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날 때는 귀부터 깨어난다. - P101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죽음이란더이상 신간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더이상 읽지 못할책들이 거기 켜켜이 쌓여 있었다. - P102

며칠 뒤 책이 배송됐다. 목차에 「모래 폭풍」이라는 챕터가 있어그 이야기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열풍을 피하기 위해 닫아건 1스 유리창 너머로 태양에 직사된 흰 모래언덕이 눈부셨다"라고 글은 시작됐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아내가 말한 인도말이
‘캇땀 호 가야‘라고 나와 있었다. 거기 적힌 대로, 언젠가의 그녀처럼 "캇땀 호 가야"라고 읊조리는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그때는 왜 이상한지 알지 못했다. - P103

"사실은 바람을 찾고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제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 것이라 찾고 있었지요. 이렇게."
그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자르갈도 따라 했다.
"캇땀 호 가야." - P105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펼쳐져 있었다. - P107

"괜찮아요. 땅이 물러서 발이 빠져요. 미끄러지지 않아요."
먼저 내려가 주변을 살피고 온 피디가 말했다. - P109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 P110

선배 중 한 명이 말했다.
"서로 싫어져서가요?"
그가 물었다.
"간단해. 헤어질 때는 헤어지는 일에만 집중할 것. 사랑할 때그랬듯이."
헤어지는데, 어떻게 헤어져야 잘 헤어지는 건 - P113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돌처럼 흩어져 내린, 깊은 시간의 눈으로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공룡의 사체였다. - P118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1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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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공동 현관 앞에서 수영은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쪼그려 앉았다. 여전히 혼자였고 다시한 톨이었다.
학생주 - P206

따스한 물줄기가 기분 좋은 압력으로 쏟아졌다. - P207

상수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미경의 말에 동조하면서도수영이 그때 어떤 얼굴이었을지 자신도 모르게 그려졌다 - P210

"뭐 텔러, 청경 연앤데 신경 쓸 거 있습니까. 막잔 하고들어가시죠. 피곤하고 내일도 출근인데." 상수가 말했다.
본 대로 아니라고 하자니 마 대리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고 듣고 있자니 참을 수 없어 하는 말이었다. - P215

점점 추잡스러워지는 대화에 상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가야 했다. 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알고 보면멀쩡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라서 상수는 더 신물이 났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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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에서는 산과 산 사이로 굽이쳐 흘러가는 물이 좋아서, 그 물이 강으로 흘러드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산에 오른 적도 있다. 그런데 사람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풍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상상력이 더해졌다. - P136

그러니까 내 그림은 풍경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보고 상상한 풍경이다. 예술은 모사가 다가 아니다. 모사는 시작일뿐이다. - P137

내 그림의 특징을 단순한 선, 거대한 덩어리감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산이면 산, 강물이면 강물, 바다면 바다.
나는 그 자체로 덩어리감이 좋다. 사람들이 설치한 다리나전봇대, 인물을 배치하기 싫었다. 군더더기라고 표현하면좀 그렇지만 단순한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 P142

누구에게나 특별히 아끼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 P163

남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하얀색 신부 드레스를 입은올케와 붉은색 카펫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다워 표현해보고싶었다. - P176

여동생을 그린 것인데 내 눈에는 그 예쁜 모습보다 색과무늬가 먼저 들어왔다. - P178

화제가 붙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인데, 유심히 보면 SEE와 THE SEA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읽기에 따라 ‘누군가 바다를 보다‘ 또는 ‘바다가 바다를 보다‘로 읽히도록 했다. ‘SEE THE SEA’와 ‘THE SEA SEE THE SEA‘가 이어지는 글귀를 화제로 단 것이다. - P186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서귀포 중문관광단지의 풍경들이다. 저녁 무렵이면 남편과 레오와 셋이서 가족 나들이를 자주 하는데, 이제는 나이 때문인지 다가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도 무언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 P188

곧 밤이 올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표시가 있다면, 구부러진 길을 가더라도 안심할 수있다. - P193

나는 모든 색을 다 좋아한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 P194

내가 그림과 짧은 글이 어울리는 책을 내는 이유도 이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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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방송국인데요, ○월 ○일자에 쓴 기사의 A씨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세요." - P322

책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내가 책을 구매하는 데 저자약력이 영향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왜 이곳에저자 약력을 적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스마트폰으로저자가 어떤 인간인지 검색할 수 없었던 과거의 유산일수도 있겠다. - P326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는 말은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있는 소설, 피와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쓰고 싶다. - P330

그렇게 포즈를 잡다가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에게 물었다. 사진기자들은 소설가가 오른쪽 위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글쎄요. 찍히는 분의 직업이랑 상관이 있긴 해요.
특히 소설가들을 이렇게 찍는 거 같네요. 기업 CEO한테 취하라는 자세는 아니거든요." - P334

가끔 출판인 가운데 인세 정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종수가 많고 판매처에서 보고하는 시기와 양식이 제각각이고 어쩌고. 작가들은 앞에서는
"그렇군요"하고 이해해주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사람 얼굴에 X 자를 그린다. 단골로 다니는 식당 주인이 주방 위생 관리가 참 어렵다, 바퀴벌레는 원래박멸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치자. 그 식당에 다시가고 싶겠는가? - P360

셋째, 출판사와 서점은 그동안 정책 지원을 요구할때마다 자신들의 공공성을 강조해왔다. 책에는 부가가치세가 붙지 않는다. 책은 다른 상품과 달리 유통업체가 마음대로 가격을 할인해서 팔 수 없다. 대기업은함부로 서점을 내거나 인수할 수 없다. 관련 법률들을개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면 출판사와 서점은 자기들이 그냥 사기업이 아니라고 맞선다. 그런데 공익을 위해 유통 정보를 취합하자고 할 때는 왜 말이 다른가. - P366

하지만 그것은 문화 운동이기 이전에 엄연히 비즈니스다. 나는 출판 기획자들에게 먼저 프로페셔널이되고 나서 문화 운동가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거대한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기본을 제대로 지켜달라는 거다. 입금, 교정, 예의 같은 것을. - P370

그런데 이제 와서 ⓐ 신경숙 작가의 표절 여부는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 장강명의 주관적인주장일 뿐이며 ⓑ창비는 신경숙 작가가 표절을 저질렀다고 보지 않으며 ⓒ 그러한 창비의 관점에도일리가 있다는 소리를 내 책에, 내가 하는 말인 것처럼 써 달라고? - P374

나는 신 작가의 표절 논란이 일었던 2015년에도같은 의견이었다. 페이스북에 "이게 표절이 아니라면 한국 소설은 앞으로 짜깁기로 말라죽게 될 것입니다. 젊은 소설가들이 창비에 항의해야 합니다"라고 썼다. 계간 「문학동네』좌담회에 가서도 똑같이말했다. 당시 한국 소설가들 중에 창비를 비판하는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 광경은 씁쓸했다. - P378

밤에 혼자 글을 쓰며 데뷔를 꿈꿀 때, 소설가가 된다면 이런 일들을 하거나 겪고 싶다고 바랐다. 독자와의 만남, 문예창작학과에서 강의, 문학상 응모작 심사, 영화 판권 팔기………. 개중에는 좀 이상한 로망도있었다. ‘창작의 고통으로 정신 피폐해지기‘라든가
‘정부의 탄압받기‘ 등이다. - P380

이 성명서가 나온 배경을 이해한다. 한국문학의 한구성원으로서, 한국 정부가 많은 문인들을 도와주면좋겠다고 이기적으로 바란다. 하지만 시 쓰고 소설 짓는 자들에게 설사 벌금을 매기더라도 한국문학이 궤멸하지는 않는다. 그게 문학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 P384

10년쯤 전에 사람들은 왜 한국 소설에는 시간강사나 백수, 출판사 직원밖에 안 나오냐고 툴툴거렸다.
지금은 왜 죄다 젠더, 퀴어 얘기냐고 따진다. 이런 항의는 일리가 있지만 거칠고 공격적이어서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문단은 이런 투박한 불만을 대체로 무시한다. 문단과 일반 독자는 이제 거의 소통하지 않는듯하고, 이 대목이 한국 독서 생태계의 부서진 고려중 하나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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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가진 정확하고 또렷한 힘이 어쩐지버거운 날, 그런 날에는 조심스레 한구석에 숨겨둔우아한 언어를 꺼내본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그언어로 표현해보기도 하고, 누군가 그것으로 만든책을 펼쳐 혼자 방 안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잠시 내가 바라는 아름답고 우아한사람이 된다. - P5

긴 계절인 겨울이 오면 혼자 방에 앉아 찍어둔 사진을보곤 했다. 그간 찍은 필름이 수백 롤이지만 스캔한파일을 연도와 키워드 순으로 잘 정리해두었기에 보고싶은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P22

어릴 적부터 어른과 하는 대화는 어려웠고 곤란했고때로 화가 났다.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은 드물었다. - P29

자신보다 어린 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어른은 그리많지 않다. - P30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그러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에게는 철저한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어떻게 학생을, 독자를,
관객을, 청중을 사로잡을지를 충분히 고민한 뒤에해야 할 말을 늘어놓아야 겨우 기억될 수 있다. - P31

인터뷰를 끝내고 녹음기를 확인하니 2시간 33분16초 동안 대화를 했다. 이걸 녹취록으로 풀지 않고한동안 그냥 듣고 다녔다. 거리를 걸으며, 버스에서,
자기 전에, 들으면서 그와의 대화를 가만히 되짚었고그렇게 원고를 썼다. 처음, 배운 일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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