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사실매일 썼다곤 할 수 없지. 모든 걸 다 적었으리라고도 기대하지 말거라. 난 매일매일의 느낌을 적은 게 아니란다. - P11

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엄마가 날 데리러 왔다. 그다음날, 난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이랬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 P23

그렇지만 나, 나는 널 지켜줄 거야! 나로부터도 지켜줄 거야! 내가 네게 근육을 만들어줄게 신경도 강하게 단련시켜줄게. 매일매일 널 돌봐줄게. 그리고 네가 느끼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줄게. - P33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정확히 묘사하기만한다면, 내 일기는 내 정신과 내 몸 사이의 대사(大使) 역할을 할것이다. 또 내 감각들의 통역관이 될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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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그곳은 내게 사랑의 예습장이었다. 그 예습이훗날 어떻게 실전을 방해할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는 미러볼 조명이 스쳐 가는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쳐다보지도 못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어둡고 좁은 방에 앉아서 친구의 노래를 2절까지 듣는 어둠의 힘을 빌려 평소에 없던 용기를 내어 노래하는.

할머니들에게는 어떤 비결이있는가. 세월이라는 비결 말고 또 어떤 비밀이 있는가. 어떤노인들의 탁월한 노래는 왜 어떤 아이들의 탁월한 노래와도닮아 있는 것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발매된 노래를 낯선 결혼식에서부르는 동안 내가 노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슬아의 나이보다 심수봉의 나이에 더 가까워진 노인으로서, 사랑 말고도 많은 걸 알지만 돌고 돌아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말하게 된 노인으로서, 세월과 함께 이 노래를 진짜로 이해해버린 노인으로서 축가를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다. 스물아홉의 내가 사랑밖에 모른다고 노래할 때 어떻게 들렸을지, 하객들의 마음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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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아빠의 글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는 성실하게 일군 제 자산을 정당하게 평가받기 위해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반도부동산‘을알게 되었을 뿐 ‘반도부동산‘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진짤까?"
"그럴 리가."
유정과 세훈은 남 일인 듯 어깨를 움츠려 킥킥웃고는 캥, 맥주캔을 부딪쳤다.

"서영동 학군 강남 못지않다?"
"맞아요. 요즘 서영중 예전 같지 않대요. 혁신학교 제외된 다음부터 분위기 좋아졌다더라고요.
애들 담배도 많이 안 피우고 연애도 전처럼 대놓고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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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던 영어 성경책이 있었는데공습 때 불이 붙어 일부가 불타버리고 말았단다. 아버지는 타버린 책장에 얇은 종이를 한 장 한 장씩 이어 붙이고소실된 글자들을 손으로 다시 써넣었다. 그 책을 어떤 미군이 우연히 보고는 아버지가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미국인 집에 일자리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아빠, 저거 세 권 다 읽는 거야?"
아버지는 웃으면서 맞다고, 이거 읽다가 저거 읽다가한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됐다. 책을 두 권 이상 동시에 읽을 수가 있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다음 권으로 넘어가는 거 아닌가? (정말 이상한 일은, 지금 내 침대 옆에 책이 네 권 있다는 사실이다. 최승자 에세이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을 때 읽는다. 보르헤스 에세이는 조금 생각하고 싶을 때 읽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수시로 들춰본다. 밤에 방 불을 끈 다음에는 전자책 단말기로 탐정소설을 읽는다. 어릴 때는 도저히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읽는게 당연하게 됐다.)

몇 년 뒤에 아버지에게 두 번째 뇌경색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문자 해독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렇게 평생 책만 보던 양반이, 책을 못 보게 됐다는게 너무 불쌍해서…."
엄마의 말꼬리가 울음에 뭉개졌다. 나는 감정이 다가오는 게 두려워 일부러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깟 책 좀 안 보면 어때. 평생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도 많은데."

사전은 엄밀하고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한편 구체성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사전은 마치 경전처럼 권위적으로 지시하지만, 사전이 담으려 하는 언어는 한시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면서 사전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사전 편찬자들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 산이 계속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전뿐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노역의 공통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조형물은 쇠락하고 완벽한 이론은 반박된다. 시간의 흐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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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작지만단호한 목소리가 저만치서 들렸다.
"저는 괜찮지 않고요, 관람 예절 좀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바로 정리되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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