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는 그린게이블즈에서 샀다.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초록색 지붕집.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에 "그린 게이블즈는 이개간지의 가장 변두리에 있었으므로 애번리 마을의 다른 집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큰길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레이철 부인의 말을 빌면,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도저히 산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묘사된 그 집 말이다. 나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보낼 여름의 며칠을 앞두고 앤을 다시 읽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그 집의 위치였다. 작은 마을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그 소문으로부터 약간 안전거리를 확보한 남매의 집. 그런 건 어릴 때는 읽지 못한 부분이었다. 앤이 그런 집의 좌표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시끌벅적한 중심으로, - P161
"내용도 좀 엉망이야." 나는 L보다 엽서를 몇 장 더 써본 사람답게 이렇게 대꾸했다. "원래 엽서의 생명은 스피드야! 쓰는 사람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쓰는 게 엽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지." - P162
모든 여행지에서 엽서를 부치지는 않는다. 마음이 동하는 곳이 어디일지 나는 예상도 할 수 없다. 엽서 쓸 마음을 먹고, 엽서를 고르고, 그 위에 정말 무언가를 쓰고, 마침내 우표를 붙여 부치기까지 엽서의 과정에는 이렇게 4단계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과한 엽서는 어딘가로 날아간다. 그리고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도 받았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그 엽서는 존재할 것이다. 할 말 많지만 길게 하지 않겠다는 듯한, 말간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P163
뉴욕에서 우연히 리처드 기어를 봤다. 아침 7시, 트라이베카의 어느 골목에서 그가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본 건 아니고 동행 L이 본 것이지만. 그 말인즉슨 나 역시 고개를 45도쯤 옆으로 돌리면 볼 수 있었다는 거고, 따라서 생략과 비약을 몇 단계 거친 후 머릿속에는 이미 내가 리처드 기어와 눈이 마주친 것으로 정리된, 그 한 장면만 남게되었다. - P164
이렇게 리처드 기어를 한 계절 구독한 후, 동네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임춘애를 두 번 봤다. "어? 임춘애다!" 먼저 말한 건 역시 L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봤다. 처음엔 이 동네에 그분이 사는지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기 시작했고, 옛 기사들을 읽으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임춘애를 봤을 때, 그분은 심지어 뛰고 계셨다. 강렬한 인상을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그 동네에 사는 동안 나는 임춘애를 세 번 봤다. 매번 그분은 뛰고 있었고, 그래서 어쩐지 더 신비하게 보였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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