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못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 - P105
장희는 그때부터 죽은 삼촌 얘기를 했다. 꼭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얘기여서 요 며칠 오늘만 기다렸다며 뜸을 들이는데어쩐지 장희와 나눠 마시고 있는 공기의 밀도가 빽빽해지는것 같았다. - P110
삼촌이 살아 있다고. 그러니까 삼촌은 죽은 게 아니었고 그동안 나는 완전히 속았던 거라고. - P113
저이는 궂은 날씨에는 안 나오는데 형님은 추우나 더우나한결같이 나왔어요. 어느 해 여름인가 아는 분 소개로 한 철만해볼 생각이었는데 하다보니 계속하게 됐지요. - P119
나는 그 순간 장희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려보았다. 이영서씨에게서 어떤 소중한 것을 건네받은 느낌이 들었는데, 장희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 P121
그렇다면 그건 왜 응당 불안이고 공포였을까. - P128
나는 장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더욱 바라봤고, 장희의 눈에 비치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분노가느껴지는지 확인하려고, 이게 분노라면 어째서 이토록 단숨에서글퍼지는지를 납득해보려고 조용히 시선을 맞받았다. - P151
응, 그리고 어느 해부터인가 장희 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지 카드 안에 추신처럼 한두 문장을 더 적었지. 그때 너는또 오라고 썼어. 처음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나중에는 단정해진 글씨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우리집에 또 오라는말을 잊지 않았어. 그 말이 나는 참 좋았고. - P137
나는 대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일별하고는 아무래도 오늘은어렵겠다고, 뒤에 일정이 있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고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선생님에게는 평일 오전에 병원 진료도받고 차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 P148
내 정체성이 창작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어떤 식으로 취급되는지 나는 모르지 않았고,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게오직 예술과 허구의 세계에서만 온전하다는 것을, 단지 그 안에서만 허락되는 조건부의 인정이고 환영이라는 것을 해를 거듭할수록 절감하는 중이었으니까. - P155
기억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선생님이 나를 보호했던 그 방법이 제외였고 누락이었으며 취소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내 안에서 다시금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 P165
너는 이렇게 멋지게 자랐는데 선생님은 여전히...... 한심하지? - P169
이윽고 선생님이 윤범아, 이윤범, 하고 멀뚱히 서 있던 나를부르더니 어서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두 사람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젖은 눈에 닿아 발등이 빨갛게 부어오른 아이가 아직 자기만의 세계에서 완전히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내게 경계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내비쳤을 때, 선생님이 그애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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