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위에 그냥 두둥실 떠 있거나 스르르 미끄러져 떠다니는오리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한가롭고 여유 있고 가볍고 편안한 삶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물밑으로 보이지 않게 그들은 중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에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의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는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7. (1996) - P158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의 괴상한 공부 덕분이었을 거야, 첫 외국행의 신선한 충격이 내게 자꾸 외국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지만, 가장 먼 외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거야. 가장 미지의 지역이 말이야. - P166

수피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하나 있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모여 모여,
흘러 흘러 마지막으로 바다로 흘러들지. 그러나 이 물이 하는 숱한 여행 중에서 언젠가 한 번은 사막을 건너가는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흐르다 마침내 사막 앞에 다다른 물은 절망하지. 달구어진 거대한 모래사막을 앞에 두고서 물은 공포에 떨어. 물이 사막을건널 수는 없으니까. 도중에 물은 깊은 모래 속으로 빨려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그때 사막이 물에게 말하지.
선택하라,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물은 물론 살고 싶다고 말하지. - P169

처음에는 서양 체계와 『노자』를 접목시키려는 의도에서 텍스트를 부지런히 읽고 또 읽었지만 언감생심, 아무런 힌트조차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뒤로는 서양 신비주의 공부를 완전히 끊고서 처음에는 노자, 그다음에는 장자에 몰입하게 되었는데, 노자가 아주 노련한 미스터리 시인이었다면 장자는 강직한 드라마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자가 장자보다는 훨씬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뜻이다. 노자를 읽으면 배가 허해지고 장자를 읽으면 배가 불룩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장자는 사회인습론에더욱 깊이 빠져 있는 데 비해 노자는 우주, 사회, 개인이라는 세 겹 미스터리 신비주의를 완벽하게 시적으로 소화, 전달했다는 것이다. - P181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2021년 11월 11일최승자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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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만화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우리집 창문으로 그애를 훔쳐본 일이 부끄러워졌다. 투이와 한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몰래 반가워했던 마음까지도 그애가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그런데도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 P69

응웬 아줌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는 어땠는지,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아줌마의 질문은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거냐 물어대는 다른 어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있다는 기쁨에 나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줌마 앞에서떠들어댔다. - P75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식탁의 분위기를 얼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어떻게 네가 그런말을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하는 말투였지만 나는 그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79

몇 번이나 독일로 출장을 가면서도 나는 플라우엔에 들르지 않았었다.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의 라이프치히에서 열흘 동안 체류했을 때도나는 애써 그곳을 외면했다. 그곳에는 서로를 경멸하는 부모 밑에서영혼의 밑바닥부터 떨던 아이가 있었고, 단 한 번의 포옹도 없었던 차가운 이별과 혼자 울던 길거리가 있었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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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5만 부 기념 봄 에디션, 양장)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3월
평점 :
품절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99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 P328

나의 목록 작성은 절대로 이만큼 위대하지 않다. 내 목록은 존재를 보장하거나 문화를 이룩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한 나의 목록은 가치를 인식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의 목록은 내가 세상을,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보다 더 철학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 P332

누군가는 이 말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라고 말이다. 소셜미디어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스시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I , 고기 그 비허고 여거운 거 - P337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 쇼나곤은 사쿠라, 즉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벚꽃은 순식간에 져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삼 일쯤 만개했다가 다 떨어져버린다. 다른 꽃(예를 들면 매화)은 훨씬 오래 피어 있다. 어째서 그렇게 연약한 것을 피우려고그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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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과는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 건 남자도 발산하니까. 잘난남자는 물론이고 잘났다고 착각하는 남자들도 발산한다. 스스로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그런 흥에 겨운 에너지와는 또 다르다. 보호받아 마땅한? 그런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아무리 망한다고 해도 망한 느낌이 들지 않고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그런 느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 - P36

이곳이 저런 인간들의 균과 냄새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자 김윤자는 머리가 아프다.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참는다.
김윤자는 염치를 잊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부끄러움을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 아니다. 이말은 적절하지 않다. 그건 남을 배려한다기보다도 그녀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긍지를 지키는 일이니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핸드폰이 제멋대로 울리게 놔두지 않고 이런 데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된다.
김윤자는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핸드폰이 없다. 전화가 울릴 수 없다.
그런데 냄새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 자신한테서도 저런 냄새가 날지 모른다. 씻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씻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김윤자는 갑자기 위축된다.
아…… 하스미 시게히코가 아니라 하라 세쓰코다. - P51

얼굴도 이쁜 여자가 제법이네..
이 정도의 반응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김윤자는 기분이 상했다. 자신의 결격사유가 뭔지 궁금했다. 예상할 수 있어서, 그녀가 예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그녀가 부자가 아니라는 것. 좋은 가정에서 자란 영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게 김윤자가 예상하는 자신의 결격사유였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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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쇼코는 비가 내리던 날에 우산을 들고 마중나오는 할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담을 넘어 집으로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얼마 없는 돈을 쪼개서 사준 옷을 포장째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다.
고 했다. 쇼코는 할아버지가 자기를 마치 여자친구처럼 생각하는 게소름 끼친다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도쿄로 떠나서 다시는 고향으로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P13

11
"여기서 나랑 지내자. 한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
쇼코는 마치 그게 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발랄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는 쇼코를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저 열일곱 살의 쇼코를 기억하고 연락이 끊어져버린 걸 안타깝게 여기며 그렇게 서서히 잊어버렸으면 좋았으리라고,
뉴욕 시립 도서관 앞에서 하나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쇼코에 대한 안타까움과 궁금증을 품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쇼코를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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