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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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 - 온다 리쿠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리세 시리즈’라 불리는 시리즈의 하나이다.


  책장을 덮고 '도서실의 바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리세의 어린 시절이 나왔었다. 하지만 어리다고 해봤자, 이 책에서의 리세는 중학생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으면서 그 때의 리세와 지금의 리세를 비교해보고 싶다.


  부잣집 자제들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외진 곳에 있는 전교생 기숙사제인 외부와는 연락이 단절된 최고급 학원. 삼월의 나라이자, 교장의 나라이기도 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최고급 시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가 보낸 아이들은 '요람파'

  특수한 재능(예체능 쪽)을 가진 아이들이 일대일로 전문가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양성소파'

  그리고 집에서 숨겨지거나 버려진 아이들의 '묘지파'


  그곳에 리세가 전학을 오자, 학생들은 술렁인다. 2월의 신입생은 재앙을 몰고 온다는 전설 때문이다. 각자 말 못할 비밀을 갖고 있는 학생들과 기이하게 실종된 아이.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휩쓸리게 된 리세.


  읽으면서 몽환적이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 숨겨진 팽팽한 긴장감에 집중해서 읽다가, 마지막 장을 보면서 '반칙이야!'라고 외쳤다. 이런 반전이라니. 어떻게 이런 몽환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배경에서 교묘하게 현실적이면서 믿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분위기에 취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독자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몸을 내맡긴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에게 동감하게 되고,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작가의 마력에 혼을 바치게 되고.


  그리고 번역판만 읽어서 잘 모르겠지만, 번역가가 원작자가 사용한 단어를 최대 99% 제대로 번역했다고 가정했을 때. 작가인 온다 리쿠는 참으로 풍부하고 생소한 어휘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소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녹슨 양동이색 같은 파도'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다. 파도라고 하면 대개 푸른색이나 검푸른 색 등등을 연상하는데, 녹슨 양동이라니……. 그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참으로 낯설었다. 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을 상상해보면, 작가가 주려고 하는 인상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쓸쓸하고 음울한 느낌의 바다.


  책을 다 읽고, 리세와 같은 상황이라면 난 어땠을까? 리세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히지리는? 요한은? 레이지는? 레이코는? 유리는?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았을까?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았을까? 아니면 결국 묘지파가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고 말았을까?


  십대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어른에 대한 미묘한 반발심과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자기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리, 독점욕, 동지 의식, 비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불안, 초조, 너무도 위험한 천진함과 순수함 등등.


  복잡 미묘한 감정들과 알 수 없는 긴장된 분위기가 읽으면서 마음을 약간은 불편하게 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며, 나른함까지 느끼게 했다.


  확실히 대단한 이야기꾼임에는 틀림없다, 온다 리쿠는.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한 명 만날수록, 지름신의 압박은 날로 더해지기만 하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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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김태용 외 감독, 이영진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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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민규동, 김태용

출연 - 박예진, 이영진, 김민선, 공효진



여학교를 다니다보면, 묘한 분위기를 가진 아이들이 있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그런 아이들. 그래서 자세히 보면 그런 애들을 둘러싼 아이들 간의 묘한 신경전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런 아이와 친하다는 것이 일종의 자랑거리나 과시, 그런 것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또 은근히 성숙미를 풍기는 아이들도 있다. 여성스럽고 차분하니 영락없이 여자구나, 큰언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몸매도 어른스럽고, 성격도 하는 행동도 다른 학생들과는 뭔가 묘한 인상을 주는 그런 아이들 .


그리고 패거리라고 해야 하나 소집단 위주로 뭉쳐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노는 애들이 있다. 아무리 같은 반이라지만, 자기 그룹 외의 다른 아이들에게는 약간 배타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면을 보이기도 한다. 만약 그게 다른 반이면 뭐…….


그래서 아이들끼리 싸운다거나 아니면 누군가 그룹 외의 다른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생기면, 세상이 무너진 듯이 슬퍼하는 경우도 있다. 관찰하는 재미가 있긴 하다. 어떤 의미로는.



이 영화에서도 그런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이 잘 드러나 있다.


중간에 김민선이 이영진에게 관심을 보이자, 김민선의 친구가 너 갑자기 왜 우리랑 안 놀고 그런 애를 신경 쓰냐며 마구 화를 내는 부분도 그렇고, 박예진이 자기 반이 아닌 다른 반을 들락거리자, 그 반의 아이들이 왜 남의 반 애가 와서 설치냐는 듯 한 눈으로 보는 것도 그렇다.


여고 괴담이 나오기 전 세대 어쩌면 그 후 세대들도 그렇겠지만, 집보다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오죽했으면 야간 자율 학습(이라고 쓰고 타율 학습이라고 읽는다)이 끝나고 집에 갈 때, '집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내지는 '좀 있다 만나자.' 라는 인사를 할 정도였을까.


집은 그냥 잠자는 곳이었다. 가족보다는 같은 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그들이 가깝게 느껴지고 의지하게 되고 그런 것이다. 하루 종일 거의 붙어 다니니까, 속마음도 털어놓고 등등.


그래서 박예진이 이영진에게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낀 것 같다. 친구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말이다. 특히 이영진이 학교에 꼭 있는 훤칠하게 키가 큰 중성적인 아이였으니까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애정이 부담스러웠던 이영진이 결별을 선언하자, 널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매달렸을지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랑과 절망을 안고, 박예진은 자살을 한다.


사랑하는 그 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 애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뭘 해야 할까? 그 애 앞에서 사라져주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좀 어리석긴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전부이자 우주가 돌아가는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인데.



2편의 귀신은 무섭다기보다는 애틋하고 슬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저세상으로 가기 전에, 자신이 머물렀던 학교를 돌아보는 그런 분위기로, 죽어도 떠나기 싫은 사람을 두고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귀신이었다.


음, 사실 아주 친한 친구와 결별을 한다고 해도, 시간은 흘러가고, 우주는 여전히 돌아가고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비록 내 자신의 세상이, 내 마음 속의 우주가 파괴될지라도 말이다.


하긴 내가 죽어도 지구는 움직이고 우주는 팽창을 거듭하고, 어느 별인가는 태어나고 소멸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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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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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 온다 리쿠



이 책은 4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1부는 사라진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찾는 기묘한 모임에 초대받은 회사원의 이야기.

2부는 역시 '삼월을 붉은 구렁을'의 작가를 찾아 길을 떠난 두 편집장의 이야기.

3부는 좀 생뚱맞지만 두 소녀의 사고사를 둘러싼 비밀을 다루고 있다.

4부는 작가인 온다 리쿠가 직접 나서서, 4부작 시리즈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는지 리세의 이야기와 번갈아가면서 서술하고 있다.


작가 미상의, 200부 정도만 자비 출판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비밀의 책. 책의 소유자는 딱 한 명에게, 그것도 단 하룻밤만 빌려줄 수 있으며 그것도 나중에 작가의 대리인이 모든 책을 회수해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의 소설.


총 4부작으로 각 편마다 문체가 조금씩 달라서 여러 사람이 썼다는 설과 한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써내려갔다는 설이 분분한, 그래서 더 미스터리하고 신비한 뒷이야기만 남긴 책.


이것이 바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음, 그러니까 책의 제목이 바로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책이고, 1,2부는 그 책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거기에 4부에서 리세가 찾아낸 책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기도 하고.


아, 뭔가 복잡하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서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에 대해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 나온 것과는 좀 거리가 멀다. 그 책이 그 책이 아닌가? 하긴 이 책의 4부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도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다. 뭐,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면 달라지기도 하겠지. 애거서 크리스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딱 이렇다하고 규정을 지을 수 없는 소설이다. 역시 어휘는 낯설면서 감각적이고 이해가 빨리 와 닿았다. 이건 순전히 번역본으로 판단하는 것이라, 전에도 언급했듯이 번역가가 원작자의 어휘를 얼마나 충실히 되살렸는지가 관건이지만.


글의 서술은 평범하고 조용하지만, 실 또는 고무줄이 느슨하지만 조금만 당기면 팽팽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잡아당기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읽어갔다.


하지만, 어느새 작가의 의도에 휘말려 꽉꽉 잡아당기면서 미지의 상대에게 ‘놓지 마!’ 라고 외치고 있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상대방이 놓아버리면, 내가 맞으니까. 그러면 아플 테니까.


전반적으로 각각의 내용은 책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생뚱맞게 남겨진 책. 그래서 더더욱 내용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책.


하지만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여정이 때로는 자신의 숨겨왔던 치부를 드러내는 길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캐내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다 비밀은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개성과 진심이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의 본심을 알게 된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2부와 3부는 자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난 여자 형제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동성의 혈육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과 성염색체가 같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또 다른 존재.



조금씩 개성은 다르겠지만, 어쩌면 거울을 보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비슷한 모습을 비춰주거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어쩌면 또 다른 나일수도 있었던, 그런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존재.


어쩌면 내가 동성의 형제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의 형제보다는 좀 더 가깝지는 않을까?



거울과 책.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과 자신의 고백일 수도 있는 책.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고백일 수도 있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두 가지 사물.


그러고 보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서 리세가 제일 좋아했던 책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였다.


음, 뭔가 말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머리와 입에서만 왔다 갔다 할 뿐. 그냥 ‘작가님 너무너무 좋아해요!’라고 마무리를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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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박기형 감독, 최강희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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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박기형

주연 - 이미연, 김규리, 박진희, 최강희



  내가 다닌 여자 고등학교에는 괴담이 있었다.


  깊은 밤, 학교 재단 창립자의 초상화가 걸린 중앙 복도에 서서 그림을 마주보면 눈이 움직인다거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 밑에 시체가 묻혀 있다는 그런 종류였다. 시체 얘기는 그 사람이 일제 강점기 때 열성적인 친일파로 자기 제자들을 종군 위안부로 보낸 전적이 있다는 말과 결합하여 그럴듯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1학년 때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아이의 혼이, 그 날 이후 밤만 되면 학교 안을 헤매고 다닌다는 그런 얘기도 있었다. 빛이 비추는 것을 그 유령이라고 착각하여 -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지만 - 심야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가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소문일 뿐이었다. 그냥 하품이 나는 늦은 시간의 타율적 자율 학습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아이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였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선생들의 태도.

  몇 명의 남자 선생들이 선생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여학생들에게 행했던, 일련의 수치심을 느끼게 하던 행동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성희롱이다. 영화에서 나온 건 그나마 무난한 편?


  지금이야 교권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서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난리가 나겠지만, 십년도 전인,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선생의 권위란 실로 무시무시했다. 반항이라고는 꿈도 못 꾸어볼 일이다. 학교에서 부모님을 부르면, 대부분의 부모님들 반응은 '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선생님이 그러시지.'였으니까.


  학생들은 약자였다. 선생이 부모를 불러서 돈을 요구해도, 빌려서라도 갖다 바쳐야 하는 그런 때였다.


  그래서인지 사춘기를 보내는 어린 학생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에게는 최악으로 느껴질 만한 일들이, 학교에는 더 많았다. 전체가 아닌 일부가 그랬겠지만, 그것들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학교는 전학을 가거나 졸업을 하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고 괴담을 보는 내내 예전의 기억이 오버랩 되면서 더 실감나게 무서웠고 불편했고, 그들에게 공감을 했다.


  성적 때문에 친구 사이가 멀어지고, 적성과는 상관없이 명문 대학이나 가면 된다는 생각, 적성이나 재능보다는 성적에 좌우되는 풍토, 그리고 하루 3분의 2를 학교에서 보내기에 가족보다 더 가까운 친구 사이의 관계까지. 이 영화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을 해서 극을 진행했다.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잔인하다던가.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너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런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잡아내는 연출이 멋졌다.


  물론 오랫동안 맺힌 한이 너무 쉽게 풀리는 감이 있지만, 어린 여학생이니까. 마음이 여리니까하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1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특수 효과가 요즘처럼 멋지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스토리는 괜찮았다.



  ps - 그렇지만 학교가 그렇게 끔찍하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닐만한 뭔가가 있었으니까. 비록 대학을 가기위한 중간 단계라는 생각으로, 졸업하면 돌아보지도 않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버틸만한 일들은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꿋꿋하게 살아가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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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오브 데드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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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드 오브 데드 (Land of the Dead)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 밤에 눈을 떠서, 새벽부터 낮까지 쭉 놀던 잘 나가는 언니들의 시간표와 비슷한 좀비 시리즈. 이 영화는 만약에 좀비들이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점에서 시작한다.


  좀비들은 드디어 인간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안전한 피신처이고 좀비들이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입장을 바꿔서 좀비들의 생각에는 인간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살이 포동포동해질 때까지 키웠다가 잡아먹는 돼지를 생각하면 될까?


  빈약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인간들은 좀비를 막았다고 하겠지만, 좀비들의 입장에서는 저 안에 먹을 것들을 담아놨다고 할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그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어 살고 있다. 이른바 있는 놈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누리고, 없는 놈들은 비참하게 지내고 있다. 인간의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좀비들의 공격에 멸종할 위험에 처해있어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오프닝 부분의 빨리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 좀비들은 인간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들리는 목소리. 아마 방송인 것 같은데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알던 가족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퍼하거나 묻어줄 여유도 없습니다. 그냥 머리를 쏴버리세요."



  가족의 해체이자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말이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좀비라는 것을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도 그런 존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개념은 안드로메다 뒤편으로 보내버린 채 살아가는 인간들.

  남에게 휘둘리며 자기주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

  뭔가에 중독되어 그것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아니 그냥 기계적으로 그것을 취하는 인간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폐인이나 중독자 내지는 인간쓰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런 인물이 가족 내에 있으면, 가족은 붕괴되기 쉽다.


  그들을 보는 가족의 시선은 "왜 그러고 사냐?" 또는 안타까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일부는 수치스러워하기도 하고 말이다. 심지어 같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인간이 좀비를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좀비처럼 마구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살인이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그런 생각을 좀비와 인간의 관계가 무척이나 씁쓸하게 느껴졌다. 좀비와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사이와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점이 무서우면서 소름끼쳤다.


  인간의 정이라는 건 한없이 끈끈하고 깊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빈부 차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날 불편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있는 인간들은 멋진 건물 안에서 아늑하게 살아간다. 밖의 인간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 대가를 지불하면서 말이다. 밖의 인간들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좀비들이 설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슈퍼나 백화점을 싹쓸이해온다. 그러면 안의 인간들은 그것들을 소비하며 풍족하게 살아간다. 밖의 인간들이 그 일을 하다가 좀비가 되든지 아니면 좀비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하든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밖의 인간들은 돈을 모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희망이라기보다는 헛된 기대 같다.


  마치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곳에 취직을 하고. 그러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뭐 어차피 그래봤자 죽음(=좀비)는 둘 다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말이다.


  시리즈를 다 보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이거다.


  좀비처럼 살 것이냐, 인간처럼 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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