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일까. ‘좋은 죽음‘이라는 말은 있어도 ‘좋은 장례‘라는 말은 찾기 어렵다. 어떤 형식과 내용을 지닌 장례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조차 합의된 바가 없다. ‘좋은 죽음‘을 두고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는 건 거기에 그만큼 구체성이 없다는 뜻인데,
같은 이유로 ‘좋은 장례‘는 앙상한 뼈대조차 그려낼 수 없다. - P31

오늘은 네가 죽지만 내일은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차 밖 낯선 길에 고인을 두고 온 것을 슬퍼한다. - P33

모래땅을 파는 사람들 옆에서 관이 묻힐 땅을 파는 사람들. 관을짜고 묘지를 만드는 동안 논밭에 나갈 장정 손 하나가 줄어드는데도 그것이 용인됐다. 의사는 아무나 될 수 없어서 없다지만, 죽음을 다루는 마음이라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을이 있어야 장례가 있고, 마음이 있어야 장례가 치러진다. - P33

하지만 체념하기엔 현실에서도 영화 같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고인을 홀딱 벗겨놓고 염을 하는 염습실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 입술이 너무 메말랐다며 자신이 쓰던 립밤을 성큼 꺼내 고인의입에 바르는 이가 있었다. 사별자들이 지켜보던 것도 아니었다. - P35

죽음에 대해 물었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듣는다.
결국 사는 일 가운데서 죽는 일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타인의 사별을 지켜보며 하는 노동에서 자신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 P38

돈 버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덤벼들기엔 이 일은 만만치 않다.
그야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일이니. 그렇지만 김영래는 가장 어려운건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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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만 스무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스무 통의 전화는 모두 다른,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림자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그런 것뿐이겠지. - P66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본다. ‘여기‘라고 말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저기‘라고말하는 결심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모두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원도심으로 가는 버스 안에는 노인들과 나뿐이다. - P67

몸이 이렇게 말랐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어 - P69

저는 매일 듣죠. 힘들고 무겁고 외로운 거.
삶이 그런 거니까. - P69

조금 다르게 보여요. 다르게 보면 다르게 살아지고.
그런 곳이 없어요? - P70

니나는 웃었다. 니나는 삶은 우연이 쌓여서 의미가되고, 의미를 곱씹으며 운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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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리러 나가던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일층 빌라 입구 유리문에 누군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 P51

정아는 실없는 얘기를 할 때는 수다스럽지만 정작 중요한걸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시간텀을 두곤 했다. - P53

다음날, 정아는 흙이 잔뜩 담긴 이십 리터짜리 자루를 열포대나 들고 왔다. 이 또한 마주잡고 하나하나 계단으로 옮겨야했다. - P55

나는 밤에, 정아는 주로 낮에 글을 썼다. 자연스레 이어 쓰기가 되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도, 앞뒤가 맞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간 써온 글은그대로 남겨진 채 다음 이야기가 시작됐다. - P61

내가 이어 썼지만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우리의 문서함에는 중단된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건 결말을 맺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서였다. 종종 내 인생도 ‘끝‘이라고 쓰고 싶어졌다. 정아의 문장대로 이 모든 게 햇빛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커튼을 조금 열어보기도했다. - P63

어떤 것을 심든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마냥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 P67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아요. 침을 잃으면 자기들이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P70

감자 파티 이후로 정원은 날이 갈수록 스산해졌다. 꽃이 하나둘 지고, 노랗게 혹은 붉게 변한 잎들은 힘없이 떨어졌다.
정원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초록이었던 정원은 정아의머리색처럼 빛바랜 갈색으로 변해갔다. 맥빠진 결말로 향해가는 이야기처럼 심심했지만, 안전했다. - P72

너도 이제 변해도 돼. 변하지 않는 게 힘들어서 다들 변하는거야. - P75

우리가 쓰는 건 사실이 아니야.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픽션이야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순 없어. 그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해. - P79

정아씨 걱정은 하지 마. 송희야, 멸종 위기종을 지키는 가장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재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가까이에 살지 않는 거야. - P84

여기에 구근을 심어줬네요.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을 잘 보내면 봄이 되기 전에 꽃이 필 거예요. 가을에 미리심어둔 구근은 겨울과 봄을 연결해주는 통로 같은 거죠. - P85

그러더니 은재의 목덜미를 살살 간질이면 머리를 손에 비비면서 몸을 배배 꼰다고 했다. 기분이 좋으면 누워서 배를 보여주고 혀로 자꾸 핥아주는데 촉감이 까슬까슬하다고. - P95

책방 구석구석을 구경하던 손님이 카운터 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죠?"
나는 좀 당황했지만 이내 대꾸했다.
"아닌데요. 아파트 사려고 하는 건데요." - P100

"그런데 은재를 어떻게 알아봐?"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뒀어." - P103

"순응."
"알았지? 오늘부터 마음에 새겨. 그러면 돈 벌 수 있어."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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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59번가에 다다를 때쯤 내 눈에 비친 소년의 모습은아름다웠고 남자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 P95

신년회 자리에서 짐이 나를 보고 달려온다. 세라는목례를 하고는 가버린다. 한 해 전에 나는 만나는사람이있었고 두 해 전에는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밤 짐을 보는 건 석 달 만이고 세라를 보는건 여섯 달 만이다.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여자가나타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인사한다. "보고 싶었어요!" - P24

"아직도 거기 사세요?" 내가 묻는다.
"내가 어딜 가겠어?" 베라가 워낙 큰 소리로 말하는바람에 계산대 쪽에 줄 서 있던 남자가 우리 쪽을돌아본다. "그래도 자기, 알지? 그 계단 덕분에 내가튼튼하잖아."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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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죽음과 장례를 숱하게 보거나 간여하다가 정작 자신의 죽음 이후는 자신만 전혀 모르고 가는 것이,
사람과 물 생명의 결국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 당사자에게 종결이다. 생애의 모든 긍과 부, 기쁨과 고통과 걱정은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끝나고, 나머지는 산 자들의몫이다. 죽음과 장례를 관음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챈 저자는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 기록하기로 작정하고, 장례 노동자가 되어 목도하고 경청하고 만지며, 시선과 인식을 벼려가며 끈질기게 죽음 이후를 탐구했다. - P4

그러니 사람은 말기 암을 선고받고도 다음 날 출근을 하고, 메일을 열어 거래처와 일정 조율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주말에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유언이라는 걸 남기고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내가 죽음에 관해 아는유일한 한 가지는, 혼자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 P16

밖에서 엿보는 사람이 되기 싫다면, 길은 두 가지가 아닐까. 보는 일을 멈추든가, 아니면 그 안으로 들어가든가. 그래서 장례지도사 직업훈련을 신청했다. 300시간을 수료하면 장례지도사 국가 자격증을 주는 교육 과정이었다. 수강 신청을 하고 교실에 들어서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철제 침대에 누인 마네킹 몇 구였다.
시신을 대신할 연습용 도구였다. 그곳에서 두 달 넘게 머물렀다. - P19

귀가 열린 고인 앞에서 좋은 말을 얹는 장례지도사가 있고, 그래서 더욱이 입을 열지 않는 장례지도사도 있다. 물론 누워 있는이를 개의치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이나 하는 지도사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안치실 안. 마음 쓰는 만큼 손과 입이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각양각색이다. - P27

이렇게 많은 말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말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람들이 모두 ‘같은‘ 죽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다들 ‘좋은 죽음‘을 원했다. 다들 한목소리로 말하다 보니 생기는일종의 착시 효과였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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