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다. - P146

점령하는, 물들이는, 뒤섞이며 휘저어지는, 강력한 전개. 일단 속하는 순간 대책없이 그 세계의 울타리 안에 속하게 된다. 장르가 내용을 끌고 가는 글이나 영화처럼. - P46

사골육수, 다크초콜릿 한조각, 그리고 다음 날.
카레의 세가지 치트키. - P150

가지를 가르듯저녁이 내린다. - P154

가을의 차가움을 견딘 가지가 문득 내뿜는 형형한 푸른빛처럼, 가지를 가르는 저녁은 오래 묵혀온 밤의 어둠이 빛을 향해 열리는 시간이다. - P160

한마디로 그라브락스는 한 필렛의 연어에 인간이 지금까지 발견해온 온갖 향기로운 것들을 뒤섞어 만드는 향의 연회다. - P167

이 작고 우아한 디저트는 반짝임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단위다. 어둠이 품은 다정을 짐작하는 하룻밤이다. - P178

겨울은 까눌레와 어울리는 계절이다. 버터와 럼, 바닐라빈이 구워지면서 퍼지는 다갈색의 향기는 공간에 분명한 무늬를 새겨놓는다. 방금 내린 커피와 함께하면 최고의겨울 선물. 간밤의 출렁이던 생각들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 완연한 실체로 만들어낸 아침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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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자석이 되는것 같다. 시간의 자력. 마카판스갓 조약돌을 처음 본 순간에도 그랬다. - P39

매뉴포트는 사람이 옮긴 사람의 자취가 없는 외래의 이질의 작은 물체다.
사람은 오로지 매체다. - P42

망치나 투석으로 쓰여 손상된 흠집조차 없다. 틈, 구멍,
빗금, 얼룩, 그 모든 표면의 자취는 차후의 정밀한 조사를 통해 아무런 인위적 행위의 개입 없이 오로지 물의 힘과 작용으로만 생겨난 것이라 확실히 증명되었다.
돌멩이 얼굴은 순전히 자연의 우발성으로 창조된 것이다.[14] - P46

처음부터 시작할 것이다. 소반에 공책을 펼치고 기역 니은 디귿을 그릴 것이다. 얼굴과 이름과 몸짓을 바꾸겠다. 나를 잊어다오. 네가 알았던 나는 없다. 처음부터 사랑한다. - P51

2017년 7월 30일의 꿈음악을 따뜻하게 쪼이면 벽 물질이 조금 녹는다. 너는 녹은물질을 손으로 파낸다. 나는 움푹 팬 곳에 음악을 쬐어준다.
물질이 조금 더 녹고 너는 파낸다. 우리는 이렇게 한다. 물질세계에 굴이 생긴다. 너와 나는 음악의 자국 속에 기거한다. - P55

구석의 아이는 동요하지 않는다.
구석의 아이는 늙는다.
구석의 아이는 딱딱해진다. - P61

구석의 아이는 나온다. - P67

그동안 내 꿈의 공방에서 제작한 책들의 목록은 이렇다. - P73

내용의 몰이해 너머에서 이처럼 가없이 율동하는 필치에 현혹되는 데서도, 줄거리 모르게 오로지 리듬으로 확장하는 시를 상상하는 데서도, 독서의희열은 있다. - P75

자국을 가리킨다. 반면, 음화의 손을 만들려면, 우선 입에 색깔 있는 흙가루를 섞은 물을 머금은 다음, 맨손을활짝 펴 벽에 대고, 손 주변에 불어 뿌려야 한다. 안료뿌리개로 가느다란 갈대나 새의 뼈 같은 대롱형 도구를사용했을 수도 있다.[24] 벽에서 손을 떼면 손 바깥으로색 입자의 윤곽만 남고 손이 닿았던 자리는 무색으로깨끗하게 비어 나타날 것이다. - P79

한 사람이 모호의 물결과 숲 너머 수만 년 후에 도래할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듯. 저기, 내가 번역한 게 있는데, 저작권 법의 바깥에서, 너무 아름다운 거야, 자칫 잘못이라는 것 알아, 그러니 대낮의 공중에 함부로 떠들어 보이지 말고, 우리끼리의 어둠 속에서라면. 서로를 신뢰하며 즉흥에 몸 던지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너도 그러한가. - P86

집의 책들을 다 처분할까 고민하는 찰나 그것들은각각 자개빛 물고기 비늘로 변한다. - P89

문득 알고 싶다. 혀는 어떻게 생겨날까. - P92

창은 자연과 내가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우애롭게 서로의 실존을 체감하는 접면이다. 내게 주어진창을 통해 나는 자연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무수하고 복잡한 사건들의 일부를 실감하고 체험한다. 숲과 경계한사람의 방은 자연계 사건의 표본실이 된다. - P99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의 귀환은 급습, 침범, 잠입 같은 무법의 사건으로,
혹은 선물을 동반한 방문 같은 우호적인 만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자연으로서는 본래 그것 자신이었던 장소를 탈환하는 것이며 본래 그것 자신이었던 성질을 복원하는 것일 뿐이 - P99

새 정보를 검색하면 체중 항목도 있다. 박새 16그램, 동고비 20그램, 참새 24그램… 너희는 얼마나 자그많고 여린 동물들인 것이냐.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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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인간 중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몇 배나 더 난해했습니다. - P33

이미 제겐 그 ‘여자 달인‘이라는 냄새가 스민 탓에, 여성은(매춘부에 한정되지 않고) 본능적으로 그 냄새를 맡고 바싹달라붙는, 그런 외설스럽고 명예롭지 못한 분위기를 ‘부록’으로 받아, 그것이 제 휴양 따위보다도 지독히 눈에 띄게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 P49

인간을 대하며 늘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또한 인간으로서자신의 언동에 티끌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저 한 사람의 번민은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추고, 그 우울과 긴장감을 끝까지 숨기고 숨겨, 오로지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맞은 괴짜로 차츰 완성되어갔습니다. - P17

저는 세상을 대하는 데, 점차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P105

편지지에 이렇게 연필로 큼지막하니 쓴 다음, 아사쿠사의호리키 마사오 주소와 이름을 적고, 살그머니 넙치네 집을나왔습니다. - P85

"역시, 죽은 여자가 그리울 테지?"
"네."
새삼스레, 잦아드는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게 바로 인정이라는 거야."
그는 점점 거만스레 굴었습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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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그럴 만한‘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P65

.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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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싫어하던 대상에 낯설게싫어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묘연해질임해보면때가 있다.

정해진 길이에 맞춰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쓸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음악적 감각이 이번 책에 동원되었다는 것은 음악가이기도 한 나에게무척 편안하고, 또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 P8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손에 깁스를 한 할머니가다가와 정중하게 자신의 손톱을 깎아줄 수 있는지 부탁해왔다는 글을 SNS에서 읽었다. 글쓴이는 흔쾌히 손톱을 깎아드렸고 답례로 행주와 율무차를 받았다고 했다. 요즘 이런 글에 유난히 울컥한다. - P21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해‘라는 말은 주인공의 말이라고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당신이 아니면 안된다‘라는 말을 한다. 사랑을 할 때 세계의 주인공은 ‘나‘와내가 택한 ‘당신‘이므로, - P33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인 것 같다‘는 말도 정직함과 정확함이라는 미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들었다. - P47

이런 애매모호함의 영역을 맡고 있는 모든 표현이 새삼소중하게 여겨진다. 뭔가 왠지 좀 막 그냥・・・・・・.
그것은 인간 소통의 연골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만 같다. 뼈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말들이 중요한 세상이지만 그런 말들은 연골과 함께 비로소 굴곡하며 다른 뼈들과 같이움직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멀리까지 달려나갈 수도 있고말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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