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좌식책상 앞에 앉아서 ‘절대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마침내 목록을 다 지운 나는 내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연필 쥔 자국이 깊게파인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뭔가를 쓰다가 이따금 연필을 내려놓고 가운뎃손가락 마디의 옹이를 한참 내려다보곤 한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P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