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 P182
정 떨어지는 표정을 두고 ‘매력‘이라 말해준 속 깊은 우정을한번 가져본 적 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사한 이해의 선물은 이토록 값진 것이다. - P187
당시 내가 표현했어야 할 감정은 친구가 지불한 시간과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것들을 내어준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나의 미안함은 자기중심적이었다. - P190
각자의 삶의 자리가 상대방에게는 살아낼 수 없는 세계인, 그렇기에 아무리 서로에게 각별한 존재라 할지라도 함께 있을 수 없는 이들의 관계 맺음. 요컨대 바다를 벗어나면 살 수없는 사람과 대지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다른 사람의 관계말이다. 더 나아가 나는 그것이 성(聖)에 속한 자와 속(俗)에서 살아가는 이의 이야기 같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각자의 이해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면, 사람의 수만큼다양한 해석이 허락된다면, 나에게 그 이야기는 그런 의미로다가왔다. - P194
길이 솟아나 그대가 떼어놓는 발걸음에 가닿기를거센 바람은 그대 등 뒤로만 불어오기를 하는따스한 햇살이 그대 얼굴을 반짝이며 비추기를 - P197
그대 텃밭에 단비가 스미기를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지켜주시는 손길이 그대 위에 머물기를 - P198
"삶에는 희망이나 꿈, 온기 또는 감정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헤치고 나갈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고 어느 작가가 적었듯이,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실재하는 잔혹함 앞에서 고운마음이나 따스한 시선은 무력해진다. - P220
그래도 날마다 바치는 기도와 남루한 매일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들이 더해지고 더해지면, 언젠가 나도 종소리를 낼 수 있을까. 투명하고 밝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 P223
결혼하자는 소리가 여러 차례 입 밖으로 나오려 했으나 겨우 두 번째만남에서 청혼하면 ‘없어 보일까 봐‘ 말 삼키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고궁 안뜰에 서 있던 십수 년 전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고 했다.
계속 훔쳐보면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떼었다. 연인에게밀어를 속삭이는 청년과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술 한 잔 걸치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또래 아재들 사이에서, 노곤한얼굴로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의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나도 정종 한 잔 마신 듯 마음이따끈해졌다. 다음에 후배 만나면 들려주려고 장면을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소망했다. 야자 마치고 엄마 팔에 달라붙어집으로 향하던 소녀와 친구 머리 위로 손우산 만들어주던소년과 손잡고 닭다리 뜯던 어린 연인도 여전히 그렇게 사랑하며 살고 있기를. - P256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매우 낮아 언제 패혈증이 올지 모른다고 했던 게 지난해 늦봄이었다. 골수 검사를통해 병명이 확정된 후에는 이내 휴직하고 입원 치료에 들어가리라 예상했었다. 혈연가족과 절연한 채 사는 내게 ‘환우가족‘, ‘보호자‘ 같은 단어나 ‘아프면 결국 식구뿐이야‘라는 말은 칼날같이 느껴졌다. 직장 공동체와 학생들한테서 떼어져 나와 홀로 되는 것이 투병 자체보다 두려웠다. 그런데1년이 지난 지금 뜻밖에도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 쓰며 일하는 일상을 그대로 살고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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