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시절
강소영 지음 / 담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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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에세이를 읽고 눈물, 콧물 펑펑 쏟아낸 책을 만났다.

마지막에 실린 ‘딸에게 보내는 혜옥 씨의 편지’ 두 번째 글을 읽으면서, 딸을 향한 혜옥 씨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지 느껴졌다. 그 사랑이 너무 벅차서, 감당할 수 없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강소영 작가의 『사랑이라는 시절』은 누군가에겐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나에겐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고, 끝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아버지 강갑천 씨의 생애와 죽음, 2장은 어머니 혜옥 씨의 시간, 3장은 이 책의 저자인 딸의 시선으로 가족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두 편이 부록처럼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한 가족 안에서 오고간 사랑, 그 사랑이 시간이 지나 어떤 기억으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의 연대기’에 가깝다.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부터 마음을 정통으로 찔렀다.

“우리 아빠는 대체 왜 그럴까.”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 문장들은 어릴 적 내가 똑같이 내뱉었던 말이었다.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으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의 결이 너무도 비슷해서 단숨에 감정이 몰려왔다. 이 책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주었다.

1장은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강갑천 씨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전쟁 중 태어난 그는, 가난하고 조용하지만 책임감은 강했던 사람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꿈꿨지만, 교무실 문 앞에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그 꿈을 내려놓아야 했다.

“제발, 제발 우리 선생님이 아버지를 이기게 해 주세요.”

어린 갑천 씨가 속으로 빌던 그 간절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성장이 아닌 생존의 삶을 살아냈다. 그러다 뇌종양이라는 병을 얻고, “1999년 5월 비 내리는 밤” 가족 곁을 떠났다.

특별하지 않았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그의 인생은, 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롯이 전해진다.

2장은 아내 혜옥 씨의 시간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얼굴에 하얀 천을 덮으려는 손길을 애원하며 말리던 그녀.

“아이들이 아직 얼굴도 못 봤어요.”

그녀는 혼자 침대에 누워 “이제는 내가 가장이야”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매일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덮쳐온다.

소주 한 잔을 손에 쥐고, 이불 속에서 울음을 삼키며 혼잣말을 한다.

“여보, 나도 당신 곁으로 가고 싶어.”

그 말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당신이 그리워서 차마 견딜 수 없다는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잡아간다.

마지막 3장은 딸의 시선으로 쓰였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던 순간,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순간,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날들.

딸은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가족의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간다.

일상으로 돌아와 식탁의 빈자리에 눈길이 가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지를.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다시 펑펑 울었다.

“소영아, 혹여라도 눈이 아프거나 잘 안 보이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

엄마 눈을 네 눈과 바꾸어 줄게. 엄마는 많이 살았고 많이 보았으니 괜찮아.”

이 구절에서 사랑이란 얼마나 강력한 감정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 어떤 언어보다 강하고, 그 어떤 위로보다 다정한 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눈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는 마음을 표현하자면,

그 어떤 말로도 쉽게 표현되지 않으리.

책을 덮고 나니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다.

부모는 항상 곁에 있을 것 같고 내 삶의 일부처럼 느껴지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책처럼 가까운 이의 상실을 겪고 나서야 그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작가는 고백한다. 어릴 적엔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부모가 부끄러웠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제대로 알게 됐다고.

아빠는 떠났지만, 그와의 기억은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려 고요하게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엄마와 나눴던 일상은 매 순간이 쌓여 삶을 이어가는 숨결이자, 내가 걸어갈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첫 책은 부모님을 위한 글이 되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 책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혹시 나는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

그 사랑을 오해하거나,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은 없었을까?하고 말이다.

『사랑이라는 시절』은 그런 잊고 지냈던 사랑을 다시 꺼내어 보여주는 책이다.

너무나 사소해서 귀한 줄 몰랐던 그 시절, 그 시간들.

그 이야기를 꺼내 우리에게 건넨다.

사랑이란 이름의 기억은 시절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이 오래도록 우리 마음속에 남는 이유다.

'담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남편이 죽었다

‘뇌종양’이라는 단어를, 혜옥 씨는 그때 처음 알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 이후 다섯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여섯 달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선고는 정확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오늘이 고비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두 번의 수술과 병원 생활은 길고 길었다. 마침내 끝이 왔음을 전하는 의사의 말에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꿈에서라도 마주하기 싫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준비되지 않는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다.

"엄마, 애들 아빠가…… 불쌍해서 어떡해."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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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너에게
예원 지음 / 부크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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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넘어짐의 연속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그 뒤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느냐다. 예원 작가의 에세이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너에게』는 이 단순한 진실을 정직하고도 따뜻한 언어로 풀어낸다. 이 책은 찬란한 다짐보다 흐릿한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울지 않고 견디는 법이 아니라,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온다. 아스팔트 위, 운동장, 계단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던 그 시절.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따끔거릴 때마다 우리는 울며 아파했지만 금세 벌떡 일어나 다시 뛰었다. 작가는 그 기억을 꺼내며 말한다. “상처 난 부위를 씻고 소독할 땐 여전히 쓰라리지만, 이제는 알아요. 이 고통이 끝이 아니라 새살이 돋는 시작이라는 걸요.” 그러니 넘어졌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모래를 털고 다시 달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계속 나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는 자신에게 묻는다. “왜 완전한 행복이 와야만 내 인생이 제대로 흐르는 거라고 믿었을까?” 사실 우리에겐 매일매일이 하나의 기회다. 행복은 도착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에 있다. 오늘 하루가 바로 내 인생의 일부라는 걸 깨달을 때, 삶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 된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작가가 자신의 약하고 서툴렀던 순간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점이다. 안 될 인연을 붙잡기 위해 밤새 고민하고, 떠나려는 사람에게 매달렸던 날들. 이루지 못할 꿈을 놓지 못해 스스로를 상처냈던 시절. 하지만 결국 깨달은 건 명확하다. “일어날 일은 막아도 일어나고, 떠날 사람은 붙잡아도 떠난다.” 아등바등할수록 상처는 깊어지고, 붙든 손에 남는 건 쓰라림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흘려보내는 법을 배운다. 움켜쥔 감정에서 힘을 뺄수록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불안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느껴지는 아찔함이 있다.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서 있어도 아래를 보면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 바로 그때 필요한 건 시선을 멀리 돌리는 것이다. “가까운 곳을 보지 말고 멀리 봐라.” 불안이 커질 때는 코앞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먼 미래를 바라보면 그 두려움은 조금씩 옅어진다. 불안이 다시 나를 찾아올 때, 아득히 펼쳐진 저 멀리의 풍경을 보는 시선으로 바꿔보자.

이 책에는 감정에 대한 진솔한 통찰도 담겨 있다. “감정은 지나가고 나는 남는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운다. 힘든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대로 흘려보내도 괜찮다는 것.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이 꼭 그 사람을 위한 선택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을 고통에서 풀어주는 방법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국 상처 입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걸 우리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프고 불행한 감정에만 머무르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는 유난히 약하고 타인의 문제에는 오히려 냉정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타인은 내 고민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러니 나도 내 문제를 멀리서 바라보자. 나는 이 고민을 어떻게 헤쳐 나갈 사람일까?” 그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삶을 훨씬 더 유연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가 유독 마음에 깊이 박힌 문장이 있었다. “반짝이던 감정은 어디로 갔을까?”

한때는 무언가에 푹 빠져 밤을 새워도 피곤한 줄 몰랐고, 가슴 뛰는 설렘을 안고 무언가를 해보려는 열정이 분명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빼쪽빼쪽 말라가는 식물의 줄기처럼 건조하고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진다.

저자 역시 예전엔 어떤 존재의 장점에 빠져들고, 열정적으로 좋아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일상의 반복 속에서 그 감정들을 점점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지금까지 내 삶을 이끌어온 건,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힘이었다.”

삶을 다시 반짝이게 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감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취미를 다시 꺼내고, 그 위에 색을 입히듯 다시 마음을 되살려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좋아하려는 노력에서 삶의 생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단하기만 한 삶으로는 충격을 버티기 어렵다.

저자는 “골프공처럼 단단하면 충격에 금이 가지만, 탱탱볼처럼 유연하면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충격은 우리를 꺾는 것이 아니라, 되려 더 높이 오르게 하는 탄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단단함보다 유연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문장은 ‘다짐’에 관한 부분이다.

“넘어졌다고 멈추지 않겠다. 울더라도 일어나 걸으며 울겠다.”는 그 결의와 다짐이 강력하게 다가온다.

누군가가 나의 미래를 비웃더라도 나조차 알 수 없는 내 가능성을 누가 감히 쉽게 정의할 수 있나?.

그러니 우리는 의심 대신 다짐으로 무장해야 한다.

결국 찬란한 날이 왔을 때 우리를 비웃던 사람들은 눈이 부셔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할 것이다.

저자는 “당신만의 유일하게 허락된 중독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취미나 관심사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자 살아갈 이유를 말한다.

잊고 있던 좋아하는 것들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는 일, 그것은 결국 내가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너에게』는 삶에 지쳐 주저앉은 사람들이나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두에게 다정하게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다 울었으면 이제 같이 걸어가자”고 조용히 손을 내밀어 주는 책이다. 삶이 자꾸 나를 시험해 올 때 이 책은 곁에서 울어도 괜찮다고,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군가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단단한 위로가 된다.

'부크럼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어릴 적, 친구들이나 친척 동생들과 놀다 보면 허구한 날 넘어지는 게 일상이었어요.
아스팔트 길바닥이든, 운동장이든, 계단이든 가리지 않고 넘어져 매일 무릎과 손바닥이 까지고 피가 맺히곤 했죠. 밀려오는 뜨겁고 쓰라린 고통. 처음엔 아파서 울기도 했고, 넘어지며 짚은 손바닥이 따끔거려 한동안 안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금방 털고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우선인 나이가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상처 난 부위를 씻고 소독할 때면 여전히 쓰라림에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이 고통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 새살이 돋게 해 줄 거라는 걸요. 괜찮아질 거라는 걸요.

그래서 넘어졌다고 울고만 있을 순 없어요. 벌떡 일어나 바지며 손에 묻은 모래와 흙을 툭툭 털어내고 멋쩍게 웃어 보이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더 달려야죠.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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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만날 때
엠마 칼라일 지음, 이현아 옮김 / 반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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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카일라의 그림책 『나무를 만날 때』는 펼치기도 전에,

표지를 가득 채운 초록빛 나무 그림이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긴다.

이 책의 첫인상은 단연 책의 크기에서 비롯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판형의 책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장을 몇 장 넘기자 그 의문은 곧 납득으로 바뀌었다. 나무의 웅장함, 고요한 존재감, 그리고 우리가 미처 다 담지 못했던 숲속의 디테일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를 눈앞에서 마주보는 것처럼, 이 책은 우리를 깊고 넓은 자연의 품으로 안내한다.

이 책의 저자인 엠마 카일라는 나무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나무를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

“나무도 생각을 할까? 무언가를 느낄까? 혹시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이런 물음들은 나무를 감정과 의식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단지 풍경의 일부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풍경 속에서 나무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존재로 포착해낸다.

그렇게 나무는 이 책 속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오래된 친구이자 이야기의 주체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나무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뿌리 주변에 자리한 균류망을 통해 영양분과 신호를 교환하는 모습은 마치 자연 속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인터넷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이를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고 소개한다.

이 표현을 듣는 순간, 나는 ‘월드 와이드 웹’을 떠올렸다.

인간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나무들도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 서로를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병에 대한 경고, 병든 나무를 위한 영양분 공유, 생존을 위한 협력—이 모든 자연의 소통은 우리보다 더 오래된, 더 지혜로운 연결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세계는 이렇게도 닮아 있다.

이 책은 단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바라보는 ‘자세’를 바꾸게 만든다.

저자는 책을 쓰기 전, 조용한 공간에서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닷가보다 숲과 나무가 있는 조용한 장소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처음엔 다 비슷하게 보였던 나무들이, 산책을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서로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나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있었을까?”

“이 나무는 몇 살일까?”

“가지 끝에서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서 시작된 관찰은 사진과 그림, 기록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이 그림책이다.

작가의 그림은 세밀하고 따뜻하다.

나무의 결, 가지의 모양, 잎의 떨림 하나하나가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각 페이지는 저자가 나무와 시간을 공유하며 쌓아 올린 내면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평소 무심코 스쳐 지나던 길목의 나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다르게 보이기를 바란다.

어떤 나무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켜봐 왔을 테고, 또 어떤 나무는 누군가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무뿐일까. 여름 끝자락, 꽃 위에 앉은 나비, 포장도로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 작은 풀도 그 자체로 신비로운 존재다.

우리는 종종 이런 자연의 조각들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천천히 다가가 보라’고.

『나무를 만날 때』는 어린이 그림책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메시지는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의 마음에 닿는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 그것을 통해 내 안의 감각을 되살리는 일은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이 책은 다정한 속도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책을 읽고 나서 한 그루 나무가 떠올랐다.

동네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늘 그 자리에 있어 당연하게 여겼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자연을 다시 마주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나무를 만날 때』는 그런 만남의 첫걸음을 조용히 안내해주는 책이다.

나무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며 살아보는 하루.

그럴 때 세상은 조금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까.

삶이 팍팍할 때, 이런 사소한 풍경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느껴보길 바란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라엘 @lael_84' 님을 통해 '반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무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음, 그렇긴 한데, 분명한 건 단어로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거야.
나무는 뿌리 주변에서 자라는 균류망을 통해서 영양분과 정보를 주고받거든.
이 신기한 소통 연결망을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이라고 부르는데, 수백 마일까지 뻗어나갈 수 있대.
나무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까?
아마 나무들은 자신들을 해치는 질병이나 곤충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받을 거야. 서로 영양분을 나눌 수도 있고, 건강한 나무들이 아파서 죽어가는 나무를 도와줄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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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지만, 용기가 필요해 - 도망가고 싶지만 오늘도 이불 밖으로 나와 ‘나‘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든 어른들에게
김유미 지음 / 나무사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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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보다 먼저 마음을 끌어당긴 건 표지 왼쪽에 작게 적힌 문장이었다.

“도망가고 싶지만 오늘도 이불 밖으로 나와 ‘나’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든 어른들에게.”

그 문장이 마치 내 얘기 같았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어설픈 나.

그래도 매일 이불 밖으로 나와 살아가려는 그 몸짓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다정한 위로를 전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미 작가는 회사원으로 일하면서도, 퇴근 후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아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캔버스를 마주하는 하루가 고단하지만 동시에 생기를 준다.

“당장 꿈을 찾아 떠나겠다며 사직서를 던질 용기는 없지만, 아침마다 지옥철을 뚫고 출근을 해낸다.

직장 동료들과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총알을 피하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다음 전시를 준비하며 계속해서 화가의 꿈을 키워간다.”

그 고백은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대변한다.

대단한 도전이나 화려한 성취가 없어도, 좋아하는 일에 하루를 조금씩 투자하며

꾸준히 나아가는 것 자체가 어른의 용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책 곳곳에는 반복되는 질문들이 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게 나답게 사는 걸까?”

저자는 뚜렷한 해답보다는, 그 질문들을 안고 자신만의 속도로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느리고 서툴러도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내 인생의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쓴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드라마를 보기 전 스포일러를 찾아보는 편이지만,

인생만큼은 그 어떤 예고편도 없다고 말한다.

서투른 작가가 쓴 드라마처럼 결말이 엉망일까 봐 두렵지만,

다음 줄을 써내려갈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다짐.

그리고 이 드라마는 유쾌한 성장형 이야기일 거라는 믿음.

“스포를 유출했으니 허위 광고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씬을 살아야겠다.”

이 문장은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우리 모두가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인상 깊은 대목은 ‘나는 나의 첫 번째 팬이 되기로 했다’는 선언이다.

그림을 보고 한숨 쉬던 저자에게 선생님은 말했다.

“작가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그림을 누가 좋아해줘?”

문제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음을 깨달은 순간이다.

고흐처럼 고뇌하는 예술가보단, 피카소처럼 능청스럽게

자기 그림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결국 나를 믿고 아끼는 태도가 더 많은 사랑을 불러오는 시작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유쾌한 문장들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신난 건 신난 거지!”

과거의 실수나 부끄러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 안에 분명 존재했던 즐거움과 의미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을 갖자는 의미다.

그리고 “엉망이어도 괜찮아, 난 귀여우니까.”는 실수해도 괜찮다고,

그 또한 인생의 이야기 하나일 뿐이라고 귀엽게 전하는 말이다.

또한 이 책은 다정함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인지,

저자는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그래서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잘 지내?” 대신

“그냥 생각나서”라는 문장을 보내는 것으로 다정함을 실천하려 한다.

그 작은 관심이 결국 관계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의 진심이 가장 깊이 전해지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완벽한 하루보단 충만한 하루를 살자.”

시간을 쪼개고 효율적으로만 쓰는 삶에서 벗어나,

내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순간에 시간을 들이는 삶.

하루에 책을 몇 권 읽는 크로노스적 시간보다,

그 책이 내 안에 어떤 울림을 남기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할 태도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어른이지만, 용기가 필요해』는

결국 느리고 서툰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

가장 큰 재능이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어진 선은 수직으로 상승하진 않았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했더라도,

나만의 시간대 안에서 꾸준히 버티고 나아가는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책이다.


'북피티'님 통해 '나무사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내 인생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결국 내가 써야 한다. 작가도 나, 감독도 나, 주연 배우도 나, 서투른 작가가 쓴 드라마다 재미가 없거나 의도치 않게 새드엔딩이 되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 줄을 써 내려갈 사람은 나뿐인 걸.

사주 아저씨도 모를 내 인생의 스포일러는 직접 유출할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유쾌한 성장형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다음 회차에는 장롱 면허증을 꺼내 들고 우당탕 운전 연수를 받는 장면이 나올 것이고, 그다음 시즌엔 주인공이 젯소와 유화물감, 소금빵이 든 에코백을 메고 서점에 진열된 자신의 책을 집어들 것이다.

스포를 유출했으니 허위 광고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씬을 살아야겠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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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사유 - 위대한 화가들이 마지막 그림으로 남긴
크리스토퍼 니브 지음, 김다은 옮김 / 사람in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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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들”

크리스토퍼 니브의 『불멸의 사유』는 미술사에 대한 통찰을 넘어, 삶과 죽음,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깊이 있게 담아낸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예술가들의 ‘후기 양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삶의 끝자락에서 남긴 마지막 작품들에 주목한다. 책을 열자마자 독자를 맞이하는 프롤로그부터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고립의 시간 속에서 예술가들의 ‘후기 양식’—즉, 죽음을 앞두고 예술가들이 도달한 표현의 마지막 지점—에 주목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매일같이 들려오던 사망 소식과 고요한 도시 풍경, 그 속에서도 피어난 제비꽃과 패모꽃을 회상하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봄이었다”고 쓴다. 이 감정은 이 책이 일관되게 유지하는 정조이자,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의 핵심이기도 하다.

책은 폴 세잔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잔은 죽을 때까지 그림만을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업을 위해 직접 작업실을 지었고, 익숙한 붉은 물병, 푸른 그릇, 흰 그릿, 크림색 접시, 낡은 책상, 활처럼 휘어진 테이블 그리고 작업용 해골까지—낡고 익숙한 물건들을 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에 둔 ‘해골’은 특히 눈에 띈다. 그냥 소품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세잔에게는 그저 그런 물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죽음을 상징하는 이 해골을 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세잔은 끝까지 배우고자 했고, 그 응시 속엔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어떤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세잔은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와 가까웠던 소설가 에밀 졸라와는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졸라가 발표한 소설 『작품』 속에 예술에 집착하다 몰락하는 화가의 모습을 세잔이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관계는 멀어졌고 결국 절교에 이른다. 세잔은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듯하다. 그를 직접 만난 화가들과 비평가들 역시, 세잔을 몹시 내성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타인과 어울리기 어려운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사람 많은 전시회도 꺼려했고, 오직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길 원했다.

그런 세잔 곁에는 말년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었다. 바로 카라팡크(Carapence)다. 그는 세잔이 생빅투아르 산 근처 작업실로 이동할 때마다 짐을 나르던 조수이자 운전수였다. 세잔은 그와 3프랑 운임을 두고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내며 해고했다가도 며칠 뒤면 다시 불렀다. 대개 이런 다툼을 반복하는 사람 곁에는 주변 인물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카라팡크는 다시 돌아와 조용히 일을 이어갔다. 이 반복적인 갈등과 화해는 세잔 특유의 신경질적이지만 예술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세잔이 말년에 마지막으로 그린 수채화는, 생소뵈르 지역 작업실 테라스에서 바라본 정원 풍경이다. 그림에는 낮은 돌담과 레몬나무, 생트 빅투아르 산의 실루엣이 조용히 담겨 있다. 그는 이 장면을 매일 바라보며 수채화로 옮겼고, 어느 날 작업 중 갑작스러운 뇌우를 맞고 돌아온 뒤 병이 악화되어 일주일 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세잔의 이 마지막 그림을 두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고 말한다. 평생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해온 세잔이, 마침내 말없이 답을 남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채화는 이전보다 훨씬 단순하고 투명했고, 그 안에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바라보는 마음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남기기 위해 그렸던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보고자 했던 시선이 담긴 그림이었다.

책은 이후에 17세기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말년 작품들로 이어진다. 푸생은 죽음과 운명을 주제로 삼았고, 로랭은 빛으로 시간의 흐름을 그렸다. 두 화가는 로마 근교에 살며 이따금 만나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서로의 말을 꼭 듣는 것은 아니었다. 로랭이 천체에 대해 말하면 푸생은 반응하지 않고, 푸생이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 로랭은 하늘만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의 ‘엇갈린 대화’는 서로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이해하고 또 공유한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말년을 ‘사유의 결정체’로 읽는다. 회화적 기교를 넘어,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시도였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등장한다. 그는 말년에 청력을 잃고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한 그는 더 이상 궁정화가도, 국가적 인물도 아니었다. 완전히 유배자였고, 인간으로서의 고야만 남았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남긴 드로잉과 판화는 오히려 더욱 자유롭고 내밀하다. 고야의 그림에는 공포도, 분노도, 희망도 없이 인간 존재의 민낯만이 남는다. 그의 말년은 후기 양식을 사회적·정치적 맥락으로까지 확장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불멸의 사유』의 가장 큰 미덕은, 미술사를 단순히 연표나 양식의 흐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화가들의 삶과 역사, 사회, 그리고 정서적 풍경을 교차시키며 예술가의 마지막 시선을 독자에게 건넨다. 후기 양식은 단지 늙은 화가의 마지막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깊은 사유에 도달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언어이며, 때론 말 없는 직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조용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가장 오래 남는 울림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끝에서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는, 오직 평생을 응시해 온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불멸의 사유』는 그런 예술가들의 마지막 시선이 담긴 책이다.

죽음 가까이에서 피어난 수채화, 침묵 속에서 남긴 드로잉, 서로 다른 철학이 부딪친 엇갈린 대화들.

이 책은 그런 마지막 이야기들을 모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피에르 보나르, 티치아노 베첼리오, 미켈란젤로, 램프란트 판 레인, 프란스 할스,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로랭,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조르조 모란디, 장 시메옹 샤르댕, 오노레 도미에, 조르주 루오, 섕 수틴—삶의 끝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화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욕실을 그렸고, 어떤 이들은 빛을 따라 흐르는 시간을 좇았으며, 어떤 이들은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연필 하나로 인간 군상을 붙들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늙어갔고, 조용한 언어로 삶의 마지막을 기록했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사람in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회화는 그 자체로 창조와 관념의 영역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한낱 필멸하는 인간과 물질의 자기 표상을 위한 지저분하고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회화는 시와 함께 불멸의 사유 속에 존재하며 환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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