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알라딘 리커버 한정판)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를 읽고 읽다 외웁니다 이제 다시 여름 언덕에서 배우게 될 것들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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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쓸 땐 세상에 전언을 하러 온 사자使者인 듯 말해야 한다. 전사가 된 듯이. 혼자라서 아름다운 전사. 등 뒤로 펄럭이는 망토를 느끼기. 우아하고 묵직하게 등을 쓸어주는 바람과 망토의 합작을 느끼기. 느끼면서 다만 앞으로 나아가기. 전사. 그는 고독이라는 무대 위에 서야 한다. 홀로. - P111

갈 곳이 하나여야 해. 종이 위. 종이 위.
다른 데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르니까.
종이 위, 혹은 종이 둘레를 걸으며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삼키며걱정을 걱정으로 삼키며갈 곳이 하나여야 한다. ‘결국‘ 이라는 내 나라, 종이 위에 세워진 시의 나라.
다 망해도 결국, 돌아갈 곳. - P114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을 몇 시간 동안 내리 보고, 자극적인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누가 보여주는 저절로상영되는 남의 삶을 들여다보고, 짜고 현란하고 시끄러운 감각을 몸속에 내리 넣은 날에는 영혼의 결이 달라져 있다. 두껍고 탁하고냄새나고 건조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순한 마음, 먼 곳을 생각하는 느린 마음 같은 건 가지기 어렵다.
이런 상태의 몸에는 시(물리적인 ‘시‘뿐 아니라 우리가 ‘시‘ 라고 믿는 일 일제)가 오지 않는다. 시가 고결하고 깨끗한 거라서가 아니라시는 ‘경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굳어 있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기성과 비슷해진 영혼을 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 P119

권고 사항:진부한 말을 늘어놓지 말 것.
특이하게 쓰려 하지 말 것.
언어의 서커스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소리가 지나는 복도마다 ‘정확한 눈‘ 이라는 보초를 세울 것.
문장이 음악을 타고 흐르게 할 것.
쓴 시가 자기 맘에 드는지 체크할 것.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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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작이 실망스러운 것도 아니고, 후속작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가족들은 무슨 황망한 소리냐며 기다려보라고 했지만 가능성이 없는일은 아니었다. 아침드라마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존폐 위기를 맞아왔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라는 놀림거리가 된 지 오래고(나도 이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매일 30분 분량을 방송해야 하다 보니 쌓여가는 참여자들의 과로(갈수록 배우들의 얼굴은 어두워진다)와 그럼에도벗어날 수 없는 조악함(배우들의 어두운 낯빛은 조명을 쓰기가 여의치 않아서일 수도 있다), 제작비를 협찬에 크게 의존하면서 생겨나는 배경적한계(거의 모든 회장님은 골프 의류 회사를 운영하고, 거의 모든 주인공은 돈까스집 또는 치킨집으로 재기를 노리고, 거의 모든 주인공 친구는 지압침대대리점을 운영한다) 등은 아침드라마의 명운을 쇠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 P6

들이 반복될 때면 아침드라마의 뜬금없는 스토리에 깔깔 웃으며 어물쩍 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해내기 위해서 가면을써야 하는 것이 괴로울 때면 5천 억이 있는 가짜 부모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계약 내용을 꼬치꼬치 따져 묻는 사람 한번 못 되겠는가싶고, 주인공의 공을 다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자료실에 가두고 주요 파일을 지우고 CCTV를 없애고 애인까지 뺏는 상사를 보면서 고작점심 메뉴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내 상사는 정말 양반이다 싶고, 부모의 원수인 전 남편의 현 부인과 한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을 보며,
뭔가 조금 불편했던 동료 정도는 얼마든지 와락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 P12

그동안 모든 아침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다 보았다고 자부했던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침드라마 방영 목록을 살펴보다가 2018~19년에 방영했던 강남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제목조차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차기작인 <불새 2020)의 방영 시점(2019년5월 말)과 내가 다시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시점(2019년 6월)이 일치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는 백수 시기에 아침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절에는 아침드라마를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놀랍고 우스워하던 중 오래전에도 비슷한일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 P100

이렇게 보니 아침드라마는 비극과 희극의 요소를 고루 갖춘 종합극으로서 경계를 횡단하는 급진성을 가지는 대단한 장르임이 분명했다. 서유럽 문학의 바탕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비극도 따지고 보면 아침드라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본인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 아버지가 바람난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인 삼촌에게 살해당하자, 그 원수를 갚는 다른 자식들의 스토리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논)도, 계급 차를 무릅쓰고 결혼에 이르렀으나 이내 바람이 난 남편에게 끔찍한 복수를 행하는 여인의 스토리(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도당장 아침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전혀 손색없을 이야기들이다. 아침드라마는 그리스 비극에 견줄 만큼 교양 있고, 희비극을 아우를 만큼 유연한 장르였던 것이다(아침드라마를 누가 왜 폐지했단 말인가!). - P17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고귀한 이의 고통에는 몰입하므로 슬퍼지고, 저급한 이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므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원리가 나는 언제나 기이했다. 사람은 어째서 늘당연한 듯 거룩함 쪽에 이입하는가. 윤리적 우위라는 허상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어쩌면 그리도 쉬운가.616 목정된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아침달, 2021. 102면, - P18

그런데 아침드라마 속 세상에서 단란한 4인가족이란 그저 조연을 넘지 못하는 평범하고 밋밋한 존재이고, 대부분의 주인공이 비혼모이거나(SBS 나도 엄마야), 계약결혼을 하거나(SBS <해피시스터즈), 전 부인의 현 남편의 전 부인이었던 여자와 전 부인이 다른 남자와 낳은아이를 키우며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SBS <아모르 파티), 이혼가정이나 재혼가정은 너무 흔해서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과도한 극적 설정과 전개 덕에 ‘비정상적‘ 형태의 가족이 유독 넘쳐나는 아침드라마는 어찌 보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가족의 형태를 제안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중 최고봉을 꼽자면 바로 제목에서부터 정상가족의 신화를 뿌리째 흔드는, 2015년 SBS드라마 <어머님은 내 며느리>를 들 수 있겠다. 대체 어머님이 무려 내 며느리인 상황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한번 들여다보자. - P21

조금만 기준과 달라 보여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바쁜 현실과는 달리 아침드라마 속 세상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가족도, 혹은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어느 누구 하나 경계 밖으로 밀어내거나 소외시키지 않는다. 머글들 사이에서 평생 자신이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던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에서 받았던 환대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침드라마는 아침마다 우리의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편협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유연하고 급진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 P23

아침드라마의 역사에 남을 이 장면들은 이토록 지난한 서사와 기구한 사연이 응축되어 완성된 결과물이다.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높은 확률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장면만 보고 모든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는 것은 누군가의삶을 한 줄로 압축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선불리 판단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런 장면들을 마주할 때 상대에게 맨 먼저 전해야 할 것은 성마른 판단이 아니라 이 말 한 마디가 아닐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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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품이 큰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나무 아래 묻히고 싶어.
바다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그 나무는 바다 앞에있어야만 해.
살아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마지막은 기필코 바다에서 바다까지 머무르기를. - P79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 P35

창문에는 이름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같은 것도붙고, 눈이나 돌멩이로 위장한 진심도 스쳐간다. 그것들은 숨겨져 있다가, 어두워진 창이 바깥 풍경을 지우고 내 얼굴을 비추면 그 위로 슬그머니 상을 겹친다.
그러니 나에게도 파로흐자드에게도 창문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상상이고 이해이며 꼭 한 번은 거울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서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 P132

봄이 짧다는 탄식은 어쩌면 봄꽃만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봄꽃 특히 벚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을 실감하는데, 벚꽃이 만발하는 기간은 열흘을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벚꽃이 지고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금방 여름 오는 거 아냐? 중간이 없어, 중간이." 사실은, 중간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때만을 봄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매일 산책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돌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봄은 존재했다. 흙이 부풀어 올랐고 나무줄기의 색이 바뀌었다.
벌레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고양이들의 소요가 길어졌다. 동그란 물방울을 입안에서 굴리듯 지저귀는 새가숲에 새로 왔다. 봄은 단서들을 한껏 뿌리고 다녔건만,
도시의 건물 안에서는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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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이는 무심하게 아버지의 뱃속에서 추위에 굳어버린 황금빛 덩어리를 꺼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이가 입을 벌렸을때 동네 사람은 그 입안에서 여우나 늑대와 같은 뾰족한 송곳니를 보았다.
배가 갈라진 젊은 남자가 동네 사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 풀어주시오… - P166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므로, 소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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