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마다 놓인 뜻밖의 행운과 불행, 만남과 이별 사이를 그저 묵묵히 걸어나간다. 서로 안의 고독과 연약함을 가만히 응시하고 보듬으면서. - P31
미래 쪽으로만 흐르는 시간은 어떤 기억들을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지만, 장소는 어김없이 우리의 기억을 붙들고 느닷없이 곁을 떠난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 앞에 번번이 데려다놓는다. - P21
지난해 봄 이후, 동네 주변은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재개발 추진 동의서를 받는다는 현수막과 벽보가 곳곳에붙었는데, 대부분은 좁은 골목과 낙후한 주거환경의 불편함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불편함은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틀림없이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근 동네의 재개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근심하는 우리 동네 이웃들도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 P89
이에너지가 넘치고 말썽꾸러기다보니 위험한 일을 겪은 적도 많았다. 자장면 빈 그릇을 할머니가 잠깐 베란다바닥에 내려놓은 사이 자장 소스를 깨끗이 핥아 먹기도 하고-강아지는 짠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 우리가 먹다 버린 치킨 뼈를 씹어 먹어서-잘게 부서져서 삼키다 식도나 내장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닭 뼈 역시 개들이 절대 먹어선 안 되는 음식으로 알려져있다-우리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 P113
다정한 강아지가 혹시 나를 걱정해 나비의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무는 걸까봐 나는 다시 힘을 내보기로 한다 - P123
쇠락한 벽돌 담벼락 위로 일렁이는 가을빛을 나침반 삼아 걷는 날들이 쌓일수록 나뭇잎의 색이 바뀌고 하늘의 색은 깊어졌다. - P139
킁킁 냄새를 맡을 때면 세상 모든 것에의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으니까. - P147
할머니, 잘 있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는 8년이 되었다. 나는 더이상할머니를 생각하며 울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리움에 사무쳐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면 슬퍼지기도 한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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