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무더운 날이 오면 에어컨 앞 대신 적막한 숲속을 찾아가서 옛선조들처럼 매미 소리를 들으며 더위를 잠시 식혀봐야겠다. - P71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Le Rayon Vert, 1986)에서 주인공델핀느는 친구로부터 녹색이 그녀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는 이야기를듣는다. 그 이후부터 델핀느에게는 녹색의 사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나도 괴산에 와서 델핀느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녹색이 행운을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자연스레 녹색이 주는 기쁨과 그 힘을알게 되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창밖 너머로 보이는 푸른 산을 지그시바라보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나무들이 가득한 산속을 거닐고, 따분할때는 길가에 삐죽삐죽 올라온 초록풀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모두 그 증거일 것이다. 델핀느가 해가 질 무렵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잠깐나타나는 녹색 광선을 보면 그 순간에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는 말을 믿은것처럼, 나는 녹색을 가까이하면 그 생명력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나에게전해져서 좀 더 진실한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 P73
예전부터 반려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면 그 아이를 ‘파도‘라고부르고 싶었다. 쇼핑하듯 원하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골라서 사는 것이아니라 바닷가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예기치 못한 때에, 우연히 우리 집에오게 되는 동물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괴산에와서 한참을 기다렸던 ‘파도‘를 만났다. 파도는 괴산에서 처음으로 만난길고양이다. 앞다리 한쪽이 잘려서 절뚝거리며 걷는데, 첫 만남에 무릎 위에폭 올라와 앉았을 만큼 붙임성이 좋다. 이따금 길에서 마주하는 그 맑은눈동자를 못 본척 지나칠 수 없어서 난생처음으로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사료를 주기 시작하니 집 근처에 머무는 시간이길어졌고 마당 한 편에 집도 만들어주게 되었다. 점차 부풀어오는 배를 보니임신 중임이 틀림없었다. 그 후로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새끼들을출산한 것으로 보아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이미 임신 중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건강하게 출산했고, 몸조리 후 중성화수술을 마쳤다. - P81
동네에서 서로의 집에 초대받으면 종종 마당이나 들에 핀 꽃을 따다가다발로 묶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각각 모양과 빛깔은 다르지만 수수하게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억지스럽지 않고 참 조화롭다. 한 송이씩 손에쥐어가며 꽃다발을 준비했을 장면을 상상하면 꽤 따뜻하고 낭만적이어서마주할 때마다 기분 좋은 선물이다. 며칠 전 저녁에는 우리 집에 오신이웃분께서 본인의 마당에 심어 놓았던 취나물과 배초향의 꽃을 따다가건네셨다. - P87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 번씩만 경험해보자고 다짐한 후 내려온괴산에서의 생활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간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돌을하나씩 쌓아 올리며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싶다. 건강하지 못한 몸이 나를 괴산으로 데려다준 것을 큰 축복이라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곳에서 또 한 번의 사계절을 보내고 싶다고.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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