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시를 알고 있습니다가을입니다. 나뭇잎 빛깔이 진해지더니 성질 급한 잎들이 가지에서 벗어나 툭 툭 떨어집니다. 낙엽을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에잠기겠지요. 떨어진 잎과 떨어지지 않은 잎 사이, 그 시차에서 무언가 발견한 걸까요? (당신은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그건 당신에게만 들리는 말, ‘아직‘ 당신에게 속한 말이지요. 한 사람이 내면에 품었던 말을 종이위에 풀어주면 시가 되기도 하지요. 당신 곁에서, 한때 내가 품고 기르던 말을 중얼거려봅니다. - P12
혼자 무언가 끼적이는 일. 속으로 두런두런 혼잣말하는 일. 익숙하던 것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일. 뻔하게 말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일. 슬프다고 하지 않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하고 말하는 일. - P13
태어나 처음 십여 년을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시인으로 삽니다.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구태의연한 아이가 없다는 게 그 증거지요. 상상력의 천재인 아이들에게 시를 써보라 하면, 어른들처럼 쩔쩔매는 아이는 많지 않습니다. "시가 뭐예요?"라고 묻는 아이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쓱쓱 쉽게 써 내려갑니다. 여덟 살 꼬맹이가 제 앞에서 ‘수박‘이란 제목으로 동시를 쓰던 순간을 기억해요. 빨간 집 속에서 까만 사람들이 외친다. 불이야! 불이야!" 저는 이 놀라운 문장을 지금도 외고 있습니다. 감탄한 저를 뒤로하고 아이는 씨익 웃을 뿐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더군요. 아이들은 생각이 발랄하고 도무지 진부함을 모른 채 창의적입니다. 세상 모든 게 다 눈부신 ‘새것‘으로 보이기 때문일까요? 그들의 목소리는 별 뜻도 없이 시적입니다. - P14
시와 슬픔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시는 슬픔의 것이다. 그러다 생각을 고쳤습니다. 슬픔은 시의 것이다. 이게 조금 더 참말에 가까울듯합니다. 슬픔은 꼭 시를 품지 않아도 얼마든지 슬픔 수 있지만, 시는 슬픔을 노래하지 않을 때조차 슬픔에 속해있습니다. 기쁨도노여움도 냉정함도 ‘슬픔‘이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시는 쓰는 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네 눈물 속에 네 웃음 속에 네 울음 속에날 데려가렴." *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에요. 문학동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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