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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소설의 모티브는 하나 같이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엔 세상에서 여자가 싹 사라지고 남자들만 가득한 그런 스토리를
기대했었따. 마치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여자 없는 남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상상했던 것과 달랐지만 장편이 아니라 단편이어서 오히려 짧게 짧게 틈틈히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9년만에 내어놓은
단편은 아주 특이하지도 아주 이상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평범해보이고 평온해보여서 읽어나가며 속도를 붙일 수 있는 소설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
p48 살아 있을 때부터 조금씩 잃다가 결국에는 모조리 잃고 말았어...
무대에서 벌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인데도 불구하고 호사로 느껴질만큼 약간은 부담이 되는 전속 운전기사를 두게 된 가후쿠. 미사키가 그의
노란색 사브를 끌고 그를 극장까지 태워주는 동안 그는 죽음으로 인해 곁에서 떠나간 아내가 떠올려졌다고 했다. 생전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꼭
잠자리를 가졌던 부인인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아내의 배신보다 아내의 부재를 인정하는 일이 더 힘든 듯 보였다. 살아 있을 때부터 조금씩 잃어갔던
아내. 결국 모조리 다 잃고 나서도 그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남자였다.
[예스터데이]
p 지금까지 쭉 둘이었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는 거...
친구 기타루에게 여친 에리카는 좀 묘한 존재였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는데 진도는 나갈 수 없는...그리고 종국에는 헤어지고만. 하지만
인생은 더 살아봐야 아는 법. 그들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끝없이 돌고 돌아 다시 만나지는 운명인지 각자 서로 여전히 혼자인 소식은 주인공인
'나'에게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기관]
p 그녀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녀가 좋아진다는 겁니다...
성형외과의 도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굴곡이나 고뇌가 부족해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되는 쪽. 결혼으로 묶이기 싫어 유부녀나 짝이 있는
여자만을 만나 즐겨온 그에게도 운명이 어느날 영화처럼 찾아왔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고 똑같이 되갚아주려 바람을 피기 시작한 여자에게 끌리게 된
도카이는 지난 삶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져 다니무라에게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곤 사라졌다. 한참 후 들려온 소식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그가 하루가 다르게 여위고 시들어가다가 그만 죽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잃은 충격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배신을 알게 된
충격이 컸던 것일까. 어느쪽이든 간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큼 인연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단편을 읽고 나니.
[셰에라자드]
p213 틀림없이 언젠가 그것은 끝을 고할 것이다...
하바라와 잠자리를 할때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물어다주어 '셰에라자드'라는 별명이 붙여진 그녀는 하바라보다 네 살많은 서른 다섯의
전업주부다.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있지만 애인도 있는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하는 남학생의 집에 침범했던 과거 있는 여자였다. 축구 선수였던
인기남이 눈길조차 주지 않자 그 방에 몰래 들어가 그의 소지품들을 살펴보고, 침대 위에 누워 있기도 하고 간혹 물건들을 훔쳐오기도 했으나
어느순간부터 남학생에 대한 동경심이 옅어져가자 홍역처럼 앓던 빈집털이를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훗날 다시 그와 마주쳤던 이야기가 궁금한지 묻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하바라는 이미 그녀에게 낚인 한마리의 물고기였으니......!
[기노]
p271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은 '되도록 평범한 스카치를 더블로!' 주문한 다소 과묵한 남자였다. 회사는 그만뒀고 결혼생활은 곧 파탄날
지경에 이르른 그는 독신 이모의 가게를 임차해 '바'를 열었다. 온몸 여기저기 화상자국이 있는 여자손님과 아침까지 미친듯이 섹스를 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그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놓은 그 감정이 눈 바로 아래까지 차오를때까지. 그리고
그토록 잊고 지내고자 했던 감정과 마주하며 그는 어둡고 조용한 방안에서 홀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들을 작가는 짧은 단편 안에 빼곡하게 써두었다. 무엇보다 이 단편을 읽고 느낀 감정은 담담함이어서 놀라웠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처럼
치유의 감정이 느껴졌다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평범하게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담담함으로 읽혀져 나는 내가 참 많이 단단해지고
있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잠자]
p308 만약 누군가, 무언가 그 방에 갇혀 있었다면 그건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아니다...
한국어 판에 특별히 수록된 [사랑하는 잠자]는 후미쪽에 자리잡고 있다. 눈을 떴을 때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주인공만큼이나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대체 그레고르 잠자가 무엇이지? 차라리 영화 파리가 된 남자가 훨씬 상상하기 쉬웠는데. 아무리 묘사가
상세하다고 해도 나는 대체 그레고르 잠자가 무엇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 하필 그레고르 잠자여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 없는 남자들]
p318 아무도 죽지 않았어. 잘못 걸려온 전화야...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통. 아내의 자살을 알리는 남편의 목소리였다. 한참 전에 헤어진 여자의 죽음을 굳이 알려야했을까. 특이한 건 사귄
여자 중 셋이나 자살했다는 점인데, 죽은 여자는 열네 살쯤의 기억 어딘가에 있는 여자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일은
간단해 보인다. 깊이 사랑한 여자가 어디론가 사라지면 그 순간부터 그는 '여자 없는 남자들'에 속하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남자들에게 과연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이 모든 여자를 잃는 다는 의미가 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느낌을 받는 남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단편들은 편안하게 읽혔다. 아주 특이하지도 아주 난해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잠자가 약간 이색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상상이 되지 않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뿐 세상에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닥 특색있다고 할 순 없었다. 다만 짧은 길이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ktx처럼 지나쳐갔는데 살아온 날들에 비례해 생각의 길이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신기하게 느껴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