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H의 사진은 없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내 아들 버트, 그리고 바다를 찍고 또 찍었으니까. 이상한 점은 그날오후부터 이틀 뒤까지 사진상 기록에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이틀 후에 찍은 사진 속에서는 H가 병원침대에 누워 카메라를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쓰고 있다. - P10

이런 재양의 한가운데 어딘가에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집에서 병원, 병원에서 집으로 오가는 동안, 꾸벅꾸벅 졸고 있는H의 침대맡에 앉아 있는 동안, 병동 회진이 있을 때 매점에서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다. 나의 날들은 긴박한 동시에 느슨했다. 나는 계속해서 어딘가에서 깨어 있으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그런 한편 불필요한 침입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주변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음속은 이 새로운 경험들을 분류하고 그 맥락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 P13

매일의 세계의 톱니바퀴 사이에는 틈이 있고, 때로 그 톱니바퀴가 열리면 우리는 어딘가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 그 어딘가다른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현실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언뜻 보일까 말까 한 유령들이 산다. 어딘가 다른 세계는 지연된 시간 위에 존재하기에 현실 세계와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아마도 나는 이미 어딘가 다른 세계의 언저리에 위태롭게 서 있다가 마침내 마룻장 사이로 떨어지는먼지처럼 가뿐하고 조용하게 그곳으로 떨어진 것이리라. 그곳이 내심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놀랐다. - P14

누구나 한번쯤 겨울을 겪는다. 어떤 이들은 겨울을 겪고 또 겪기를 반복한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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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반쯤 녹은 눈 뒤덮인 대지 위둥지에서 고개를 갸웃대던 떼까마귀는 까악까악 울고느릅나무 꼭대기에서, 풀꽃처럼 은은하게그 아래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해방」 - 에드워드 토머스

‘윈터링‘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 P8

어떤 겨울은 햇살 속에 온다. 9월 초, 마흔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어느 무더운 날 내게도 이런 겨울이 찾아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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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분명히 여러 번 들어봤을 이 무례한 질문에 C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는 단순해요. 사진은 찍는 것, 그리고 그림은 그리는 거잖아요?" C씨는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작과 붓질하는 동작을차례로 보여줬다. 내가 "물론, 그렇죠."라고 하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 P58

"제목만 봤을 때는 뭔가 서정적인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거든요.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살인 이야기였어요. 남아프리카의 작은농장이 배경인데 그곳을 운영하던 여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죠. 그녀의 남편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사람을 죽인 흑인 노예는 도망치지도 않고 사건 장소 근처에있다가 경찰이 오자 곧바로 자수했어요.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 혼자 지내게 된 첫날에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조금읽다가 말았어요." - P60

"놀랍게도 소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심지어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남편이 정신을 놓아버린 것도 똑같아요.
사건 직후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한 부분도 역시 책 내용과 같죠. 저는 이게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른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점심때 즈음 그 집에 가보니 할머니가 마루에 나와 앉아 계셨어요." - P62

"강화도에서 그렇게 석 달을 지내고 난 다음에도 저는 자주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즐거웠어요.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 장례는 간소하게나마 제가 대신 모셨어요. 그리고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을 수리해서 이제부터는 거기 머물면서 제 작업을 이어가려고 해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는 게 쉽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도움이 컸어요. 저는 그림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해요. 할머니가 들려주신 강화도 이야기, 바다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사랑과 미움에 관한 이야기도 그림에 담을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그 책을 읽어보려고요. 시간은 오래걸려도 괜찮아요. 찾으시면 강화도로 한번 놀러 오세요. 저희 동네는 바닷바람이 센 편이라 해가 질 무렵이면 정말로 풀잎이 흔들리면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 P65

입수한 책의 서지를 보니 출판연도가 단기 4292년이다. 서력으로는 1959년. 덕수출판사에서 펴낸 초판이다. 오래된 책이지만비싸게 거래되는 것은 아니기에 A씨에게는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하지만 이 책을 먼저 읽는 기쁨은 책을 찾은 사람의 특혜라고 할수 있다.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본문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주느비에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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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집에 들어와 유리창너머로 희를 봤다.
희는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골목에서 기다렸다가길고 가는 다리로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나는 희의뒷모습을 보면서 유리창에 괜히 ‘안녕‘을 적었다.
015B, 신승훈, 윤상, 이승환의 감성으로, 수목드라마미니시리즈에서 보고 배운 대로 입김을 호~ 불고‘안녕’이라고 쓰면, 글자 너머로 희가 사라졌고, 희가사라진 골목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내일 또 볼 거면서. 내일 보면 다시 ‘안녕‘, 손을 흔들며인사할 거면서.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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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책에서 사색적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그녀는활동적 삶을 행동의 우위와 연관 지으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그러면서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열렬히 옹호한다. - P37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 과정을 가로막는다. - P15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 P11

우울증에 관한 에랭베르의 이론 역시 성과사회에 내재하는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한다. 그의 분석은 대체로 심리학적이며, 정치적·경제적 관점은 찾아볼 수 없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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