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미 두 장 반짜리 방 구석구석 아슴푸레한 새벽빛이 스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진이 선물해준 달력. 한 장 한 장 뜯어쓰는 일력이다. 한 면을 가득 채운 ‘8‘이라는 숫자와 ‘숲‘이라는 한자 아래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 오후 5시 35분‘이라고 적혀있다. 실제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라디오‘와 숫자뿐이지만, - P201
"잊으시면 안 돼요." 진은 버릇처럼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일력을 뜯어내는 일을 잊지 말라는 건지, 인터뷰를 잊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P202
이제 일곱시쯤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라디오에서 시보를 전한다. 다시 눈을 감는다. 졸려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눈을감는다는 것은 눈꺼풀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검붉은 배경 위로 흑점이 떠다닌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날파리처럼 아른거리던 흑점들은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흑점의개수도 늘고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주위가 차츰 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흑점의 배경이 검붉은 빛에서 노을빛으로, 그리고복숭앗빛으로 점차 옅어진다. - P205
그전에 글자를 모를 때도 가게 이름은 알았고,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니 세상이 달라질 정도의 큰 변화는 아니다. 그래도 진이 찾아오면서 달라진 것이 있긴 했다. 낱말 카드 대신 진의 곱게 묶어넘긴 머리카락을 보며 내 나이에서 진의 나이를 빼보기도 하고, 진의 나이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헤아려보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 P207
이삼 분 정도 지나면 라면이 알맞게 익을 것이다. 라디오 전화인터뷰 시간은 약 칠 분이라고 했으니 이 기다림의 두 배 정도 되는 시간이다. 질문이 다섯 개니 일 분정도씩 대답을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 P209
본래는 별 관심 없이 흘려듣지만 인천과 여성이라는 말에 귀를기울인다. 정답은 1번 수원이었다. 진행자는 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혜석의 생애를 들려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죽었지만 파리며 독일이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 P213
미역을 다듬듯, 내 삶에서 불편한 부분을 걷어내고 보기 좋은부분만 남도록 다듬어 들려주었다. 진은 내 얘기를 듣다 가끔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진의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대체 어디쯤에서, 무엇 때문에 운 건지 내가 했던 이야기를 되짚어볼 때도 있었다. 내 진짜 삶을 들으면 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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