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일이 큰 뮤지엄들이 있다. 지하 1층부터 지상7층까지 모두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나 600만 점이 넘는 작품을소장한 영국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같은 곳에 처음 가면 면적에 당황하게 된다. - P33

우선, 가장 편안한 신발을 신고 짐은 최소화한다.
모든 것을 오래 감상하려 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작품 앞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보고 싶었던 작품이있다면 그것부터 본다. 물병을 챙겨 가 틈틈이 물을마시고 의자가 보이면 수시로 앉는다. 마라톤 선수가자신의 속도를 조절하듯, 규모로 인해 지치지 않기위해 나름의 규칙을 만든 것이다. - P34

다음 날, 수업을 시작하며 선생님은 시조 한 편을읽어주었다. "어제 내준 숙제에서 너희들이 본 장면이이 시조가 묘사하는 이미지다." 보았던 장면을 상상하며시조를 분석하니 한결 쉽게 느껴지고 그 수업 내내내 머릿속에는 물 위에 예쁘게 핀 매화가 띄워져 있었다.
이 배움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P43

그 와중에 신체의 감각을 최대치로 활용해서 배웠거나잠시라도 마음을 꽉 움켜쥐었던 일들은 여러 사건이 뇌속을 오가는 틈에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 P44

친구는 예술병에 걸렸다고 웃고 나는 너무 좋다며깔깔거리고 웃는다. 세상에, 예술이라니. 술이 깨고보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예술‘이란 단어를 입 밖에내는 일은 왜 이렇게 쑥스러울까. 그런 마음을 무릅쓰고술김에 한번 꺼내보고 싶은 이유는 또 뭐람.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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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되었다. 검은 산딸기가 익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는8월을 맞이한 기념으로 포크너의 <8월의 빛> 라디오극을 들었다. 마을 입구 길가에는 다 익은 사과들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풀숲에 쌓이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바닥에서 짓이겨진과육이 부패하는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다. - P118

‘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 그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내게 속삭인 말이었던가.) ** - P120

그리고 씹을수록 진해지는 곡물 특유의 은은한 단맛. 8월의 아침 공기는 꿀빛으로 뜨끈하며 투야나무 울타리 뒤에서 어른거리며 번득이는 햇살. 우리는 서로에게 말한다. 한 잔의 커피, 그리고 따뜻하게 구운 아침의 빵을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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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면 종현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으로게임을 했다. 가끔 거실을 닦거나 빨래를 널고 있기도 했다 종현이 무엇을 하든 수영은 들어서자마자 함께 했다. - P221

떨어져 있자 오히려 회복이 되고 있는. - P223

수영은 찌개 냄비의 불을 끄고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차려 놓은 것들이 식어 갔다. - P227

침묵의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어디 있었니." 수영이 말했다. - P229

"고작 그 소리야? 말 같잖은 말, 고작 그거야? 그러니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 내년이라도 내후년이라도기어이 끝을 내 해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 겨우, 그것밖에 안 됐니? 해서 보여 주겠다는 게 이런 거였어?"
PREPA - P223

수영은 흐느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그것을 모르는 척 숨겨야 한다고생각하고 믿었던 것까지 모두 무너져 있었다. - P237

두 사람은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종일셀 수 없이 몸을 섞었다. - P239

며칠 뒤 수영은 상수에게 말했다. "종현이랑 헤어질까요?" - P239

학습은 돼 있었다. 종현이랑 헤어질까요? 그 말은 헤어질지, 말지 물어보는 말이 아니었다. 헤어지고 싶지만 걸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던 순간의 기분이떠올랐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놀랍지는 않았다. - P243

어둑한 실내를 반사하는 창문은 빗물 흐른 자국과 먼지 때가 끼어 있었다. 수영은 며칠 전 석양빛이 뭉개지던자기 방의 창문을 떠올렸다. 손자국이 묻은 자리마다 오렌지를 쥐어짠 것 같은 빛이 맺혀 있었다. 종현과 몸을 섞던 중이었다. 몸을 섞고 또 섞었지만 섞어지지 않는 것이있다는 사실만 절망적으로 확인하던 가을의 오후 수영은떨어져 나와 눈물 짓고 이불을 당기는 대신 종현의 위로올라갔다. 체중을 실어 종현을 받으며 웃으려고 애썼다. - P249

"나가자. 더 좋은 데로 가자." 상수가 말했다.
수영은 웃었다. - P250

좋구나, 참 좋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만 할 수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수영을 본 뒤라서 더 실감이 되는 것을미경은 나쁘고 못됐다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 P256

"잘했어. 많이 힘들겠더라.
"무슨 얘기해 봤어?"
상수는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옆에서 보잖아. 그래 보여서."
{"그렇지? 오늘도 그래 보이더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하는 거."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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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준이 찾아간 곳은 젊은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오피스가의 작은 병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톡스 등의 미용 시술 가격표와여러 할인 이벤트에 관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 P131

이제 와 알은체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고, 마침 간호사가 가도 된다기에 그대로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그날 밤에 근육통과 미열이 있어 늦도록 잠들지 못했고, 구토가치밀어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고 그녀는 썼다. - P135

"부드럽게, 중요한 건 부드럽게 물어보는 거야. 캐묻거나 다그치면 안 돼. 알겠어? 캐릭터가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부드럽게." - P137

9월의 첫날, 명준이 그 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여름이었다.
바람은 섬을 감싸고 돌며 폭풍우와 태풍을 막아준다는 검은 바위들을 지나 살갗에 끈적함을 남기고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 P140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 P143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 P145

밤의 해변에 서서 명준은 어둠을 바라봤으리라. 어둠에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멀리서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빛도,
대지의 윤곽을 만들며 밤하늘로 은은하게 번지는 빛도 있었으리라. 그 어둠 앞에서 명준은 어떤 기미를 느끼려고 했으리라.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어두운 해변 여기저기를 바라봤으리라. 그렇게 그는 혜진과 다시 해변에서 만났다. 둘은 해변에 앉아 메스칼을 나눠 마셨다. - P149

혜진이 말했다. 명준은 그건 어쩌면 자신이 병원을 나설 때마다했던 좋은 생각, 엄마가 퇴원하는 상상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생각했다. 울음을 멈추는 데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들. - P151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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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 속에서 메기는 다른 노래에 사는 수재나를 만나 배조를 메고 알핀로제가 만발한 베르네로 향했다. - P64

계속 나만 볼 거예요?" - P66

그러자 곡류에 휘말리는 물살처럼 나는 급히 꺾였다가 무언가를둥실 타넘었다가 차고 따듯한 기류를 넘나들며 밑으로 밑으로 하강했다. 벌써 내 육신의 세포들이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 P69

"괄호?"
"비난도 칭찬도 아닌, 괄호, 판단 이전의 괄호." - P71

"나한테 발가락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발 한쪽을 다 주진 못해도 자기 발가락 하나로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까짓거 준다고." - P75

"슬퍼한 사람." - P80

세모는 치과에 갔을까. 사랑니를 뽑았을까.
내가 꿈에 나타나면 세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84

나는 몰랐는데 내 상상은 어떻게 아는 걸까. 난 끝났는데 지금여기서 뭘 하는 걸까. 죽었는데 아직도 뭐가 두려운 걸까. 죽어서도 죽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노래가 끝나도 혀끝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다면 누군가의 꿈에 찾아가 어떤 말을 해야 한다면. - P86

그러니당신은 기쁘게 내 꿈을 꿔주길. 분명먹어요 대학오늘밤은 엄마, 엄마의 꿈으로. 주커피우유 가지고 갈게요. 멋지게 빨대 꽂아줘요. - P94

밤마다 저는 악몽을 꿉니다. - P95

저는 ‘연다‘는 말의 숨은 뜻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어쩌면 제 꿈 꾸세요」라는 소설은 그렇게 환영 인사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잘 가, 라는 작별인사와 함께 - P98

거듭 헤어질지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존재들영영 나타나지 말라고 깊숙이 매장한 공포들그 두 개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글을 씁니다. - P99

잎이 무성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새들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날 수 있을까요. 날면서 울고 날면서 싸고 양쪽 덮깃을 날렵하게 오므렸다가 떼 지어 솟구칩니다. 추락과 급선회, 민첩한 공중회전이 눈부시게 자유롭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새의 나는 모습과 비슷할 겁니다. 공기의 움직임은 물의 움직임과 같은 원리라고 하니 영혼의 모습은 물고기의헤엄과도 닮았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저는 꿈속에 있는것 같습니다. 꿈의 몸이 되어 누군가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싶어집니다. 꿈꾸는 모든 존재가 폭 잠들기를 바랍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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