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또한,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자매 해수가 나와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서로가 꿈꾸었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가 나란히각자의 두 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다르지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 P70
"그런데, 지수야."언니가 내뿜은 연기가 길 위로 흩날렸지요."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 P57
"아, 맞다."웃음을 멎은 해수가 천장을 보며 말했습니다."민 교수님이 언니야 글 여기저기서 보인다고 걱정하던데?""응?""요새 어데 뭐 쓰는 거 있나?""응………… 있지." 하는"맞나? 카면 그거 갖고 뭐라 캤는 갑다. 하여튼 꼰대들, 별게 다 문젠 기라." - P47
하지만 타임라인에 올라오던 언니의 일상은 자취를 감췄지요. 이미 올렸던 사진들마저 지운 언니는 개인사를 외부에 노출하는 걸 극도로 꺼렸습니다. 대신 활동에 대한 공지나 오래 매만지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글들만 게시했어요. 그런 언니의 글을 눈여겨본 매체들에 간간이 청탁을 받아 기고하던 중, 젠더 이슈가 폭발하면서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나는 언니의 초고가 방어적으로 보이는 까닭을 이해할 수있었습니다. 헌재 결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중적인공감대를 조성하는 것이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었고, 언니에게도 자신을 믿고 모인 사람들을 비난과 편견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다분히 모성적인 수사를 끌어들였을 때의 문제 또한 가볍지 않다고 여겼기에 한 번쯤은 의견을 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 P37
캔을 슬며시 댔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해수에게 "축하해"라고 속삭이자 해수가 싱겁게 웃고는 아잇적으로 돌아간 듯 내 품에 안겼어요. 나는 그런 동생을 안고서 부쩍 마른등을 쓰다듬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 내 뒷목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더군요. 아주 잠시였지만 매우 분명하게 말입니다.돌이켜보면 그 한 해는 우리 자매가 가까이서 보낸 예외적인 한때였습니다. 해수가 중학생이 됐을 무렵 외고 자퇴생이었던 나는 기숙학원에 들어갔고, 해수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내가 대전에 있는 의대로 진학한 뒤라 우리는 줄곧 떨어져지냈죠. -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