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Fairy Tale Killer

  감독 - 대니 팽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상영작

 

 

  영화 시작 부분에 붉은 글씨로 떠오르는 영문 이름. Danny Fang. 그렇다. 이 영화는 ‘The Eye’로 유명한 팽 브라더즈의 한 명인 대니 팽의 작품이었다.

 

  경찰서에 남자가 하나 잡혀온다. 이름은 주재준.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모자란 사람 같고, 얼굴엔 하얀 칠을 하고 있다. 아무 말도 안하던 그는 한 반장을 보자 활짝 웃으면서 ‘나를 모르겠냐?’고 묻고는, ‘장 휘’라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었다던 사람은 멀쩡히 살아있었고, 경찰은 그를 풀어준다. 그리고 한밤의 해프닝으로 여기고, 없던 일로 처리한다.

 

  그러나 ‘장 휘’가 죽은 채 발견되면서, 일은 꼬여만 간다. 지난 밤의 일을 보고하지 않았기에, 경찰은 증거를 빼돌리고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어디선가 비밀이 새나가고, 한 반장의 팀은 갈등과 오해 그리고 와해 분위기로 치닫는다.

 

  그 와중에도 끔찍하게 죽은 시체가 연달아 발견된다. 그들이 과거 같은 고아원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자폐, 집단 따돌림, 어른들의 무관심, 이기주의,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

 

  어린 시절 누구나 다 동화를 읽는다. 거기서는 언제나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 걸로 끝이 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믿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도리어 나쁜 사람이 더 잘 되고, 착한 사람은 고통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지금 당장이야 그렇지 않아 보여도, 언젠가는 꼭 하늘의 벌이 내릴 거라고 말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내가 죽은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무슨 수용이람?

 

  영화에서 ‘주재준’이 절규한다.

 

  “다 죽을만한 놈들이었어!”

 

  왜 제목이 ‘잔혹 동화 살인마’인지는 죽은 자들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동화 ‘일곱 마리 아기 염소’처럼 일곱 개의 돌이 들어간 채 죽은 남자.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처럼 산 채로 구워진 여자.

  ‘빨간 구두’처럼 발이 잘린 채 기계에 매달려 춤추듯이 죽은 사람.

  그리고 ‘신데렐라’의 언니처럼 구두에 맞춰서 발뒤꿈치가 잘려 죽은 여자.

  (이건 추측이다. 신발이 피투성이였고, 감독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 뿐.)

 

  어릴 때 읽었던 동화처럼, 하늘이 벌을 주지 않기에 범인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한다. 그에게 나쁜 인간은 다 동화에 나오는 늑대였다. 나중에 다 벌을 받아 죽는 늑대.

 

  후반부에 마치 영화 ‘쏘우’의 직쏘처럼 한 반장에게 게임을 제안하는 범인. ‘대니 팽이 쏘우 시리즈를 감명 깊게 보았나?’라고 생각했는데, 결말까지 보고나니 ‘아,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구나 다 어린 시절에 마음속깊이 간직한 영웅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영웅이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해 속물로 변한다면, 그 모습을 지켜봐야한다면, 그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언제나 그 사람은 나의 어릴 적 영웅 그대로여야 하니까.

 

  영화가 끝나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들은 동화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어째서 인간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 걸까?

  인간의 본성은 진짜로 성악설이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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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The Tall Man

  감독 - 파스칼 로지에

  출연 - 제시카 비엘, 조델 퍼랜드, 스티븐 맥허티, 윌리엄 B. 데이비스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상영작

 

  영화는 동굴을 수색하고 나온 경찰과 얼굴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는 여인의 눈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에 자막으로 미국에서는 매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이들이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 정도면 ‘아, 실종 아이에 관한 내용이구나.’라고 짐작을 하게 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 소녀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폐광 마을 콜드락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첫 장면에서 유리 조각을 빼내던 여인인 줄리아는 그 마을의 유일한 간호사이다. 의사였던 남편이 죽은 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초반은 아이와 보모, 그리고 그녀까지 셋이 지내는 일상과 마을의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아이가 납치당한다. 줄리아는 아들을 찾기 위해 달리는 차에 매달리고 개에 물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이는 되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 전까지는 그녀를 무척이나 존중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욕하고 감시하고 잡아 죽이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서, 애인님과 ‘마을 사람들이 한통속인거야!’라고 분개했다. 마을에서 아이를 하나씩 골라, 톨 맨이라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존재에게 제물로 바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교 집단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이 영화, 반전이 있었다. 물론 중반을 넘어가면서 비밀이 밝혀지긴 했지만, 후반까지 그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이것저것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 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살았다면 어떻게 된 걸까? 영화는 초반에 톨맨이 누구냐는 것에 집중했다면, 중후반은 아이들의 생사에 초점을 맞춘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에게 자식의 생사를 모른다는 건, 그야말로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문득 ‘조카들을 잃어버린다면…….’하고 상상해봤는데 눈물이 먼저 흘렀다. 고모인 나도 그런데, 부모는 오죽할까?

 

  영화가 끝나고 고민했다. 과연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 천륜이라는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을까?

 

  나만 그럴지 모르지만, 공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특히 엄마아빠한테 혼이 나면 특히 그랬다. 내 진짜 부모는 아주 부자인데, 날 어릴 적에 잃어버린 거라고. 그래서 언젠가 진짜 부모가 날 찾으러 올 거라고.

 

  애인님은 영화를 다 보고 한마디 했다. 키다리 아저씨의 호러 스릴러 버전이라고. 난 유괴의 미화 같았는데. 어떤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 해도, 범죄는 범죄에 불과하다.

 

  그들은 정말 행복할까? 영화 마지막 장면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반문하는 질문에서 조금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의 전작인 '마터스'는 좀 그랬는데, 이번 작은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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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The Cabin in the Woods

  감독 - 드류 고다드

  출연 - 크리스 헴스워스, 크리스틴 코넬리, 안나 허치슨, 프랜 크란츠


  처음에 한글 제목만 얼핏 듣고는 숲에 있는 사람 이름이 케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스터를 보니, 오두막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다. 아, 캐빈. ‘ㅔ’ 와 ‘ㅐ’는 확실히 다르다.


  영화는 많은 다른 작품들을 떠올렸다. 좋게 말하면 친숙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짜깁기라는 것이다.


  다섯 명의 남녀 대학생이 숲에 있는 오두막에 놀러가는 것은 ‘이블 데드’를 연상시켰고, 그들을 몰래 카메라로 관찰하는 사람들은 ‘호스텔’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오두막 지하실에 있는 물건을 만지자 그들을 죽일 뭔가 튀어나오는 것은 ‘헬 레이저’, 숲 전체에 결계가 둘러져 있는 것은 ‘13층’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악령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것들이 유리벽에 갇혀있는 것은 ‘13고스트’를 생각했고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유리 상자는 ‘큐브’


  갇혀있던 악령 내지는 괴물들이 풀려나오는 부분에서는 제작진들은 나와 ‘이건 어느 영화를 떠올릴까요?’ 퀴즈 시간을 갖자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많이 맞추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대략 러브크래프트의 대왕 문어 괴물 비슷한 것도 있었고, 스티븐 킹의 삐에로 짝퉁, ‘헬 레이저’의 수도사 비스무레한 존재, 에이리언 짝퉁, 그리고 늑대 인간으로 추정되는 것까지. 아! 공룡과 유니콘도 나왔다. 대충 기억나는 건 여기까지.


  광고 문구대로 모든 예측이 무너졌다. 연상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말이다. 결말 부분의 깜짝 출연 배우는 진짜 예측을 못 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괴물과 싸우는 배우 중에는 이 분이 갑이지.


  영화 내용은 중간에 ‘어랍쇼?’하는 대목만 빼고는 뭐 괜찮았다. 역시 주인공 버프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꽤나 오래 살았다. 친구들은 그 정도 공격에 이미 죽었는데 말이다. 역시 주인공!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고대나 현대나 인간들의 생각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에 대한 경외심. 그분을 위해서라면 남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그 의지!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축제화해서 즐기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품성! 다만 고대인과 현대인은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어찌되었건 당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남이니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애인님과 한참동안 수다를 떨었다. 서로 놓친 괴물 내지는 악령이 뭐가 있을까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동시에 ‘우리가 이렇게 많은 영화를 봤었나?’ 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이 정도면 뭐, 별로 무섭지도 않고 긴장감도 조금은 있고, 내 생각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집중도 하고, 같이 본 사람과 영화에 대해 많은 대화도 나눌 수 있고,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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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절대 클릭 금지

  감독 - 김태경

  출연 - 박보영, 주원, 강별, 이맑음


  올해의 첫 한국 공포 영화였다. 그런데 솔직히 대놓고 말해서 영 아니올시다였다. 작년에 본 세 개는 괜찮았는데……. 나는 보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작품 하나를 보고 온 애인님의 표현을 빌면 ‘올해는 작년만 못하다.’였다.


  어차피 판타지니까, 소설이나 영화를 접할 때 현실성보다는 개연성을 찾는 편이다. 아무리 귀신이나 악령 내지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슥삭슥삭 닥치는 대로 죽이는 영화라도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망작이 되는 것이고, 있으면 평작 내지는 대작이 되는 것이다.


  소재는 상당히 시사적이고 시기적절했다. 요즘도 논란이 되는 인터넷 악성 댓글이라든지 무분별한 제 3자 동영상 촬영 공개 및 악마의 편집으로 인한 인터넷 마녀 사냥.


  악성 댓글은 나도 받아봤지만,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참으로 저렴하고 비속어가 섞인 말이었다. 그 댓글을 단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안 봐도 천박하고 가정교육을 엉망으로 받은, 자연스레 그런 사람을 자식으로 둔 부모님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난 한 두 개만 받아도 속상한데, 그걸 매일 수백 수천 개씩 받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그것도 내 잘못이 아닌, 타인이 악의적으로 날 모함하려고 올린 글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말이다. 익명이라는 것이 무슨 비아그라나 스테로이드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지, 인터넷의 선 뒤에 숨어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 작품은 영화 ‘피어 닷 컴’이나 ‘링’ 그리고 제목이 당장은 생각 안 나지만 조회수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영화들보다 더 우리 실정에 맞아떨어지긴 한다. 악성 댓글이나 아프리카 별창이라 욕먹는 몇몇 사람들 등등. 그런 점에서는 점수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뭔가 많이 빠진 느낌이 들었다.


  우선은 고3이라는 동생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언니의 외모덕분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귀여운 목소리로 동생을 혼낸다면 먹힐 리가……. 내 동생은 내가 지킨다는 대사에서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비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의 남자친구는 왜 사이버수사대에서 일하면서 마음대로 영상자료를 빼오는지. 아무리 대학생 아르바이트라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나? 거기서 개연성이 팍 떨어졌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한 타당성을 주려고 이것저것 앞에 뭔가 나열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유를 위한 이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애초에 언니를 스토킹하는 존재의 정체는 뭐였는지. 동생을 괴롭히기 전에 언니에게 접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인지.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만 죽이다가, 갑자기 이번에만 언니에게 먼저 다가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인데 명확히 나오지도 않고.


  사람을 죽이는 그 존재도 처음에는 관련자만 괴롭히는 것 같더니만, 나중에는 영상을 본 사람까지로 범위가 확장되고. 얘기가 오락가락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잘 정리를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전이랄 것도 없고, 그냥 모든 것은 예측대로. 그냥 완전히 병맛으로 가거나,스토리가 기발하거나 ,그냥 무조건 죽이고 보는 영화는 없을까? 괜히 어중간하게 만들어서 이도저도 아니게 하지 말고 말이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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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God Bless America

  감독 - 밥 골드웨이트

  출연 - 조엘 머레이, 타라 린 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상영작


  영화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혼한 아빠와 공원이나 동물원에 가는 것보다 아이팟으로 게임하는 걸 즐기는 아이. 옆집은 상관안하고 고성방가를 일삼는 무책임한 부모들. 한 사람의 약점을 끄집어내서 놀림감을 만들고 비꼬고 웃기를 조장하는 언론 매체들. 이유 없이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그걸 인터넷에 올리는 허세에 찌든 십대들. 그리고 전날 본 방송 얘기로 하루를 보내는 수동적인 사람들.


  주인공 프랭크는 그런 것에 짜증이 난 사람이다. 예의 없는 것들을 싫어하고, 단점이 있는 사람을 놀리는 세상을 증오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왜 이리 비 문명화된 사회처럼 노느냐고 말한다. 그런 그의 철학은 영화 초반에 회사 동료에게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대화 부분에서 드러난다. 아니, 대화가 아니다. 그 혼자 열 받아 떠드는 것이지.


  프랭크는 동료 여직원에게 꽃을 선물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그에게는 동료애였지만, 상대는 스토킹이라 생각했나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뇌종양 진단까지 받는다.


  그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실행하기로 한다. 방송에서 그동안 보았던 예의 없는 것들을 응징하기로 한 것. 그 와중에 우연히 소녀 록시를 만난다. 둘은 이웃집에서 훔친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이 망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다닌다.


  영화를 보면서 어릴 적에 본 ‘내추럴 본 킬러 Natural Born Killer’라는 작품가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는 연인인 두 남녀가 닥치고 죽이고 다녔다. 이 영화에서는 부녀로 보이는 두 남녀가 그러고 돌아다니고.


  그들이 그러는 데는 별로 이유가 없다. 단지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다. 자기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규칙, 자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상대이기에, 그들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오염만 가속시킬 것이라는 자의적인 판단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은 죽어 마땅한 놈들로 넘쳐난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것들 안 잡아가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쓸데없이 산소를 줄이고 이산화탄소만 배출하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닐 수 있는 걸까? 영화는 아주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마구 총질을 하고 다니는 두 사람을 잡아낸다. 그들에게 살인은 유쾌한 여흥일 것이다.


  그런데 프랭크야 이미 죽을 날만 받아놓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단지 이 세상이 지겨워서 뭔가 색다른 자극이 필요했던 록시는 대체 뭘까? 그녀 역시 프랭크가 진저리를 쳤던 다른 십 대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동료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방송에 자기들 얘기가 나온다고 좋아한다.


  결국 그도 자신이 혐오했던 그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바란 것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변화일까 아니면 늙고 지친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관심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이해하는 그 누군가였을까?


  그의 행동에 공감은 못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의미 없는 전파 낭비격인 프로그램도 많고, 산소를 빼앗는 예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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