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하도 깊어, 밤 이외의 것은 필요 없는 순간이다. - P13
떠나는 그애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미안하지 않다. 그도 나이고, 나도 그이다. - P18
지금 나는 그와 같은 집에 살며 그를 ‘당신‘, 혹은 ‘여보‘라고 부른다. 그렇게 됐다. 뒤통수에 뜬 머리, 어깨에 떨어진 비듬도 가장가까이에서 본다. 사람의 일이 사람의 일만은 아닌 걸까? 대학 때나는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도 지지 않고 말한다. 소설을 조금 잘 쓰던 것을 빼면, 나 역시 너에 대해 기억나는게 별로 없노라고. 기분이 상해 사실 당신은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고 말하면, 그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자기 역시 그렇다고 대꾸한다. 그 이상한 머플러? 지금 내 목을 감싸고 있다. 아무리 봐도 예쁘다고 볼 순 없어서, 어울리는 옷을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그의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십수 년 전 그와 내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을 때,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그의 목에 감겨 여기까지 따라온 물건이니까. 애틋하다. - P21
"아저씨, 동태 있어요?" "(냉동실에서 꽝꽝 언 동태를 꺼내며) 여기 있지요." "(인상을 쓰며) 얼지 않은 건 없어요?" "네? 그럼 생태를 사셔야지!" "(무안해서 과장하며)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제가 미쳤나봐요!" - P28
모든 잘못 듣기는 ‘신기한 칵테일‘과 같아서, 백번째의 잘못 듣기라 하더라도 첫번째만큼이나 신선하고 놀랍다. -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양병찬 옮김, 알마, 2018)에서 - P30
**개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단순하고 깊을 것이다. 가끔은그게 슬퍼서 울고 싶다. 기다리는 개의 뒷모습보다 더 애절한 게 있을까? 기다림은 개에게서 배울 일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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