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은 언뜻 보기에도 십여 장이 넘어 보이는 일반노트 크기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넘겨다본 그 메모들에는 뭔가가 손글씨로 적혀져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러나 그 종이들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종이를 하나하나 탁자에 내려 놓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 이야기들의 진행과 관련된 메모들일 것이다. 오래전 정성일의 음성해설이 들어간 DVD를 보며, 정성일은 도대체 이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 뭔가 적어놓고 대본을 읽는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몇 개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메모를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해나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은 이상한 문장들을 썼다. 구어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그렇다고 문어체로 보기에도 적절치 않은 그런 문장들. 그가 쓴 비평들을 그대로 읽어주는 듯한 느낌. 그러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는 엄청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애써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가 있던가. 1시간이 예정되어 있는 시네마톡이었지만, 그는 1시간을 조금 넘겼고, 몇 장의 종이들은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손에 쥔 채로 이야기를 끝냈다. 정성일의 <엉클분미>에 대한 영화적 간증과 그것에 압도되어 버린 신도들. 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그런 이미지였다.

<엉클 분미> 상영과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마톡. 그 때 들었던 이야기 몇 개를 지금 뒤늦게 옮겨 본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네마톡은 11월 중순에 있었고, 이것은 여차저차첫차막차한 이유로 12월도 한참 지난 지금에야 몇 개의 단어들에 의지해 이야기를 옮기는 무리한 시도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에,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뭔가를 끄적거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몇 개의 단어들만 휴대폰 '그림메모'를 이용하여 남겨두곤 하는데, 이 글도 온전히 그 단어들의 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들은 분명히 처음에 들었을 때와는 조금은 달라져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므로 당연히, 밑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모두 정성일 평론가가 그날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밑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는 당연히 정성일이다.)

1.
그는 이 영화 <엉클분미>가 끝나고 났을 때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경험하는 '멍~'해지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것이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감독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형식적인 시도와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많은 다른 매체들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이 영화는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설치미술 작업과 크게 연관이 있다. 아핏차퐁 감독은 설치미술에서 멀티스크린을 사용하여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동시에 체험하게끔 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영화에 가져왔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영화의 스크린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쓸 수 있는 설치미술과 다르게,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핏차퐁 감독은 개의치 않고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해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분미의 아들이자, 오래전 집을 나가 원숭이 인간이 된 분쏭과 오래전 죽은 분미의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분미 및 통, 젠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점은 원숭이 인간 분쏭과 죽은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오랫만에 만나고서도, 분쏭과 죽은 아내는 서로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별개의 이야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즉 원숭이 인간 분쏭이 나타나는 것과 죽은 아내가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이들 두 사람이 말을 섞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아핏차퐁 감독은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 그냥 풀어놓는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관객이 멍해지는 것은 단지 두 개 이상의 스크린을 동시에 하나의 스크린에 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핏차퐁의 형식상의 일종의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이란 영화의 고정선(線)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영화의 중심에 어떤 고정선이 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고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이 고정선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부러 고정선을 여러개 두는 경우도 있고, 그 중 고정선 하나를 갑자기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 고정선을 비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반전(反轉)이라 부르는 것).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관객이 어떤 고정선을 따라가다가 그것이 아닌 것 같아 그 고정선을 버리면, 영화가 한참 진행되다가 어느샌가 그 고정선이 다시 나타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변태와 환생(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환생(전생)이 A가 A'가 되는 것이라면 변태는 A가 B가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분미의 경우가 환생(전생)이라면, 통이 스님이 되는 것은 변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아핏차퐁의 영화도 변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엉클분미>라는 영화는 A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B가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C가 되기도 하고 다시 A로 문득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멍해지는 것이다.

3.
이 밖에도 이 영화에는 내용상의 대구(對句)가 있다. 공주가 물(수분)로 들어가는 꿈(혹은 전생)의 내용과 분미와 젠, 통이 아내 유령을 따라 건조한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은 내용상으로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분미는 건조한 동굴에서 수분이 빠져나온 채로 죽음에 이른다. 이 장면들은 왜 대구를 이루는가.

4.
영화의 중간에 갑자기 메기와 공주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를 누구의 꿈 혹은 전생으로 보아야 할까. 분미의 전생일까, 통의 전생일까, 아니면 젠의 전생일까. 아핏차퐁 감독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메기와 공주 에피소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분미가 모기를 전자모기채로 잡는 장면임을 상기시키며(이 장면은 또한 이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죽은 모기들과 죽은 공산주의자들), 왜 모기의 전생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전제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상하게 찍혔다. 즉 대부분 모기를 잡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을 잡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면에,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잡히는 모기들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5.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이 영화의 래디컬한 정치성에 대해서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영화를 본 평론가 및 기자들은 이 영화의 급진적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석에서 아핏차퐁 감독 역시 자신이 죽을 때까지 태국은 국왕 및 군부 독재에 둘러싸여, 민주화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분미가 젊은 날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자신의 업보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미래 이야기라고 하면서 보여지는 사진들도 있다. 이 사진들에서 원숭이 인간 분쏭과 총을 든 사람들(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찍은 사진들도 있고, 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마치 이 사진들은 이 영화 촬영 현장을 스케치한 사진들 같기도 하다. 즉, 이 영화 속에서 '미래'라고 소개된 사진들은 현재에 가깝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이 <엉클분미>라는 전체 영화의 내용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라는 대과거 및 이 미래 사진 사이에 있는 전과거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미래 사진 속의 현재는 희망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사진 속에는 쓸쓸한 공기가 감돈다. 그가 이 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80년 광주가 아니라,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서 찍힌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볼 때, 이 사진들에는 절망 속에서의 한 때의 휴식과도 같은 것들이 비춰진다.)

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에서 스님이 된 통은 사원이 무섭다면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젠의 숙소로 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젠과 함깨 TV를 보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이 때, 익히 알려졌듯이 두 가지 행동으로 그들은 분리된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왜 통은 스님이 되었으면서도 사원이 무서운가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장면을 아핏차퐁이 매우 공들여 찍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 4가지 구도로만 찍혔고, 그 중 2가지 각도만을 마지막에 번갈아 보여주며, 그들을 두 가지로 분리시킨다. 하나는 TV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젠과 통이고, 다른 하나는 TV 앞을 떠나 세븐 일레븐으로 무엇인가를 먹으러간 젠과 통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서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TV를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외면하고 떠날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TV에는 태국 시민들의 시위와 그것을 제압하는 정치가와 군부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할 것인가,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강조해서 말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아핏차퐁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쉬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쉬워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의 정치적인 단호한 질문을 하는 이 영화를 단지 형식적인 문법이 조금 쉬워졌다고 해서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덧.
그는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설치미술가로서의 아핏차퐁 감독의 면모에 대해 이야기했고(그러면서 한국에서 그 당시 전시되고 있던 아핏차퐁의 설치미술들을 꼭 관람하기를 권했다), <엉클 분미>가 가진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핏차퐁 감독의 정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정글이 가지는 원시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홍상수 감독과 아핏차퐁 감독이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인연과 더불어 지난 CINDI에서 이들 두 감독 사이에 짧게 이어졌던 기이한 대화에 대해 전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세세하게 전하기에는 내 기억력이 모자르다. 나는 그리고 멍해졌던 것이다. <엉클분미>로 멍해졌고, 그리고 이어지는 정성일의 이야기들로 다시 한 번 멍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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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0-12-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정말 저의 온 정신이 홀리도록 잘 쓰시는군여^^; 글을 읽다보니 모기의 전생이라니여,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의 등장이군여, 대부분이 엉클분미를 보고 난 다음 멍해졌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말하더라구여,,올해의 해외영화라면 이 영화와 코엔의 '시리어스 맨'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봅니다..뭐 이유가 여러가지 겠죠^^; 추천 꾸우욱 누르고 갑니다~~

맥거핀 2010-12-12 14:1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글 좋게 보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정성일 님이 애기를 잘 해주신 덕분이지요. 모기의 전생 같은 것은 저도 영화를 볼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핏차퐁이 정말 그런 의도로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도 본인 블로그에서 올해의 해외영화 1위로 <시리어스 맨>을 꼽았던데..이 영화 꼭 한 번 봐야겠네요.
 

 

2004년 2월 26일에 타 서점 블로그에 (나름 리뷰라고) 올린 글. 유일하게 딱 하나 쓴 글(하기는 그 때는 뭔가를 쓸 만한 때가 아니었다). 오늘 오랜만에 서점에 가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 <언더그라운드>가 마침 새로 출판되어 있길래, 생각나서 올려본다. 자투리 글을 모으려는 목적도 있고. 제목은 그 때 올린 그대로. 

.....................................

日 옴진리교 사건 '길고 긴 10년'  

1994년 도쿄(東京)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사건을 저질렀던 종말론 종교단체‘옴 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ㆍ48ㆍ사진) 피고인에 대한 1심 판결이 2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내려진다. 

일본 검찰은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등 13건의 테러ㆍ살인 사건으로 모두 27명이 숨진 일련의 옴 진리교 범죄를 모두 아사하라가 주모ㆍ지시했다고 보고 지난해 4월의 논고 때 "일본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자”라며 살인을 구형했다. 범행에 가담했던 그의 제자들 중 11명에게 이미 사형판결이 나왔고 아사하라의 지시 사실이 인정됐기 때문에 그에게도 사형판결은 확실해 보인다. 무차별 동시다발 테러의 원형으로 꼽히는 지하철 사린 테러는 ‘안전신화’를 자랑하던 일본의 치안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략)

유족들은 “아사하라의 입에서 범행의 이유와 반성ㆍ사죄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한 사형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경찰은 아직도 남아 있는 신자들이 소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해 27일 법원주변에 기동대 400여명을 배치해 경계를 할 예정이다.

- 2004년 2월 26일자 신문기사 발췌 -
..........................................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권두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악령》의 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주인공 스타브르긴이 그의 미친 아내를 살해케 한 후, 그날 밤 미모의 여자 리자와 육체관계를 갖고, 다음날 아침 차갑게 헤어지는 대목에 나오는 바로 그 리자와의 대화이다. 리자에게 "어제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하고 물은 데 대해서, 그저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하는 대답을 듣고, "그건 가혹하다. 그건 너무나도 잔혹하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장 뤽 고달의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라디오 뉴스의 한 토막이 인용되어 있다. "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투의 뉴스가 의미하는 너무도 단순화되고 무의미한 폭력적인 표상을《악령》의 한 구절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폭력적인 표상의 위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투관계 보도나 재해보도에 있어, 엄청난 수의 다양한 희생자들의 다양한 죽음과 비참한 죽음을, 무미건조하고 지극히 단순하게 '5000명이 전사했다'든가 '3000명이 사망했다'고 표상하는 것처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단순화에 대한.....(하략)
.......................................................

언젠가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은적이 있다. 소설은 아니고, 사린가스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은 일종의 르포다.

그들의 대다수는 우연히 그날 아침 지하철을 같이 타게 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날의 사건 이후로 다들 무엇인가 조금씩 달라져버렸다.

한 사람의 친구로써, 누군가의 어머니로써, 혹은 누군가의 선생님으로써 맺었던 관계의 틀 속에서 존재하던 누군가는 지하철 테러 사건의 대상물 중의 어느 하나로써 그저 큰 사건이라는 틀 속에서 묻혀져 버리고 말았다.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라는 체념 속에서 객체화되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큰 대상물 속의 하나로서의 부속물적인 우리들의 삶은...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게 아닌 것이다. 조금 달라져 버리긴 했지만, 아직도 사건의 이면에는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누군가는 또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인 것이다.

그것을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보여준다.

ps. 갑자기 신문을 읽다가 한 3-4년 전에 읽은 그 책이 떠올랐다. 사린 가스 테러 사건에 대한 수백 페이지의 분석 보고서보다 이 책 몇 페이지가 이 사건의 심각성을 더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대구 지하철 사건도 별로 다르지는 않다. 대구 지하철 사건 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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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29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엉망. "너무도 단순화되고 무의미한 폭력적인 표상을《악령》의 한 구절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폭력적인 표상의 위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cyrus 2010-11-2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나온 책의 내용이랑 차이가 없나요?
저는 예전에 나온걸로 읽고 싶어지네요. 제가 사는 곳이
기억하기 싫은 참사가 일어난 것도 있고, 하루키가 쓴 르포라는 점에서
끌리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0-12-01 12:14   좋아요 0 | URL
답글이 좀 늦었습니다.^^;
서점에서 내용을 살짝만 보았는데, 크게 내용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단지, 이번에는 이 <언더그라운드>와 더불어 2편격인 <약속된 장소에서>도 같이 출간된 것이 조금 달라진 점이랄까요.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르포라기 보다는 인터뷰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만, 사건의 정황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르포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네요.
 

더운 여름날, 지나치게 서늘한 극장에서 두 편의 더 서늘해지는 영화를 보았다.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CINDI FILM FESTIVAL)에서 본 두 편의 한국 독립영화. 박수민 감독의 <간증>과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이 두 편의 영화는 몇 개의 우연이 겹쳐서 선택되었지만, 왠지 이 두 개의 영화는 조금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단락들이다. 2009년에 만들어진 <애니멀 타운>과 2010년에 만들어진 <간증>. 글쎄. 아마도 이 영화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이 영화들이 최근의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일군의 무리들이 만들어낸 실용적이고 날카로운, 그래서 잔혹한 세계, 그 이면의 바탕에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또다른 단면들을 펼쳐보인 것으로 말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그 다른 한가지는 이 영화들은 우리 인간 사회의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왠지 그 인간 사회를 자꾸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민 감독의 영화 <간증>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조금씩 그 이상(以上)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으로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하거나, 인간 이상의 어떠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전규환 감독의 영화 <애니멀 타운>은 그 제목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규환 감독이 보는 우리 사회는 인간 이하의 '애니멀 타운'이다. 즉, 이 두편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평행한 시선으로서 보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방법은 인간을 보는 방법에서는 유효할까. 



먼저 박수민 감독의 <간증>. 이 영화는 몇 개의 것들이 내용상으로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충돌. 참회하며 계속 고문하는 자와 참회하지 않으면서도 고문을 멈춘 자의 충돌. 과거의 고문 경찰 박덕준은 예전의 기억에 괴로워하지만, 여전히 청부 고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상관 임광한은 교회의 장로가 되어 간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가져다 주는 어떤 기이한 역설. 그리고 두 번째 충돌. 믿음이 부족한 자와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의 충돌.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믿음이 부족한 자는 그 살인자를 고문하며,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밝히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충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두 개의 상이한 시각 끼리의 충돌이다. 즉 '믿어야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봐야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사이의 충돌. 우리는 그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 손을 들고 답할 것인가. (물론 손을 들지 않고, 답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Confession'이다. confession? '고백' 또는 '자백'.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고해성사'. 이 영어 단어가 '간증'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지 궁금해서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간증은 'testimony'이다. 감독의 이 혼용은 아마도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confession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는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고문하는 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러나 이 고백들은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간증' 역시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해'와 '간증'의 진실함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을 가려낼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가려내려고 애쓰는 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여전히 일단 가려내는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고문이건, 혹은 종교적인 형태이건,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고백이, 혹은 간증이 그것을 행한 그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간증 그 자체, 고백을 행하였다는 그 자체만이 고백을 끌어내려는 자에게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 <간증>은 몇 가지 단점도 엿보인다. 박덕준의 상관 임광한은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지나친 도식화로 캐릭터는 조금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저 국가라는 절대자를 신이라는 절대자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거기에는 조금 더 다른 함의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임광한과 박덕준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붙인듯한 느낌도 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도식화와 상징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힘을 떨어뜨리고 있다. 감독은 도리어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대치하고 만다. 이 영화는 묵직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형상화를 해내야 하는지 명확한 중심이 서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은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마지막에 이 영화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촬영되었다는 엔딩 크레딧의 내용을 보며, 살짝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약간은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글쎄. 내가 철저하게 공무원 정신에 입각한 공무원의 입장이라면 이 영화에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곳 서울이 그저 하나의 '애니멀 타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결국 그저 '동물들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그 자조감.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는 동물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한가지 단적인 예로, 동물 중에 소아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동물이 있던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의 육체가 자주 전시된다. 아니 육체라고 말하기 보다는 거대한 고기덩어리에 가깝다. 그 고기덩어리는 땀을 흘리고, 밥을 먹고, 다른 고기 덩어리를 때리고, 교미한다. 그 육체를 불편할 정도로 스크린에 들이대는 것, 그것은 분명히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아성애자의 육체가 유독 자주 전시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의 영화적인 복수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범죄자를 보는 어떤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죄자는 영화 내내 상당히 측은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여,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도와주고 싶을 정도이다. 그는 그저 우리 사회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불쌍한 보통 사람이며, 이 절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와 보통 사람을 가르는 구분은 오로지 그의 발에 감겨진 전자 발찌밖에 없다. 그 전자 발찌를 제외하고는 그저 그는 우리의 측은한 보통 이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상업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최근 <악마를 보았다>를 필두로 몇몇 영화들은 범죄자들을 거의 악마 혹은 괴물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그저 악마 그 자체로만 보인다. 즉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나는 이 영화 <애니멀 타운>이 다른 영화와 달리 범죄자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그 가련해보이는 인간이 더 무섭다. 괴물은 그 다름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잡아내면 되지만, 그 '인간'들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그가 소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곳에 갔는지, 진짜 오줌이 마려워 그 곳에 갔는지 알 수 없다. 뛰어 다니는 멧돼지는 피하면 되지만, 안 뛰어 다니는 인간들은 진짜 피할 수 없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우리 자신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몇몇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곳은 '애니멀 타운'일까. 하지만, 적어도 '애니멀'들은 무리를 보호하는 데에는 필사적이다.

이 영화에는 뚜렷한 리듬감이 존재한다. 감독은 영화의 중반까지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영화 속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자리에 앉아있기가 심하게 불편할 정도다. 그러다가 일순간 휘몰아치며, 관객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든다. 글쎄. 이를 좋은 리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업 영화라는 관점에서는 이를 조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도 숨을 쉴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 스트레이트함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리듬,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생각들이 필요할 것 같다.



덧. <간증>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돌아온 여배우 '이화시'씨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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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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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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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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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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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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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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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주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 늘상 그렇듯이, 기대하고 본 영화는 기대감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별 기대감 없이 본 영화는 꽤나 의외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본 영화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 묘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마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기는 한데, 모두들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술 퍼마시고, 여자를 때리거나, 도박에 미쳐 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신주에 도끼질을 해댄다. 사실 여자들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람만 피우는 남편을 응징하는 마사코도 그렇고,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여러 남자들을 계속 만나오는 토모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져 보인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 나오코뿐.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지고 보면) 제일 이상했던 것은 여왕도, 토끼도, 쌍둥이도 아닌, 앨리스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감독은 다시 숨겨진 이야기를 슬며시 드러내보이며, 영화에 또다른 색채를 덧씌운다. 묘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단점이라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은 모호하다는 것. (부천시청)



두 번째 본 영화는 도미닉 제임스 감독의 <다이>. 글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힘들다. 정신과 병동에서 깨어난 6명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범인에 맞서서 생사를 건 게임을 해야한다는 설정인데,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참신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매끄럽거나.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채 낯선 곳에 갇히는 사람들이 어떤 범인 또는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은 이미 <쏘우>, <큐브> 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인 데다가, 그것에 참신함을 부여해야 할 범인 캐릭터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하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왜 그렇게 구멍이 많은지.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각 사람들에게 죽이는 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계속 헛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런 방식의 지겨운 설명으로 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게임 규칙의 치밀함이나 죽음의 스릴 강도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해도(그래서 어쩌면 <쏘우>가 단지 그 죽음의 스케일만을 키우는 속편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세우는 메시지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인 '죽음을 어떤 우연에 맡긴다'는 것. 글쎄. 완벽한 우연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한가지로, 왜 주사위는 꼭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쓰인 것만을 사용해야 하지? 2부터 7이 쓰이면 안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12면체 주사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주사위를 '선택'했다는 그 아주 작은 한 가지의 사실도 '우연'이라는 것의 존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연'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감독으로서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쏘우>처럼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던가, 끝까지 그 '우연'에 대해 항변하는 건 뭥미?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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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7-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 상품으로 두 영화를 넣으려고 했는데, <퍼머넌트 노바라>는 검색되지 않고, <다이>를 검색하니 무려 718개의 영화가 나와서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