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는 할머니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죠. 저희 할머니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멋쟁이였는데요, 얇은 천으로 대충 만든 옷을 보면 "얘, 이런 걸 어디다 쓴다니? 개 혓바닥 같아서 못쓰겠구나!" 질색하셨어요. 훗날 알았죠. 할머니들이야말로 메타포의 귀재들이란 것을요! 꼬맹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사촌 동생은 다섯 살 때 할아버지를 줄넘기‘라고 불렀어요. 이유를 물으니 입 주변의 팔자주름이 줄넘기처럼 보여서라나요? 한번은 친척 어른이 제 남동생의 뺨을 검지로 찍어보고 지나간 적이 있었어요. 토실토실한 밤이 귀여워서였겠지요.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이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뭐야, 왜 사람을 크림 찍듯 찍어보고 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와하하 웃으며 좋아했어요. 눈치채셨나요? 저희가 즐거워한 이유는 친척 어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어요. 동생이 사용한 말, 그중 메타포인 "크림 찍듯이" 에 크게 공감하며 즐거워했던 거죠.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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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는 그린게이블즈에서 샀다.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초록색 지붕집.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에 "그린 게이블즈는 이개간지의 가장 변두리에 있었으므로 애번리 마을의 다른 집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큰길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레이철 부인의 말을 빌면,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도저히 산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묘사된 그 집 말이다. 나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보낼 여름의 며칠을 앞두고 앤을 다시 읽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그 집의 위치였다. 작은 마을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그 소문으로부터 약간 안전거리를 확보한 남매의 집. 그런 건 어릴 때는 읽지 못한 부분이었다. 앤이 그런 집의 좌표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시끌벅적한 중심으로, - P161

"내용도 좀 엉망이야."
나는 L보다 엽서를 몇 장 더 써본 사람답게 이렇게 대꾸했다.
"원래 엽서의 생명은 스피드야! 쓰는 사람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쓰는 게 엽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지." - P162

모든 여행지에서 엽서를 부치지는 않는다. 마음이 동하는 곳이 어디일지 나는 예상도 할 수 없다. 엽서 쓸 마음을 먹고, 엽서를 고르고, 그 위에 정말 무언가를 쓰고, 마침내 우표를 붙여 부치기까지 엽서의 과정에는 이렇게 4단계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과한 엽서는 어딘가로 날아간다. 그리고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도 받았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그 엽서는 존재할 것이다. 할 말 많지만 길게 하지 않겠다는 듯한, 말간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P163

뉴욕에서 우연히 리처드 기어를 봤다. 아침 7시, 트라이베카의 어느 골목에서 그가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본 건 아니고 동행 L이 본 것이지만. 그 말인즉슨 나 역시 고개를 45도쯤 옆으로 돌리면 볼 수 있었다는 거고,
따라서 생략과 비약을 몇 단계 거친 후 머릿속에는 이미 내가 리처드 기어와 눈이 마주친 것으로 정리된, 그 한 장면만 남게되었다. - P164

이렇게 리처드 기어를 한 계절 구독한 후, 동네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임춘애를 두 번 봤다.
"어? 임춘애다!"
먼저 말한 건 역시 L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봤다. 처음엔 이 동네에 그분이 사는지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기 시작했고, 옛 기사들을 읽으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임춘애를 봤을 때, 그분은 심지어 뛰고 계셨다. 강렬한 인상을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그 동네에 사는 동안 나는 임춘애를 세 번 봤다. 매번 그분은 뛰고 있었고, 그래서 어쩐지 더 신비하게 보였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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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넘어가지 않는 순간이 그에게도 있다. 그럴 때도그는 스스로에게 준엄하다. 신형철은 "제 경우 글이 막힌다면그건 무슨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준비 부족의 냉혹한 귀결일뿐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럴 때 그는 작품이나 자료로 돌아가다시 처음부터, 처음인 듯 들여다본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탁!
끊듯이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헤치는 방식이다. 흥이 나지 않아 쓰기 싫어질 땐 "클래시컬한명문들을 읽는다"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비평가들이다. 최근엔서영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왜 읽는가>), 황 연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명작 이후의 명작) 신작을읽는다. 클래식이 원래 함대라는 뜻이잖아요. 두 분 책을 고있으면 거대한 함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듯 압도돼요. 질투는오히려 방해되기 때문에 질투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이 필요하다 - P32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건 김연수 작가에게서배운 것이죠.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건김수영 시인에게서 배운 것이고요. 얼마 전에 리베카 솔닛의 어둠속의 희망〉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뒀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있어요.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 P33

신형철 선생을 만나기 위해 2월부터 그를 섭외했다. 인터뷰를썩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보냈다. 〈한겨레〉 〈한겨레21>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오래 멀리했던 문학에 대해, ‘저 신형철‘과 일대일 대화를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턱 얹혔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하나의 얼굴로 만날 수 없었다. 인터뷰를 맡은 내가 인터뷰 직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탓이다. 우리는그의 표현대로라면 (통화만 하는) 음성 타자‘, (전자우편과 문자만 주고받는) 글자 타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신 신형철 선생은 바쁜 수업과 일과를 쪼개어 서면 인터뷰에 응해줬다. 통권호인터뷰에서 이 인터뷰만 유일하게 서면으로 진행된 배경이다.
인터뷰는 "타자의 타자성"을 깨고 인터뷰하는 재와 인터뷰당하는 존재가 유일무이한 의미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깨지 못한 이번 인터뷰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는 〈몰락의 에티카)에 이은 두 번째 평론집을 "아직 증축·보수 중"이라고 했다. 2016년 1년여간〈한겨레>에 연재한 ‘격주시화를 작은 책으로 만들어볼까 궁리중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새 책이 나오면, 그땐 꼭 직접 만나 그의 글짓는 일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 - P33

매체에 글을 막 기고하기시작한 이가 받는 원고료는 20년전인 그때나 지금이나 200자 원고지1장당 1만원 수준. 모아봐야 "한 달에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먹고살수는 없었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가르치는 일부터 전시장 지킴이아르바이트, 전시 기획, 연구 용역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 온갖 일을 하고대부분의 글은 밤 시간을 이용해 썼다.
김진수 선임기자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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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성이 입증된 약물인 만큼 언니의 의견에 이견을 달 이유는 없었어요.
그럼에도 나는 언니의 초고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편한, 그래서 방어적으로 읽히는 문장들 때문이었죠. 이를테면 언니는 "이렇게 안전한 약물적 임신중지법은 차기 임신에 영향을 주지 않아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고 쓰기도 했고, "어떤 여성도 임신중지를 결코 쉽게 결정하지 않는다며 "여성 자신의 삶과 가족과, 무엇보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고심 끝에 결정한다고 적기도 했지요.

해수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내가뭘 축하하느냐고 묻자 해수는 화면을 향해 턱짓을 했습니다.
화면에는 내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중계 영상이 저녁 뉴스로나오고 있었어요. "우리 자매님, 애 마이 썼네"라는 말에 프라이팬으로 시선을 돌린 내가 "나는 한 거 없어………"라고 하니
"그게 뭐 한 거지"라며 동생이 덤덤하게 대꾸했습니다. 무슨말인가 싶어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해수가 민 교수와 나누었다는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지요. 혹시 읽어봤느냐는 내 물음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해수가 뒷짐을 지고는 생글거리는얼굴로 다가와 귀엣말을 했습니다. "아니, 꼭 읽어봐야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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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일종의 감동 순례 코스나나는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몽고메리의 집터 부근 꽃밭에서 엽서를 썼다. 햇빛과 바람의 동선이 읽힐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이 엽서를 쓰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 글씨를 좀 못 쓴 것 같아."
내가 말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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