓게하는 장면이 많은 영화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흐름은 동시에 왠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같은 인물, 같은 공간, 같은 상황들. 그러나 세 개의 시나리오에서 인물은 점점 나쁜 위치에 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안느의 변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이지만, 두 번째에서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불륜행각을 벌이는 여자이고, 세 번째에서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프랑스여자가 된다. 다른 인물들은 어떨까. 먼저 세 편 모두에 등장하는 안전요원의 경우를 보면, 첫 번째 편에서는 안느를 위해 사랑스런 노래도 불러주고, 약간 무모해보이기는 하지만, 안느에게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아무 생각없는 무뇌의 캐릭터, 상당히 수동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단적으로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전요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과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장면을 보자. 첫 번째는 조금은 막무가내지만,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수동적인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리고 영화감독 종수와 그의 부인의 경우, 첫 시나리오에서 이들은 술자리에서 티격태격하지만, 결정적인 파국에 이를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이르러서는 그 파국은 상당히 현실에 가까워진다.

 

이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는 원주가 모항의 펜션에서 쓰고 있는 세 개의 시나리오이다. 왜 원주는 여기에서 이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원주와 그녀의 어머니(윤여정)의 대화를 본다.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사업실패, 혹은 보증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 펜션에 갇혀있어야만 하는 신세이다. 즉 원주가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현실을 잊고자함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쓰는 첫번째 시나리오에서 그녀는 최대한도의 꿈을 담는다. 여주인공은 잘나가는 영화감독이며, 어느 낯선 곳에서 로맨틱한 남자를 만난다. 이것은 첫 번째 이야기. 그러나 이후 우리는 두 편의 이야기를 더 본다. 한가지 질문. 왜 첫번째 시나리오 이후에 비슷한 두 개의 이야기가 계속 쓰여졌는가. 원주는 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더 쓰는가. 그것은 첫번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쓸 요량은 없다. 그러니 그녀는 몇 가지의 설정을 바꾸기로 한다. 여주인공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여자가 되고, 이야기는 꿈과 현실이 어지럽게 뒤섞인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두 번째 이야기.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은 원주는 세 번째 이야기를 쓴다. 여주인공은 다시 이혼당한 여자가 되고, 할 수 있는 일은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잠깐의 섹스를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세 번째 이야기.

 

즉 처음에는 꿈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두 번째에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이야기가 되고, 마지막에는 이야기는 급기야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꿈에서 현실로의 추락.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결국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는 안느는 물에서 수영을 하고 막나온 안전요원에게 물이 차갑지 않느냐고 물었고, 안전요원은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지으며 전혀 춥지 않다고, 따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에 안전요원은 춥지 않느냐는 안느의 말에 대답한다. 춥다고, 물이 차갑다고. 그 차가워진 현실의 온도, 꿈이 깨어져버린 차가움. 등대는 어떨까.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등대. 안전요원에게 안느는 그것에 대해 묻지만, 안전요원은 모른다(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기는 한다. 안느의 꿈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 그 꿈의 등대는 그러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자그맣게 축소되어 안전요원의 손에 들려있다. 이거 등대잖아요, 작은 등대. 그 작게 축소된 현실에서의 꿈의 존재. 이 쓸쓸한 모항에서 이루어지는 쓸쓸한 이야기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안느와 다른 인물들에 의해 '아름답다'고 이야기되는 모항이지만, 나는 그 모항의 쓸쓸한 이미지들만 보였다. 항구 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펜션, 포구에 매어있는 빈 배들, 잿빛의 바다, 홀로 수영하는 안전요원, 화장실 옆의 단 하나의 텐트.)

 

물론 이것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어지러운 도식이다. 그 도식을 보는 홍상수는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안느와 스님의 대화. 왜 이렇게 슬픈가요. 당신이 슬퍼하기 때문이지요. 왜 무서운가요. 당신이 무서워하기 때문이지요. 말장난하시는 건가요. 아니, 모든 것이 그래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뿐이지요. 결국 도식이란, 그렇게 보고자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 그렇게 느끼고자 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쓸쓸함이란 내가 만들어낸 쓸쓸함일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세 개의 시나리오, 세 개의 평행우주. 이것은 정말 '다른 나라'인가. 꿈과 현실은 그토록 다른 것인가. 홍상수는 몇 개의 힌트를 던진다. 세 번째 시나리오에서 안느가 해변에 던진 깨진 소주병은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돌아오고, 처음 안느가 길가에 꽂아두었던 우산은 중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안느에 의해 되돌아온다. 꿈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꿈. 이 세 개의 평행우주는 결국 다른 것일까, 같은 것일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 이것은 가능한 다른 나라의 하나일뿐.

 

당신의 '다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덧.

영화가 끝난 후 이어졌던 홍상수 감독과의 대화에서 홍상수의 태도는 그 자신의 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였다. 답은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마 답일 거에요, 허허허. 아마도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영화들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정답을 상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이 있는데, 그 정답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 그러나 무엇이 정답인가. 감독의 애초 의도에 가까운 해석이 정답인가.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맞춘 답, 그 답은 아마 나의 답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홍상수의(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답일뿐. 그러므로 가장 웃기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의 완전해석판이니, 이것이 답이니, 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는 '영화'에 국한된 태도만은 아니다.

 

덧2.

이 영화에 대한 (그간 다른 홍상수의 영화들과 비추어볼 때) 외국에서의 더한 호평은 언어적인 뉘앙스와도 많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언어적인 뉘앙스는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 외국의 관객들에게는 그 언어적 뉘앙스를 바로 포착할 수 있는 첫번째 영화다. 반면 도리어 우리 관객들에게는 이는 약간은 역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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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1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오래간만에(제가 오래간만^^) 영화글 반갑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셨다는 글귀, 와닿네요.
안느가 또다른 길을 가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지자, 스님과 여교수가 허둥지둥
안느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전 몹시 우스꽝스러웠어요. 다른 장면들에서 웃음이 많이
나왔지만요. 어쩌면 우리는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니 서로 말장난이나 하는 것으로 들리고요.
종우가 안느를 굳이 뻘로 데리고 들어가 둘이서 그러다 들키는 장면에서도 웃다가
문득 좋은 데 데려간다더니 뻘로?? ㅋㅋ 이런 생각 들었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생각할 게 많이 드는, 웃지만은 못할 홍감독 영화^^

맥거핀 2012-06-14 00:49   좋아요 0 | URL
네..최근에 영화를 별로 보지 못해서, 글도 좀 뜸했네요.^^ 그래도 홍상수의 신작이 나왔으니 봐줘야죠. 하..그 장면 좀 많이 웃기긴 했죠. 하필 그 타이밍에서 걸려서, 뭐 사실 그다지 별다른 걸 할려는 건 아니었던듯도 싶었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늘 흥미로워요. 여전히 또 모호한 지점들을 안고 있구요. 그래서 또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만, 약간은 비슷한 것이 반복되다보니 조금은 저로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싶다는 느낌은 좀 있었어요. 즉석에서 쓰는 시나리오, 예기하지 않고 만드는 촬영방식이 홍상수의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트레이드 마크라는 것은 또 한편으로 정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GV에서도 그와 관련된 질문들이 조금 나왔던 것 같고..) 물론 저는 홍상수 감독이 보여줄 것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6-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맥거핀님이 주말에 보신 영화! (저는 주말에 영화 안봤답니다, 그냥 뭐 뒹굴놀이~)
리뷰 못보고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아마 극장전, 밤과낮? 이후로 홍상수 영화를 볼 생각도 없어져버렸지만 이자벨 위페르라니, 오오, 담번엔 인도에 가셔서 영화 찍으실 것 같아요.

지금 제 다른 나라는 '요리'입니다ㅋㅋㅋ 김치김밥 말았는데 김을 펼치니까 밥을 어디까지 깔아야 할지 모르는 그런 초보자의 무한요리세상ㅋㅋㅋ

맥거핀 2012-06-14 00:55   좋아요 0 | URL
근데 홍상수+이자벨 위페르..우와 하고 가졌던 기대감만큼은 조금은 덜한 것 같아요. 물론 홍상수 감독이 배우빨(?)로 영화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다지 새로운 느낌은 주지 못했다고 할까요..말씀하신 것도 재밌어보이기는 하네요. 홍상수가 만드는 발리우드? 하..근데 이 영화에도 귀여운 노래가 나오기는 합니다.

저도 요즘에 어찌어찌하다보니 혼자 밥을 해먹는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근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늘 살짝 걱정되기는 해요. 김치김밥 같은 건 시도도 못하구요. 아직은 그냥 간단한 찌개끓이는 정도. 요즘의 고민은 찌개를 끓일 때 야채를 일차로 살짝 볶는게 좋은가, 아닌가,입니다. 블로그들에 가득한 레시피들은 대체로 볶으라고 하는데.. 귀찮아요.ㅋ

아이리시스 2012-06-14 13:49   좋아요 0 | URL
음..맥거핀님은..애긴데?! 계란말이랑 고기볶음으로 해결!
아..찌개 끓일 때 야채를 볶아야 한다면 차라리 볶음밥을 먹고 말겠어요. 무진장 귀찮은 거 아니예요?ㅜㅜ(운다) 생각만으로도 귀찮아ㅜㅜ

김치찌개할 때 고추기름 낸다고 볶다가 태워먹은 적 여러 번 있어요. 그나저나 저는 남자가 요리하는 거 아직도 너무 신기한 여자ㅎㅎ 마인드가 이래요. 내가 해야한다 뭐 이런 건 아니고 남자가 밥도 하는구나..뭐 이런 신기함.

맥거핀 2012-06-16 02:57   좋아요 0 | URL
응? 허허..아이리시스님 의외로 보수주의ㅋㅋ 요새 밥 정도는 해야 집에서 안 쫓겨나요.-_- 당연히 계란말이가 더 좋은데요, 그넘의 귀차니즘 때문에..찌개는 한 번 끓이면 그냥 3일 정도는 그것만 먹어요. 그니까 맛보다는 귀찮음에 굴복한 셈.

Shining 2012-06-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내일 보러 가요, 리뷰는 다녀와서 읽을게요 :-) 그러니 저는 딴 얘기만 할게요
ㅎㅎ 올해 칸에 간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는 하네케와 크로넨버그의 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아, 저는 어떤 영화가 개봉했을 때 맥거핀님은 이 영화 보셨을까? 혹은 보실 예정일까? 무심코 생각하게 될 때. 스스로 신기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꼭 영화 페이퍼 써주셔야 해요(결론ㅋㅋ)_-*

맥거핀 2012-06-16 03:07   좋아요 0 | URL
네..신의를 지키시는 Shining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허허..하루에 시를 두 개 베껴 쓰는 날도 있네..)

아무튼 이 밤에 하네케의 영화와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찾아봤음. 으..예상대로 두 영화 모두 쉽게 볼 영화가 아니군요. 특히 크로넨버그 씨 '젊은 자산관리사가 강박증에 빠져 보내는 24시간'이라니..또 보는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할려고 그러시나..그러나저러나 덕분에 크로넨버그 씨의 또다른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네요! 무려 비고 모르텐슨 나오는 '이스턴프라미스'의 속편이라니....@.@

마지막 말씀은 저로서는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말씀이네요.^^ (저 사실 Shining님이 (장르)소설에 대해 글 쓰실 때 '과감히 패스'하는 경우도 있는데 죄송하네요.;;)

Shining 2012-06-19 12:12   좋아요 0 | URL
네, 전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므로ㅋㅋㅋ 토요일에 보고 왔습니다, 하지만 여지껏 그의 영화에 제가 늘 그랬듯 첨언을 하지는 않겠어요^^;

크로넨버그 영화 주인공이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것도 좀 놀랐어요(전 아마 이 배우에게 깊은 편견이 있나봐요, 매번 놀라는 걸 보니;;). 저도 속편, 그 영화 기다립니다. 사실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궁금하기도 해요ㅎㅎ

죄송하긴요~ 맥거핀님이 고른 영화에 관심이 있는거지, 맥거핀님 글이라서 일부러 읽는 건 아닌걸요^^ 각자 읽고 싶은 글을 읽고 싶을 때에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아, 다만 그렇다면 제 글 중에 맥거핀님이 관심 가질만한 글이 몇 개 없을거라는 생각은 드네요ㅎㅎ

맥거핀 2012-06-19 13:02   좋아요 0 | URL
아마도 분명히 홍상수씨는 이런 리뷰를 보면 허허허, 참 잘도 갖다붙여놨네...그럴 겁니다. 이동진씨와 한 관객과의 대화를 보니, 이동진씨가 홍상수 영화에 자주 나오는 줌의 활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긴 의미를 붙인 질문을 했는데, 홍상수의 답은 한 줄이더군요. "그 때 왠지 줌을 당기고 싶더라구요.."

아니에요. 그래도, 소설 글 꽤 봤어요.^^ 으하하.
 

 

 

 

돈의 맛, 임상수, 2012

 

 

(영화의 결말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돈의 맛은 어떤 맛일까.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짠맛에 가까운 맛일 것이다. 짭조름한 땀의 맛. 돈이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그것이 쾌락의 땀이든, 고통의 땀이든 간에)이 그것들에는 아마도 깊숙이 배여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그래서 같은 짠 것인 돈과 소금의 어떤 비슷한 점을 유추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에 악영향을 미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그 짠맛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진다. 돈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돈은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는 결국 돈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보통의 돈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임상수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윤회장(백윤식)의 집 금고에 가득 쌓여있는 반질반질한 새 돈뭉치들, 그것에서도 짠맛이 날까.

임상수의 전작 <하녀>의 느슨한 후속편, 혹은 스핀오프, 혹은 이본(異本)인 이 영화 <돈의 맛>은 <하녀>처럼 인상적이지는 않으나, 꽤나 흥미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하녀>는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시작했고, 카메라는 수직하강하여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는 잠깐의 흥미거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돈의 맛>은 마찬가지로 윤회장과 그의 비서 주영작(김강우)의 수직하강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이 수직하강은 돈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강이다. 하늘에서 돈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왕의 강림.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그 돈을 전달하러 유유히 가는 중이다. 말 그대로 유유히. 그리고 동시에 임상수는 흥미롭게도 다른 차들을 그저 달리는 불빛들로 처리해버린다. 그 빠른 이동과 대비되어 유유히 달리는 이 윤회장.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윤회장은 다른 차들처럼 그렇게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윤회장의 눈에는 아마도 실제 다른 차들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 인간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아닌 그저 수평으로 내달리는 불빛으로. 

2.

그래서 윤회장의 집에서 주영작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영화 초반부의 씬들은 꽤 흥미롭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윤회장의 집은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집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진 이 집은 집보다는 거대한 갤러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러니까 하녀들은 흥미롭게도 갤러리 직원들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갤러리와 다른 점은 이 갤러리의 양식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꽤 어렵다는 점이다. 모던한 장식들과 동양적인 여백의 공간, 복잡한 이중계단과 심플한 벽면이 혼재되어 있는 이 공간은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이 만나고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이 조인트 콘서트를 하는 공간이다. 그 맥락을 알 수 없게 짬뽕된 이 공간은 그래서 도리어 키치적이 되어간다. 그것의 상징은 아마도 윤회장의 장인, 즉 백금옥(윤여정)의 아버지인 노회장의 모습일 것이다. 그 부의 끝에서 만들어진 그 키치, 그 우스꽝스러움(그래서 현실세계의 모 회장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쁘띠'의 상징이 되어 귀여움을 받는 것인가).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을 찍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어떤 심상에 관한 부분이다. 나는 초반의 이 장면들이 어떤 동물원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동물원의 맹수들처럼 이들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으르렁댄다. 돈만 밝히는 것들, 어떻게든 우리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아랫것들, 교수고 정치인이고, 사업가이건 간에 모두들 똑같아 돈이라면 환장들을 하지. 그리고 그 맹수들을 우리는 사육사 주영작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관람한다. 그러나 이 관람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을 저  멀리서 지켜본다,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초반부의 씬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적인 면보다도 임상수는 관객을 이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보도록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그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부분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아래에서 내려다본다. 즉 우리는 그들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거나, 아니면 '피핑 톰'이 된다. (이 영화에는 동시에 감시카메라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 이는 물론 우리와 그들의 어떤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불유쾌한 경험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돈의 맛>이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불유쾌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어떤 특정의 장면들이 낳은 효과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관객을 일종의 몰래 숨어서 보는 자, 때로는 감시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감시가 유쾌할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임상수의 의도는 후자쪽,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을 감시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3.

이러한 윤회장 가족 중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나미(김효진)다. 그렇다, <하녀>의 그 '나미'다. 지난 <하녀>를 보고 쓴 리뷰에서 나는 '나미'가 아마도 괴물이 되지 않을까,라고 썼고, 임상수의 의도도 아마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돈의 맛>과 관련한 인터뷰를 보니 본인도 나미가 괴물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충고에 따라 나미를 이 영화에서 조금 다른 인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미도 사실 주영작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주영작에게 말하면서도 이는 한편으로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처럼도 느껴진다(아마 주영작의 머뭇거림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대하는 것, 그러니까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간다면 처음보는 동물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오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떤 (좋게 말하면) 지향점, (나쁘게 말하면) 체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는 괴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괴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녀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여기서의 '인간'은 '니가 인간이냐!'라고 말할 때의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른바 홍상수의 구분법을 쓰고 싶다.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말할 때의 그 구분법, 그 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늘 '찌질한 인간'들이 나온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 우리는 그들을 찌질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찌질한 말을 내뱉고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찌질이'일 뿐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홍상수의 영화에서 좀처럼 죽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죽음을 마주할 용기마저도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도 '찌질이'라는 말이 나오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주영작은 자신이 찌질이라고 체념하듯 내뱉는다. 그러나 이 때의 '찌질이'라는 대사는 자조적인 맥락에서 내뱉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관객에게 도리어 이 인물은 괴물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주영작은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살짝 갈등하지만, 결국에는 거울 뒤편에 돈다발을 쌓아두고,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저그런, 보통의 그저그런 인간, 결코 A급은 아닌, 그런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인간. (그러나 이것이 쉬울까.)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주영작과 나미의 비행기에서의 섹스씬. 이 섹스씬을 행복한 결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아래에는 에바의 시신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막을 수도 있었던 에바의 죽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섹스씬을 보며 못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것은 결국 어떤 자신들의 찌질함,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에바의 관 속에는 주영작이 던져넣은 돈다발마저 들어있으니까. (에바가 그 돈을 보고 어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찌질함'을 추인하는 것으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임상수(그리고 비슷한 이름의 홍상수)가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희망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도 싶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것.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고 다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결말이 께름칙한 이유는 이 마지막은 결국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나미와 주영작의 이 결합은 전개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합의 되풀이니까.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윤회장을 말하는 백금옥도 처음에는 윤회장을 이렇게 만난 것이 아닐까. 나미와 주영작은 그들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봐도 될까.) 

4.

그렇다, 그런 세상이다.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 (그것과 관련하여 영화에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윤회장의 아들 윤철(온주완)과 싸우려드는 주영작. 겁을 먹은 듯이 보이는 그 아들을 주영작은 자신만만하게 차에서 끌어내리지만, 도리어 얻어터지는 것은 주영작이다. 그 (아마도 돈으로 만들어진) 싸움의 기술. 돈은 없지만, 주먹과 깡을 믿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세계는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그 거대한 지옥도, 최대한 좋게 말해 어느 정도의 '체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몸에 불을 싸지르는 것으로 끝내버렸던 그 <하녀>에 가득한 체념과 이 <돈의 맛>의 같지만 다른 체념을 결국 결말에서 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스핀오프, 혹은 이본.

우리의 최선은 결국 찌질해지는 것일까. 그 체념을 결국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그 체념한 자신을 견뎌내는 것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견뎌내는 것보다 자신을 견뎌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그 견뎌냄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이 있을까. 



덧.
이 영화를 본 서울극장 8관은 손님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퍼가 울릴 때마다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며 천둥치는 소리가 나는 데다가, 스크린 오른쪽의 일부분은 검은 얼룩이 크게 있었다. 서울극장 관계자는 빨리 조치를 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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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6-0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은 보는 책들이 독자들을 아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많은데...이 영화도 그런 쪽에 속하나봐요. 영화관으로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챙겨보게 만드시네요.

맥거핀 2012-06-06 22:51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흥미롭게 보았다는 쪽에 가깝겠네요. (이렇게 얘기하면 저의 심리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네오 2012-07-0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영화 좋아합니다만 ㅋㅋ

맥거핀 2012-07-06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해요. 임상수의 냉소적 유머(와 분노) 좋아요.
 

 

 

 

아르마딜로,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2012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들어있음)

 

 

이 영화 <아르마딜로>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 최전선 아르마딜로 캠프에 가게된 덴마크 병사들의 6개월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들의 출국으로 시작하여 그들의 귀국으로 끝을 맺는데, 캠프에서 이 덴마크 병사들을 위협하는 것은 주민 속에 섞여 게릴라전을 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이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훈련과 정찰 속에 무료함만을 느끼던 그들에게 곧 몇 차례의 적과의 조우가 이어지고, 급기야는 적이 설치한 IED(급조폭발물)에 의해 동료들 몇이 부상과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료함과 지루함만이 가득했던 그들의 내부를 적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가 대신 채우게 되고, 그런 감정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적과 일전을 벌이고 적을 격퇴하고 돌아오게 된다... 줄거리만 보게 되면 언뜻 극영화처럼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의 형식만을 빌린 극영화가 아니고, 그렇다고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실제의 인물과 실제의 전쟁이 등장하는 완전한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영화는 보는내내 혹시 극영화가 아닌가,라는 기이한 착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이다. 이 영화는 거의 시종일관 내내 음악과 음향효과들이 가미되어 있다. 보통 상당수의 다큐멘터리들이 음악의 사용을 대체로 자제하는 반면, 이 영화는 일부의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배경음악 및 음향효과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인 이 음악과 음향효과들은 영화의 내내 관객의 정서를 흔드는 효과를 낳는다. 즉 이 음악과 음향들로 인해, 우리는 이 장면의 정서적 분위기를 미리 습득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트리거는 대체로 주인공의 이별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며,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튀어나오는 귀신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 발생하는 음향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서는 영화의 스토리를 우리가 특정의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물론 이러한 관객의 정서를 특정의 관점으로 밀어붙이는 음악은 이른바 적극적 구축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사용되는 방식이기는 하나, 이것은 보통의 다큐들에 비해 상당히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다른 하나는 인물의 곁에서 매우 근접하여 찍는 카메라이다. 영화 내내 우리는 인물들을 상당히 가까이에서 만나며, 그들의 대화를 매우 가까이에서 듣는다. 상당수의 다큐멘터리들이 인물과 약간의 거리를 두며, 그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에 이 카메라는 인물의 가까이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으며, 우리가 마치 그들의 일부가 되어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듯한 착각을 전해준다. 이것은 정찰이나 전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병사들이 총을 들고 뛸 때, 카메라도 그들을 따라서 같이 흔들리며 뛰고, 인물들이 총알을 피해 재빨리 엎드릴 때, 카메라도 급히 땅으로 처박힌다. 또 병사들이 갑작스런 적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질 때, 카메라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즉 우리는 멀리서 그들의 전투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사들의 일원으로 실제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 하나는 이 화면의 구성방식이다. 영화 내내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상당수의 다큐멘터리의 일반적인 샷, 그러니까 화면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는 인터뷰 형식의 장면이 거의 없다. (기억이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그런 장면은 중간에 전투에서 부상당해 병원에 있는 병사의 인터뷰 딱 한 번이었는데, 나머지 장면들은 누군가와 이루어지는 대화들이거나, 전투 장면, 정찰 장면, 브리핑 장면들이다. 영화에 절대 등장할 수 없는 화면 바깥 속의 누군가(예를 들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보통의 극영화에서 당연히 배제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이 장면들의 구성은 상당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극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이 서사의 구조 방식이다. 이 서사는 전형적인 극영화의 구조 방식이다. 자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 혹은 새로운 도전으로 파병에 지원하는 병사들(발단)-처음에는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나, 점점 몇 가지의 사건들로 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키워가는 병사들(전개)-IED에 의한 공격으로 아군 병사들이 사망하고, 극도의 분노 속에서 이어진 적과의 전투에서 적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병사들(절정)-처음에는 자신의 행동들을 영웅시하며 합리화하려 하지만, 왠지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병사들(결말). 이러한 이야기들은 상당수의 전쟁영화들에서도 몇차례 활용되었던 서사 구조이며, 뭔가 극적으로 짜여졌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은 그렇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들이 차례로 일어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장면을 영화에 포함시키고, 포함시키지 않을 것인가는 당연히 감독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물론 거기에 어떤 류의 음악을 붙일지 역시 감독의 선택이다. 자 한 가지 이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예를 들어보자. 어떤 감독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 대한 다큐를 만들기로 한다. 그는 24시간 내내 당신을 촬영했지만, 영화를 보니 모든 장면은 당신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장면 뿐이며, 영화의 마지막은 조용히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드는 당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영화의 제목. "수다스러운 OO씨의 하루" 아마도 당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 시끄러운 인간은 잠잘 때가 유일하게 조용할 때구만." 자 이 영화를 본 당신은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이 영화 <아르마딜로>라면 이런 것이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들어가기 전 적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병사의 모습이 나온다. 이 결정적인 전투의 직전 이렇게 생각하는 병사만 있었을까. 왜 이 장면이 굳이 결정적 전투의 전에 선택되어 이 위치에 들어가 있는가.)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조작을 했다거나, 어떤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이 전체 이야기를 어떤 서사적인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고 있지 않은가 묻고 싶을 뿐이다. 예를 들어 몇몇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장면 하나. 노트북을 연결하여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 두 병사.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은 게임화면 외에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병사들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캐릭터를 총으로 죽이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병사의 모습. 그리고 다시 (게임 내에서) 총으로 받아치는 상대방 병사와 그의 시선. 이에 (총보다 더 큰) 소형무기로 더 크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노트북 화면이 실제의 전투를 위해 조명탄을 발사하는 화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이렇게 읽힐 수도 있다. 이 하나의 컴퓨터 게임 안에서의 도발과 그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더 큰 대응은 이들의 전투에서의 앞으로의 대처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즉 그런 스토리를 관객들이 마음 속으로 스스로 만들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장면 둘. 덴마크 공항으로 귀환하는 병사들과 가족을 다시 만나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한 병사의 샤워 장면. 쏟아지는 물줄기와 함께 얼굴을 두 손으로 비비는 병사의 모습을 비춰주며 서정적인 음악이 흐른다. 이 장면에서 병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부상당해 도망갈 수 없는 적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어떤 죄책감일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이 병사는 샤워를 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두 손으로 얼굴을 씻는(가리는) 병사의 모습과 서정적인 음악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는가. 이 장면이 이 마지막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서사화가 낳는 부수적인 효과는 결국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영화 속 인물의 감정과 그것을 보는 관객의 감정을 처음에 어느 정도 일치시켜 놓고 출발한다. 아르마딜로 캠프에 도착하여 반복된 훈련과 정찰 속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이들 병사들은 어떤 재미있는 것(그러니까 적과의 전투)을 기다리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관객들 역시 이런 무료한 장면을 보러 이 영화관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충격적인 것을 기다리는 이들과 관객들은 어느 정도 공유된 감정을 가진다. 그러던 이들과 관객의 감정이 벌어지는 것은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이후이다. 이들은 복수심에 불타 전투중 부상당한 탈레반들을 살해하며(이것은 좀 모호한 지점이다. 그 탈레반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들만이 알 것이다), 전투 후 브리핑 중에도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리했다"며 낄낄댄다. 이후 내부고발에 의한 감사가 이어지지만, 이들은 외부인의 시선(그러니까 아마도 관객의 시선)으로 볼 때는 자신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지만, 자신들은 해야만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며 떳떳하다고 항변한다. 이런 항변을 하는 이들을 보는 우리의 심리는 어떨까. 우리는 이들에게 동조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서사화에 의해 최소한 이들의 행동의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서사화의 최소의 목적은 결국 주인공의 행동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 본 서사를 통하여, 우리는 주인공을 응원하거나, 최소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성공한 서사라면 더 좋겠지만, 적어도 실패한 서사가 아닌 이야기는, 이야기를 그리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물론 이것은 부수적인 효과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가장 중심된 효과는 외부인들인 우리가 느끼게 되는 전쟁(전투)에 대한 어떤 잔상들일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많은 전쟁영화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쟁영화들과 이 영화가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은 있다. 그것은 이 영화는 실제의 죽음을 보여준다는 것. 일반적인 전쟁을 다룬 극영화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적을 죽일 때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감정 중의 하나는 일종의 쾌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가상의 죽음이 아닌) 실제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시체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체들을 바라보며 적어도 쾌감은 느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

 

 

 

덧.

어떤 분은 리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을 지원하고 상영을 허가한 덴마크 정부가 대단하다고 하셨던데, 나는 대단하다기보다는 상당히 영리하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전쟁(전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비인도적인 행위를 포함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나도, 적어도 그들의 행동이나 사고를 외부인의 시각으로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이에 반해 아직도 (국방홍보물 등에서) 적과 우리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만 접근하는 우리 정부는 얼마나 멍청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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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1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 이야기란 아무리 해도 직접 겪어보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국가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갔다고 해도 싸움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한다는 점에서, 결국 살상의 참극이 벌어져서 가해자가 된다 해도 그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피해자니까요. 자기가 아니라도 어차피 누군가 한쪽이 한쪽을 죽였다는 점에서. 아 진짜 게임 같아요. 하나가 죽지 않으면 절대로 끝나지 않는.

동생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얘기했는데 군대에서 그렇긴 하죠. 적은 북한. 미국이라고 답한 애 바보된다고. 일단은 북한이 도발을 많이 하긴 하니까 맞긴 맞지만 조직적으로 그렇게 가르친다는 건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멍청해요. 지금은 눈가리고 아웅한다고 통하는 세상도 아니고..

특별히 수작이라고 포스터에 박아논 이유가 있을까요? 스크린으로 하는 전쟁체험인가..

맥거핀 2012-05-14 15:46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이 리뷰 쓴다음에 다른 리뷰들을 읽어봤는데, 저랑 보는 시각이 꽤 다른 리뷰들이 많아서 어..내가 뭔가 잘못봤나..이러고 있었어요. 아무튼 전쟁이란 건, 그리고 거기에 나가있는 사람의 심리상태라는 것은 겉으로 보는 우리들과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어떤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 윤리적인 비난을 하는 것만이 맞는가,라는 생각도 했구요. 그니까 도리어 이 영화는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이들의 임무수행 과정을 잘 드러내보임으로써 이들을 그 비판에서 구하고 있기도 하다는 거죠.

우리는 무조건 선이고, 저기 나쁜 넘들이 있고, 그 넘들을 무조건 처단해야 하고...이런 식은 이제 앞으로 점점 더 먹히지 않지 않을까..생각이 됩니다. 뭐 하나를 만들더라도 이렇게 좀 더 세련되게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스크린으로 하는 전쟁체험이라고 하셨는데, 그 표현이 꽤 정확해요. 최고의 수작이란건 오버지만, 다큐 부분에서 세계적으로 약간 센세이션을 일으킨 영화인 것은 사실입니다. (뭐 그래도 저런식의 카피는 촌스럽네요.^^)

Shining 2012-05-1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쿡티비에서 동시상영하던데요+_+

재밌네요. 사실을 택한 것이 리얼리즘인가, 사실을 비추는 것이 리얼리즘인가,는 불멸의 논쟁거리인 것 같아요. 저는 무지막지하게 잘 만든 다큐멘터리는 늘 야비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어요. 지독하게 사실적인 사진들도. 이상하죠, 잘 만든 극영화는 어떤 쾌감을 주는데 말이죠_-?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영화제에서 저의 추천작은 없습니다ㅠ 흑ㅠ 빈센트 미넬리의 작품이 재밌긴 했지만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흥미롭다는 평이기에 추천해드리긴..8편의 영화를 보고도 추천작이 없다니 안타까워요;

맥거핀 2012-05-18 01:31   좋아요 0 | URL
조금은 다른 맥락이기도 합니다만, 저번에 얘기하신 허문영 평론가의 책에 나온 지아장커가 했다던 이야기가 있죠.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와 기다림(wating)의 다큐멘터리..저는 이 영화는 명백하게 구축에 가깝다고 봅니다만, 마치 기다림의 다큐멘터리처럼 교묘하게 위장을 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게 조금은 갸우뚱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도 여러 평들을 보면 건조한 영화,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라는 평들이 꽤 있거든요. 근데 저는 도리어 글에도 썼지만,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그것이 너무 세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근데 그 견해는 재미있네요. 잘만든 다큐멘터리는 야비하다...감독이 특정의 방향으로 (지나치게) 유도하는 것에 느껴지는 거부감? 뭐 그런건가요?^^

아..추천작이 없다는 건 저 또한 심히 안타깝군요. 하긴 요새 같으면 추천작이 있어도 못볼 형편이긴 합니다만...

Shining 2012-05-18 11:46   좋아요 0 | URL
전쟁을 근거하는,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_+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맥거핀님의 말씀이 어쩐지 이해가 됩니다.

좀 더 어릴 적 혹은 젊을적에(웃음)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다는 친구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좋은 소재를 찾아내는 거 아니냐? 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비아냥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거든요. 수잔 손택을 비롯, 사진에 대한 글을 읽은 상태에서도 다큐멘터리와 사진을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좋은(혹은 드라마틱하거나 논쟁거리가 될 만한) 소재를 찾는 것과 그것을 배열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큰 의미인지 아직도 확신은 못하겠어요. 다만 특정 장면을 삭제하거나 더하거나, 그것만으로도 분명히 감독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관객으로 나는 가끔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니까. 어쩐지 속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뭐랄까, 사실이 진실은 아닌데 말이죠.

속았나? 와 속았다. 중 어떤 것을 택할지 망설일 때마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는 비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라는 뜻인데 말이 왜 이리 길어졌죠ㅠ

맥거핀 2012-05-19 12:54   좋아요 0 | URL
물론 좋은 소재를 찾아서 그것에서 (언젠가) 나오게 되는 좋은 영상을 오랫동안 기다려서 만드는 것도 좋은 다큐멘터리의 미덕이겠지요. 근데 요즘에는 평범한 소재를 조금더 적극적으로 가공하여 새로운 관점을 보는 이에게 제시하는 다큐멘터리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아장커의 영향인가..라는 생각도 있구요. 예를 들어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이나, 이강현 감독의 <보라>같은 것도 그런면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나 관객을 속이는 것, 어떤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은 같은데 저 같아도 다큐멘터리는 조금 더 '관점'이 아니라, 사실, 혹은 진실을 담아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실생활에서도 여전히 그렇지만, 수많은 관점들 중에서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것을 가려내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맥거핀 2012-05-18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 커쇼의 <히틀러>가 오늘만 반값세일이라는 메일을 보고, 어쩔까하고 며칠만에 알라딘에 들어와서 여러이웃님들 글을 70%의 집중도를 가지고 읽으며, 계속 나머지 30%로는 고민중인데, 시간은 어느덧 한시간 반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살까, 말까...끙.
 

 

 

은교, 정지우, 2012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음)

 

 

박범신 원작, 정지우 연출의 <은교>를 보았다. 사실 원작을 보지 않아서, 원작은 어떤 흐름의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사건의 전개는 원작과 동일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같은 사건이라도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그의 젊은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드는 은교(김고은)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시인이 소설 '은교'에 쓴 대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제자의 말대로 단지 추문이 될 수도 있다. (또 여기에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영화와 소설의 차이에 대한 문제도 개입하게 될 것이다.) 정지우의 선택은 그중 어느 쪽일까,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가졌던 의문은 그런 쪽에 가까웠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몇몇 우려들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해석들과는 달리), 정지우가 의도했던 것은 현재의 이적요와 은교와의 일대일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즉 늙은 시인이 젊은 여자의 육체에 빠져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그 근거 중의 하나는 은교와 이적요의 섹스씬 혹은 성적 유희의 장면들이다. 이적요의 상상, 혹은 그의 문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장면들에서 늙은 이적요는 젊은 이적요로 돌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젊음의 활력을 맛보며 활력적인 육체를 드러내보인다. 즉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적요가 궁극적으로 보고자하는 것은 은교의 벗은 몸이 아니라, 젊은이로 돌아간 자신의 모습이다. 은교는 단지 그를 젊은이로 돌려놓는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은교의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러 평들에서 이 은교라는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그려진다, 알 수 없다, <은교>라는 영화에 정작 '은교'는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교는 리뷰들에서 지적한대로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이다. 순수함과 팜므파탈을 교묘히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방점을 찍는 것은 그 텅빈 것처럼 보이는 순수함이다. 즉 은교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 영화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육체 뿐이다. 영화에서 탐미적으로 뒤쫓는 것은 그녀의 육체의 운동이지, 그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내면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은교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그녀의 육체를 따라잡는 카메라는 그녀의 육체를 드러내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청소나 빨래같은 집안일만큼 온몸을 쓰는 것이 있던가. 누드로 청소를 해준다는 서비스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은교를 이렇게 비워놓는 이유는 하나다. 은교가 비어있어야 이적요는 늙은 자신을 그것에 투과시켜 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적요에게 은교는 자신의 모습을 젊게 비추게 하는 거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제자 서지우와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젊음이면서도 서지우와 은교는 다르다. 은교가 비어있는 캐릭터라면 서지우는 꽉 차 있는 캐릭터이고, 그의 내면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별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고정관념일 것이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는 욕망일 것이고, 이상문학상이라는 권위일 것이며, 어쩌면 시기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하나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지우를 죽이는 방식이다. 서지우가 길을 내려가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로 다시 올라오다가 죽는 그 방식, 굳이 그 방식일 이유가 있을까. 마치 이 장면은 이적요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이적요의 조작이 없었다면 서지우가 자동차 점검을 하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돌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적요가 이 일에서 책임을 면하기란 힘들다. 결과가 같다면 결국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과정일 것이다. 그 죽음의 과정이란 것. 과정이 이렇게 바뀌어버리면서 서지우의 죽음에는 이적요 말고도, 책임져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서지우 본인의 젊음이다.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은 분노에 가득찬 그의 젊은 혈기이다. 그는 젊은 혈기에 가득차 한시라도 빨리 이적요를 만나고자 무리한 주행을 했고, 그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이다.

 

즉 이 젊음은 문학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이적요에게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였지만, 이 유일한 무기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자신을 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 속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이 대비가 명확히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적요에게 있으나 서지우에게 없는 것, 즉 천부적인 문학에 대한 소질은 그 대비가 비교적 명확한 반면에, 서지우에게 있으나 이적요에게 없는 것, 즉 젊음에 대한 대비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약간 불만스러웠던, 혹은 의아했던 점은 이적요의 늙음은 관념으로는 관객들에게 주어지지만(즉 '이적요는 늙었다'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려 하지만), 그 실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이적요는 굳이 은교의 도움이 필요없는 늙은이이며(그가 은교 대신 청소를 하거나, 은교의 옷을 말려주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자, 이 장면에서 왜 은교는 누워있고, 그녀의 옷은 대신 늙은 이적요가 말려주는가), 자동차 정비를 손수할 정도의 나름 강건한 노인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당연한 힌트는 정지우가 나이든 배우를 쓰지 않고, 박해일에게 노인 분장을 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오히려 이 젊음과 늙음의 대비는 은교와 그녀의 말로밖에 등장하지 않는 은교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드러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발꿈치의 굳은 살을 긁어내는 은교의 어머니와 깨끗하고 예쁜 발과 발목을 가지고 있는 은교와의 대비. 은교는 언제가 되어서야 발꿈치의 굳은 살을 칼로 긁어내게 될까.)

 

 

이렇게 됨으로써 상딩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묘사되어야 할 캐릭터인 서지우는 단지 열등감과 시기심 밖에 남지 않은 캐릭터가 되었다. 즉 질시의 주체이자, 대상이어야 할 이 인물은 단지 '욕망하는 것'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악역의 역할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 전체 영화의 구조와도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초중반까지는 섬세한 심리극의 양상을 가지고 있던 이 영화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은교' 발표를 둘러싼 첫번째 결별 이후로 서사극으로 슬슬 변화하여, 마지막에는 몰아치는 사건들로 급속하게 마무리된다. 즉 영화 초반, 존경심과 보호본능 그리고 시기심, 질투의 사이에서 미묘하게 부유하던 서지우가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마지막에 이르러 인물에게 심리를 드러내보일 틈을 주지 않는 영화의 구조와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서지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서지우의 대척점에 있는 이적요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런 질문과도 연관된다.

 

왜 마지막에 이르러 이적요는 힘없는 노인으로 돌아갔을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내내 '팔팔한, 무늬만 늙은이'로 보이던 이적요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술독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되었다. 물론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지우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은교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답일까. 이것은 이렇게도 물을 수 있다. 왜 애초에 이적요는 서지우를 제자로 받았을까. 이적요는 첫만남에서 그의 문학적 능력이 없음을 이미 어느정도 간파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지우가 다른 감각 - 예를 들어 대중적 감각 - 이 뛰어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적요가 쓴 '은교'를 서지우가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세상에 내보냈다고 했지만, 그가 그것을 볼 때에는 분노로 가득했을 때였다. 그는 단지 그것을 더러운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후에 어찌 평가받았는가.) 어쩌면 이적요가 그를 제자로 받아준 이유는 그가 결코 자신만큼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적요는 그를 이용한 것이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그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는 자신보다 한참 떨어지는 (그나마 스스로 쓸 수도 없는) '소설가'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적요와 서지우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소설은 시에 비해서 이류에 불과하다'는 점이라는 사실.) 이적요는 그가 결국 자신의 '구겨진 뒷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견딜 수 없게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은교는 이적요를 젊게 만드는 그의 깨끗한 앞면, 그리고 서지우는 그의 가득한 내면의 욕망을 보여주는 구겨진 뒷면이다. 이 둘이 만나 '외롭다'며 섹스를 할 때, 이적요는 몰래 숨어 무엇을 보았던가. 자신이 곧 은교이며, 동시에 서지우인 것을, 그 외로운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찾아온 은교에게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저 뒤늦게야 깨달은 자의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동전을 뒤집어도 동전이 아닐 수 없으며, 예쁘고 가녀린 소녀의 발이건, 굳은 살을 긁어내야 하는 늙은 어미의 발이건 결국 발인 것, 서지우에게 '별이 별인 것을 모른다'고 힐난했지만, 정작 그것을 모르는 것은 자기자신일 뿐이라는 것. 이제 남은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적요(寂寥)한 이에게 찾아온 '은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녀는 은혜로운 만남(恩交)인가, 은밀한 관계(隱交)인가. 아님 그것도 아니라면 음란한 요부(淫嬌)인가.

 

 

 

덧.

영화 속에서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받지만(적어도 영화 속에서 '이상문학상'은 대중문학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현재 우리의 세계 속에서 <은교>는 도리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며 대중문학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 속에서 규정한 자신과 점점 반대가 되어가는 이 텍스트, 이 흥미로운 현상을 어찌 볼 것인가. 그와 더불어 이 자기반영적으로 보이는 텍스트를 기꺼이 쓴 박범신 작가에게도 경의를. 정지우 감독에게는 물음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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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4-29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일 볼 예정이에요.
원작은 먼저 읽었는데 정감독이 잘 살린 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겠군요.
맥거핀님 리뷰를 읽어보니 원작의 의도를 그런대로 살려냈구나 싶어요.
은교를 텅 비워둔 점도요.
그래도 정감독에게는 물음표를 주셨으니 저도 즐감해볼까 합니다.

맥거핀 2012-04-30 23:58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영화를 이미 보셨겠네요.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가 참 좋았었는데, 그래서 이 영화 보기 전에 너무 기대를 했었나봐요. 근데 예상보다는 조금 갸우뚱한 면이 있었었요. 제가 감탄한 것은 어떤 묘사적인 부분보다는 도리어 이 영화의 흥미로운 구조였는데, 이 구조는 전적으로 박범신 작가의 공이겠지요.

프레이야 2012-05-01 00:34   좋아요 0 | URL
저도 정지우감독의 사랑니 좋아해요. 해피엔드도 은교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오늘 빗속을 달려가 봤는데 원작에서 마음 아팠던 느낌을 또 가졌네요.
늙음이 정신과 육체에서 조화가 되지 못하니 그게 슬펐어요.
구조는 원작과 조금 다르지만 최적으로 가려고 한 것 같아요.^^

이진 2012-04-2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영화도, 원작도 읽지 않았으니 리뷰를 보는것은 뒤로 미뤄불래요.
빠르면 내일이나 바로 <은교>원작을 읽으려 하는데,
영화는 아마 19금이었지요...

맥거핀 2012-05-01 00:01   좋아요 0 | URL
아..그죠. 19금이죠. 근데 소이진님 글 쓰시는 걸로 봐선 이 영화보셔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말이죠. 도리어 가능한 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관람을 말리고 싶습니다만..^^;

Shining 2012-04-3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글을 읽고 오늘 댓글을 남깁니다. 맥거핀님은 대학교 때부터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셨다면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이 경이로움은 어디서 나오신겁니까!-_- 따지고 싶군요ㅎ

소설 은교는 저도 참 각별하게 생각하는 글입니다. 원작에서도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방점에서도 여러가지를 상상케하고 짐작케하는 것들이 많았거든요. 셋의 관계는 단순한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깊은 뭐랄까 형이상학적인(!) 관계로 보여졌구요. 저는 서지우와 이적요는 어떤 의미이든 서로에게 반해있다고 그래서 소녀는 어쩌면 둘 사이에 낀 피해자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든 증오이든 그것이 너무 강렬하고 비현실적인 스파크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이님의 글에 댓글 단 것처럼, 저도 은교가 십대의 순수함과 순진함, 그리고 그것을 모른다는 것의 우둔함과 깊은 맑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이상의 느낌을 받지는 못했어요.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아마 영화도) 롤리타 콤플렉스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젊음과 늙음,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수작이라고 생각하죠.

Shining 2012-04-30 11:51   좋아요 0 | URL
맞다, 저는 사실 박해일의 캐스팅이 의문입니다. 굳이 특수분장의 효과를 빌려 꼭 그여야만 했는가 하는 점_- <이끼>의 정재영의 연기를 개인적으로는 영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뭐랄까 얼굴은 노인인데 발성이나 몸짓은 젊은 느낌. 같은 해에 우연히 드라마 <자이언트>를 봤는데 정보석 씨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거든요. 젊은 시절부터 할아버지까지 대단하더군요. 특히 완전히 노년의 연기를 할 때는 살짝 떨리는 발걸음과 자연스럽게 굽은 등, 쇳소리 긁히는 저음의 목소리까지. 드라마 보는 일이 일년에 한 두 번인 제가 이 분 때문에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봤거든요ㅎ 그런데 영화의 예고편을 봤는데 박해일의 연기도 아주 '젊더군요'. 왜 굳이 젊은 배우를 캐스팅해서 돈들고 고생해가며 특수분장을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_-

그런데 저 맥거핀님 서재 도배할 기세군요ㅋㅋ

2012-04-30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5-01 00:13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저도 영화 초반에 박해일의 연기를 보고는 좀 갸웃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끼>의 정재영을 연상시키게 하는 면도 있었구요. 그게 정지우 감독의 의도인지, 박해일의 연기력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김무열과 좀 극단적인 대비가 되어야 한다고 봤거든요. (예를 들어 김무열은 아주 몸 좋은 소설가로 나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죠. 뭔 소설가가 그리 몸이 좋은지..) 물론 영화의 주인공에 나이든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것의 모험을 피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그 캐스팅이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심리적인 부분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서지우겠지요. 사실 2시간의 영화에서 표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캐릭터라고 봅니다. 제가 단순히 느끼기에만 해도 영화 속에서 서지우의 심리가 여러번 (미묘하게) 변화하는데, 이를 2시간 안에 잡아내어 서지우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드는 것이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정지우 감독의 역량이 그런 면에서 좀 모자란 듯 싶기도 합니다. (박범신 작가가 대가라는건, 이 인물을 소설 속에서 잡아내고 있다는 것이겠구요.) 예를 들어 서지우가 차를 타고 이적요에게 가는 장면에서 '서지우의 분노'라고 간단히 썼지만, 이것은 간단히 '분노'라고 이야기할 것만은 아닐 것인데, 그런 것들이 영화 속에서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고, 영화의 한계,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2-05-01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2-04-3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화 관심 있어요.. 보러 갈려고 시간과 협상중입니다..
무엇보다 은교의 비어있음에 대한 내용은 정말 너무 신선해요.
영화볼 때 화면이 뚫어져라 봐야겠어요...^^

맥거핀 2012-05-01 00:24   좋아요 0 | URL
아..꽃도둑님 오랜만이에요, 저 캐릭터 오랜만에 보니 반갑습니다. 은교라는 캐릭터 저는 잘 설명을 못하겠어요. 여성분들이 보는 은교라는 캐릭터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여고생들이 보게 되면 그 친구들이 보는 은교라는 캐릭터는 어떨까..그것도 좀 궁금하구요.)

cyrus 2012-04-3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관심 있는 영화에요. 아직 원작은 안 읽어봤는데 역시 영화가 나오자마자
도서관에 있는 원작을 구해서 읽기가 쉽지 않네요 ^^;;

맥거핀 2012-05-01 00:25   좋아요 0 | URL
영화 개봉 후에 원작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듯 싶어요. 며칠 전에 서점에 갔었는데, 은교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꽤 봤습니다. 저도 원작을 한 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2012-05-0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경우 정지우 감독에 대한 기대가 좀 없는 편... 그래도 중간 이상은 하는 감독이니까! (이거 웬 고자세?!랍니까.ㅋ) 글구 '김고운'이란 배우 땜에 더 보고 싶네요. 궁금해요...
근데 영화 보러가기가 눈치 보여요. 농번기!라서 말입니다. 후후. 저는 그냥 원작이나 읽어야겠어요. 이조차 시간이 없지만요.

이 글에서 꽃도둑님 말대로 '은교의 비어있음'이 흥미로웠습니다.

맥거핀 2012-05-04 13: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래도 정지우 감독이 중간이상은 합니다. 원작을 읽으신 분들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탐미적인 영상은 만들어내고 있다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배우들은 잘 모르겠지만, 김고운 같은 경우는 원작과도 꽤 싱크가 높은 편이라고들 하니까요. 연기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텅 비어 있음'은 배우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여러가지를 채워나갈 수 있는 배우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농번기..여기 도시에서는 잘 생각해볼 수 없는 생경한 느낌의 단어네요. 그렇죠..인간이든 작물이든 햇볕을 봐야하는 시기죠..

아이리시스 2012-05-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러 안갔는데요.. 김무열은 어땠어요? 으하하하. 보러가야 하는데 가자고 하는데 애인하고 가기 싫달까.. 걔는 예술의 세계를 이해 못하..( '') 어제 문자 왔길래 남자들이 극장에 별로없대!!! 이렇게 보내니까 답장이 안오던데요ㅋㅋㅋ

맥거핀 2012-05-07 18:11   좋아요 0 | URL
글쎄요..김무열은 연기를 못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너무 어려운 배역이 주어졌다는 느낌. 감독의 캐릭터 해석이 좀 그래서, 이 역할은 누가 맡았어도 쉽지 않았을 거 같기는 합니다. 뭐 그냥 몸만 좋아요.^^

그래도 예술의 세계(?)를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보셔요. 애인과 보기에 썩 적절한 영화는 아닌듯 싶습니다만.. 제가 예전에 얘기했지만, 저질 로코물 하나가 열 명작영화보다 낫습니다. (뭐 그렇다고 이 영화가 명작이란 건 아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